블라디보스톡의 중국인들은 어떻게 소멸되었는가?
글: 야우소풍(夜雨疏風)
2022년 7월 1일은 블라디보스톡 도시설립 160주년기념일이다(실제 할양시기는 1860년 11월이다). 즉, 우수리강 동쪽의 토지가 중국의 품을 벗어난지 160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토지위의 중국인들은 영토의 할양과 더불어 소실되지 않았다. 1938년까지 소련은 각종 수단으로 소멸시켰다.
1. 성황(盛況)
지금은 갈수록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블라드보스톡(중국명 海參崴)로 여행을 온다. 사람들은 이곳의 해산물을 맛보고, 성당의 앞에서 앞다투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1세기이전에 이 번화한 상업거리를 건설했던 사람, 그리고 소유했던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들 중국인들이 얼마나 처량하고 피비린내나게 이 토지를 떠나야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조약(瑷琿條約)>과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200여년동안 꿈에도 그리던 흑룡강유역의 토지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17세기 중엽이후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토지를 대거 점령하였지만, 이 지방은 극한의 땅이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가 없어서, 개발가치가 별로 높지 않았었다.
100여만평방킬로미터의 간척개발에 적합한 토지를 새로 획득함으로써 러시아는 진정한 두 개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가진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의 바이칼호 동쪽의 70%이상의 인구는 외흥안령이남, 우수리강동쪽의 예전에 중국에 속했던 토지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이 러시아에게 얼마나 전략적인 가치가 큰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제정러시아는 새로운 영토에 두 개의 대도시를 건설한다. 하나는 하바로프스크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백력(伯力)이다. 이는 17세기 최초로 흑룡강유역을 개척하면서 토착민인 다오르족, 어원크족을 도살한 식민두목 하바로프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 또 하나는 블라디보스톡인데, '동방을 지배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두 개의 이름은 중국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에게는 모두 강력한 식민침략의 색채를 풍긴다.
청나라와 제정러시아간에 <북경조약>을 체결하기 이전에, 우수리강동쪽에 한족은 거의 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 청나라조정은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 개원(開原) 유변(柳邊)외의 동북토지를 만주인의 발상지로 보아 한족이 이곳에 진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측의 통계에 따르면, 1860년 이곳에는 단지 2000여명의 유동성이 아주 강한 한족이 살았을 뿐이다. 그들은 인삼채집, 물고기잡이등에 종사했고, 많은 사람들은 도망온 범죄자들이었다.
새로 점령한 토지를 개발하기 위해, 제정러시아정부는 한편으로 유럽영토에서 이민자를 조직하였으나, 이곳과 유럽대륙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오려면 1년 내지 2년이 걸릴 정도였다. 그래서 이민효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1861년부터 1881년까지 겨우 1.1만명의 유럽이민이 극동지구로 왔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노동자를 흡수한다. 그리고 상당한 수량의 조선노동자들까지. 중국이민자들이 대량으로 극동지구로 밀려왔는데, 이들 중국이민자들은 대부분 산동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육로로, 수분하(綏芬河)에서 러시아영토로 들어가고, 또 어떤 사람은 직접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1886년, 극동의 중국인수량이 2.75만명에 이른다. 1897년에는 4.1만명으로 증가하고, 1911년에는 11.1만명이 된다. 1차대전전에 극동지구에 사는 중국인은 이미 20만명가량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인들은 러시아극동인구의 10-15%를 차지한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군인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같은 대도시는 중국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1897년의 인구센서스때 블라디보스톡의 인구는 28,933명이고, 그중 중국인수량은 12,577명이었다. 만일 철새처럼 오가는 중국인유동인구까지 포함한다면, 블라디보스톡에서 중국인은 절반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중국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주로 종사한 것은 건설과 관련된 업종이었다. 부유한 중국인은 큰 공사의 도급을 받았고, 그후 가난한 중국인노동자들을 건축쿨리(苦力)로 고용하였다. 중국인들은 시베리아철도극동구간과 저명한 블라디보스톡기차역을 건설한다. 이 기차역은 시베리아철도의 종착역이다. 블라디보스톡의 다른 중욯나 랜드마크건물인 연해주이사회빌딩은 중국상인 유관묵(劉冠默)이 건축했고, 전보빌딩은 상신운(桑新雲)이 건설했으며, 개선문은 서철련(舒徹聯)이 건설했다...다수의 러시아군영도 중국인들이 도급받아 건설했다.
