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서(武攸緖): 무측천의 가족중 유일하게 화를 피한 인물.
글: 덕혜(德惠)
무주(武周)왕조를 건립한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재위시에 불교를 대거 숭상했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무측천이 살아있을 때 무씨가족에게 대거 작위와 상을 내렸으나, 그녀가 죽은 후 무씨세력은 차례로 제거당한다. 당시 무씨가족중 세력이 가장 컸던 사람은 무삼사(武三思)이다. 그는 양왕(梁王)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무숭훈(武崇訓)은 안락공주(安樂公主)와 결혼한다. 그러나 신룡3년(707년), 부자는 모두 처형당한다. 태평공주(太平公主)의 남편인 무유기(武攸曁)마저도 묘가 파해쳐지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둘도 살해당한다. 나머지 봉상(封賞)을 받았던 무씨가족들은 속속 강등당하거나 탄압받았다. 다만, 무씨가족중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시종 황제의 존중을 받았다. 그는 바로 무유서(武攸緖)이다. 오늘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무유서는 무측천의 조카이다. 당고종 영휘6년(655년)에 태어났다. 그때 무측천은 이미 황후에 올랐고, 무유서는 어려서부터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소유지행(少有志行), 염담과욕(恬淡寡慾)"했다. 세속의 부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14살때, 무유서는 가명을 쓰고 장안의 번화한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었다. 매 5,6일마다 장소를 옮겼다. 그는 자신의 명리학을 검증해보려는 것이었고, 재물을 탐해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무측천이 태후의 신분으로 임조칭제(臨朝稱制)하며 당나라의 대권을 장악한다. 무유서는 태자통사사인(太子通事舍人)에 임명된다. 천수원년(690년),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꾼다. 즉 무주이다. 무유서는 안평왕(安平王)에 봉해지고, 전중감(殿中監), 양주대도독부장사(揚州大都督府長史), 홍로소경(鴻臚少卿), 천년위장군(千年衛將軍)등의 직을 맡는다.
만세통천원년(695년), 40세의 무유서는 무측천이 당황실의 종실들과 그녀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산림(山林)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안평왕의 작위와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숭산(嵩山)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이때부터 그는 매일 도경(道經)을 읽고, 도가약물(道家藥物)을 복용하는 생활을 보낸다. 많은 귀인들이 그를 만나러 오고, 그에게 산을 내려와 관직을 맡을 것을 권유했다. 심지어 무측천까지도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산을 내려오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한다. 이들이 무유서에게 보낸 선물은 모조리 들판에 그냥 