블라디보스톡 도시가 형성된 후, 중국인들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의 114개 기업중 57개가 중국인의 것이었다. 1895년 중국인기업의 수량은 126개로 늘어난다. 러시아인이 만든 기업의 수량은 겨우 58개이고, 나머지 외국인들이 개설한 기업의 수량은 16개였다. 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되면서 블라디보스톡의 규모는 급격히 확장된다. 중국인기업도 갈수록 많아졌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톡에 등록된 기업중에서 중국인기업의 수량은 1,089개로 늘어난다.블라디보스톡의 최대기업 "쿤스트 앤드 아리빌스"의 파트너인 아돌프 바시리예비치 다탄은 그의 <아무르연안상업역사수필>에서 이렇게 적었다:
"중국인들은 일찌감치 한 골목에서 다른 골목으로 나아가 전체 도시로 발전해나갔다....전후좌우의 다른 상점들은 생계를 잃고....전체 지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중국인들은 경제적으로 아주 강대하다. 점차 노동력과 상품시장을 장악했다."
블라디보스톡을 살펴보면, 20세기초, 블라디보스톡의 최대상업거리와 가장 번화한 도심은 확실히 상당부분 중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톡의 가장 중요한 상업가인 알레우츠카야거리, 스베틀란스카야거리, 해군제독포키나거리의 많은 상업건물은 채씨(蔡氏), 태채령(邰彩玲), 이립호(李立浩)등 실력있는 중국상인들 소유였다.
또 한명의 전설적인 인물은 기봉태(紀鳳台)이다. 1901년 20만루블을 투자하여 블라디보스톡 최대기업중 하나인 K상행(商行)을 설립한다. 러일전쟁때 그는 1,500대의 트럭, 6천필의 당나귀로 운송팀을 만들어 러시아군의 물자조달을 책임졌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사업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그외에 중국인은 극동의 근해운수와 흑룡강내하항운을 통제했다. 1910년을 전후하여, 블라디보스톡항구에 등록된 상선은 600여척인데, 다수가 중국인 소유였다. 그리고 이들 상선은 적재량이 많지 않아 일반적으로 50톤가량이었다. 다만, 중국인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러시아기업가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제정러시아의 국가두마가 외국인은 극동에서 해상운송업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 전까지는.
전체적으로 말해서, 제정러시아시대에, 중국인과 러시아인은 함께 협력하여 극동지구를 개발했다. 러시아인은 지배자였고, 군대와 금융, 광산등 핵심산업을 장악했다. 중국인은 일반적인 업종에서 우세를 차지했다. 이는 남양지구 유럽식민지배자와 중국인이 협력한 모델과 아주 유사했다. 중국인은 인구에서 방대한 점유비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동남아지역의 인구구조와 유사했다. 만일 제1차세계대전과 10월혁명으로 역사가 바뀌지 않았다면, 중국인들은 아마도 계속하여 이 지역으로 이민갔을 것이고, 이후 이 토지에서 생활하는 주요인종이 되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아마도 동북아의 싱가포르로 성장하였을지도 모른다.
2. 10월혁명이후의 중국인
1917년의 시월혁명은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볼셰비키는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고, 착취제도를 없애겠다고 주장했다. 중국인들은 극동지역에서 생활은 국내의 동포들보다 괜찮았지만, 지위는 확실히 유럽인들보다 못했다. 중국인들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가했고, 볼셰비키와 함께 반동통치를 전복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 마치 베르흐네우딘스크중국인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신정권에 보내는 서신에서 말한 바와 같다:
"우리는 러시아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우리의 사업으로 여긴다. 혁명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과실을 우리는 반드시 보위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러시아경내에 최소 5만명의 중국인노동자들이 시월혁명과 그후의 국내혁명전쟁에 가담했다. 각지에는 여러 '중국단' '중국영'과 '중국지대'가 나타난다. 극동지구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중국인 신계무(辛繼武)가 조직한 유격대로 인원수가 3천명에 이르렀고, 우수리강유역에서 활약하며 백군에 큰 타격을 가한다. 백군이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한 후, 극동철로사으이 중국인노동자들은 대파업에 참가하여, 백군의 공급과 군사배치를 크게 저해했다.
시월혁명은 확실히 어떤 측면에서 중국인들의 처지를 개선했다. 예를 들어 중국인노동자들의 대우는 제정러시아때보다 좋아졌다. 더 이상 감독관의 채찍을 맞지 않아도 되었고, 노동시간도 크게 단축되었다. 소련당국은 중국인구락부를 설립하고, 중국어학교를 개설하는 것도 허용했다. 다만, 중국인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자유와 평등은 얻어내지 못한다. 중국인들은 극동의 '상업민족'이고 자연스럽게 신정권의 사유재산소멸의 목표와 충돌했다. 1921년부터, 소련당국은 중국기업을 압수하고, 중국상인들에게 국가공채를 매입하도록 강제하며, 중국인들이 중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리하여 중국상인들의 생존공간은 갈수록 좁아졌다. 이때 블라디보스톡영사관은 국내에 이렇게 보고한다.
"소련정부가 성립되고나서, 화교들이 받은 손실의 금액은 은 1천여만원에 이릅니다. 화교가 해를 입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이십명이상입니다. 이 두 가지는 블라디보스톡 한 도시에서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모두 관련증거가 있습니다. 증거가 없거나 다른 지역의 손실된 금액과 생명은 모두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신정부가 호구등기와 일상생활용품공급제도를 시행한 이후,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국적이 없으므로, 공급을 받을 수 없었고, 생활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소련이 점점 혁명시기의 민족정책을 버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점점 대러시아주의의 길을 걸었다. 비러시아민족, 특히 비유럽인종, 역량이 강대한 아시아민족에 대하여는 배척, 동화 내지 소멸정책을 시행한다. 소련벙부는 이들 민족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했고, 국가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후 차례로 전체민족에 대하여 축출, 진압(예를 들어 중국인) 혹은 강제이주(예를 들어, 조선인 체첸인, 칼미크인)등의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1차5개년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노동력이 부족했던 극동에서는 중국인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많은 중국인노동자들은 국영기업에 흡수되어, 국가에서 고용한 노동자가 된다. 통계에 따르면, 이 시기, 전체 연해주의 노동자중에서 중국인노동자의 비중이 40%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로 중공업, 광산업, 벌목업과 어업등에 종사했다. 중국인은 상업적으로 극동에서 배척되고 축출당했지만, 노동력시장에서는 여전히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6년에 이르러, 극동의 중국인수량은 6.3만명으로 감소한다. 전쟁전에 비하여 절반이상으로 줄었다. 다만 이곳의 중국인들은 정착했고, 점차 러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장기간의 안정적인 생활로 중국인들은 점차 교민에서 소수민족으로 변화해갔다.
3. 피비린내나는 퇴장
그러나, 1929년이후,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면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된다. 소련은 중국인들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임의로 중국인상인의 기업을 폐쇄하고, 임의로 화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로 기부하게 하거나 잡세를 납부하게 한다." 9.18사변후 소련은 더욱 중국인을 극동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안요소로 보기 시작한다. 중국인에 대한 진압, 축출정책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난다. 1934년, 극동지역의 중국인은 3.1만명으로 감소한다. 1926년에 비하여 다시 절반이상 줄어든 것이다.
만일 이전까지는 비교적 온건한 경제적수단으로 중국인들을 제한하여 중국인을 축출하려는 목적을 달성했다면, 1935년이후에는 완전히 비인도적인 수단으로 중국인을 진압하고 소멸시키게 된다. 1936년 4월 17일, 소련공산당볼셰비키정치국은 결의를 통과시키는데, 연말까지 블라디보스톡 차이나타운의 중국인을 숙청하도록 명령한다. 집행기구는 지방정부가 아니라 내무인민위원회(NKVD, 숙청기관) 극동변강구관리국이었다.
중국의 항의를 불러올까 우려하여, 소련공산당볼셰비키정치국은 6월 17일, 다시 극동변강구에 이런 지령을 내린다:
"금후 행동을 더욱 조심하라. 그들에게 구실을 주지 말라. 즉 그들에게 이것이 중국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축출과정에서 외교인민위원회와 협조하고, 금년내로 차이나타운의 처리를 완성하라."
이해에 모두 4천여명의 블라디보스톡 중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다.
1937년 6월, 소련 내무위원회는 간첩, 파괴분자진압에 대한 결의를 반포한다. 12월 22일, 소련 내무위원회 인민위원인 예조프는 기밀명령을 하달한다:
"모든 중국인은 그들의 소속 국적을 불문하고, 도발행위 혹은 테러의도가 있는 자는 즉시 체포하라."
12월 29일 밤, 극동에서 대규모 중국인체포행동에 들어간다. 내무인민위원회가 "중국행동"으로 명명한 이번 행동으로 1,100여명의 중국인이 체포된다.
1938년 2월 1일 소련공산당볼셰비키정치국은 <내무인민위원회의 극동관련문제>에 대한 결의를 한다. 모든 외국인을 극동과 자바이칼지역에서 축출하고, 간첩이나 반소행동혐의자는 모조리 체포하며 국적을 가리지 말고 진압한다는 내용이다.
이 결의하에 1938년 2월하순, 소련극동당국은 중국인에 대하여 제2차체포행동에 들어간다. 중국주블라디보스톡과 주하바로프스크영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정관리국은 밤을 새워 대형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선량한 화교를 다시 백여명이나 체포했습니다. 그 기세는 흉험하여 마치 도둑을 체포하는 것같았고,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모조리 잡은 후에야 끝날 것같은 기세입니다. 듣기로 지난 번에 체포한 화교들은 변방의 추운지방 각지로 보내어져 힘든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중국인을 대하는 것은 개돼지만도 못합니다. 생사여탈이 임의로 이루어집니다....교민을 체포하는 일이 연일 계속되며, 소련측은 몰아부쳐서 여지를 주지 않으며, 그 야만스러운 행위는 경자년에 중국인을 축출한 것과 같습니다."
내무부 인원은 화교들의 집을 하나하나 수색했고, 도망친 화교들이 영사관의 문앞에서 피난하도록 진입하게 해달라는 자들이 1천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밤을 새우며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놀란 모습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 체포된 중국인은 2,005명에 달했다.
그후 중국 주소련대사관이 소련측에 가장 엄정한 항의를 제기한다. 소련의 외교인민위원회는 중국인의 다수가 일본, 만주의 간첩이라고 말했고, 아주 강경한 성명을 발표한다. 3월하순, 다시 중국인에 대한 제3차체포행동에 들어간다. 이번에는 더욱 철저했다. 내무인민위원회는 직접 길거리에서 사람을 잡아들였다. 많은 화교들은 시내버스에서 잡혀갔다. 체포대상은 성년남자만이 아니었다. 부녀자와 아동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교민들은 영사관으로 도망쳐 피난하려 했으나 도중에 잡혀서 끌려갔다. 이번 체포행동에서 모두 3,082명이 잡혀간다.
1937년에서 1938년 3월가지 연해주에서만 체포된 인원이 최소 6천여명이었다. 1년전에 영사관에서 통계를 잡은 중국인의 수량은 11,000명이었다. 반수이상의 중국인이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전체극동지구에서 체포된 중국인은 11,000여명에 달해, 중국인총수의 60%이상이었다. 이를 보면 숙청은 이미 간첩이나 테러분자를 잡아내는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적나라하게 중국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한 것이었다.
이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숙청기관은 이들 체포한 화교들을 고문하여 간첩죄를 자백하게 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많은 경우 뜨거운 보일러 옆에서 간첩사실을 자백하도록 고문받았다. 체포된 중국인들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고문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중국영사관은 구금인원에 대한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4월 27일부터 5월 27일까지, 내무관리국은 황급히 사건기록을 만들어 재판을 진행하고, 최종적으로 3,123명을 총살형에 처한다. 나머지는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예를 들어, 1938년의 제1차체포때 불법월경죄로 강제수용소로 보내어진 270명중에서 269명이 동사, 아사하고, 오직 1명만이 요리사인 관계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소수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정부의 교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설사 소련국적을 취득했더라도, 그리고 정치적으로 소련공산당을 적극지지하던 화교들도 숙청과정에서 관용이 없었다. 1937년, 내무인민위원회는 180명의 교사학생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는데, 중점조사대상은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었다. 그들 다수는 서둘러 재판을 하고 처결당한다. 사건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원으로 예를 들어 학생 왕유청(王維淸)은 원래 동북의용군의 전사였고, 나중에 소련의 정보요원이 된다. 여러번 만주국으로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1938년 총살당한다; 레닌학교 중급부 주임인 양흥순(楊興順)은 오래전부터 볼셰비키였다. 그러나 체포된 후 철저히 실종된다. 1938년 5월, 전체학교의 400여명의 교사 학생중 겨우 89명만이 자유를 얻었다.
여러차례의 축출, 체포를 통해 남은 8천여명의 중국인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국민당정부는 소련정부와 여러차례 교섭을 벌여, 이들 교민들은 마침내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신장을 거쳐 중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1938년 5월 20일 소련당국은 <극동화교이주방법>을 통과시키고, 7월에 이르러 극동지구영사관은 모두 8,025명을 귀국시킨다. 1939년에 이르러, 전체 소련의 연해주에는 겨우 351명의 화교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수만명의 중국인이 모여살던 블라디보스톡, 수십만명이 모여살던 극동지역의 상황은 더 이상 없어지게 된다. 1860년 극동과 중국이 정치적관계를 철저히 단전하게 된 후, 문화적으로도 이제 중국과 관계를 단절해버리게 된 것이다. 중국은 소련극동지구의 문화와 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철지히 상실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야 약간 회복할 수 있었다.
결론
소련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극동의 중국인들에 대하여 진압과 숙청을 진행한다. 수단은 동시대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와 아주 유사했다. 심지어 더욱 피비린내났다. 나치의 2차대전전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단지 축출과 재산몰수였다. 그러나 소련은 재산몰수외에 비인도적인 대규모의 육체소멸까지 실행한다. 러시아사회정치사국가자료관의 기록에 따르면, 8,500여명의 중국인들이 '대숙청'기간중에 살해당한다. 그중 많은 사람이 극동지역의 중국인이었다. 만일 강제수용소에 보내어져 죽은 중국인까지 계산하면 수량은 당연히 1만명이상일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의 절반이상인 것이다. 이처럼 높은 사망률은 종족말살이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유태인이 도살당한 역사는 역사저작,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정리되어 남아 있고 여러 개의 기념관들은 세계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고난을 잊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2만명의 폴란드인이 카틴숲에서 살해당한 사건도 계속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폴란드에 대하여 사죄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당한 이 피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기념도 하지 않고, 기억도 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비록 이미 흘러갔지만, 러시아의 일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중국인을 "황화(黃禍)"로 보는 음혼(陰魂)이 여전히 시베리아상공에 떠돌고 있다. 중국상인은 지금도 여전히 각종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 당국에서는 여러 차레 중국시장을 파괴하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스킨헤드들은 여러번 중국인에 대한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 시기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인은 러시아인들에게 이 역사를 기억하도록 환기시킬 수가 없다. 중국인들이 박해당한 비극은 아마도 미래에 다시 재연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들춰내어 민족간의 원한을 부추길 필요는 없다. 중국과 러시아 양국간의 왕래에 적극적인 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안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역사를 잊어야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택적으로 눈감은 것은 단지 비참함과 피눈물만이 아니라 정의와 양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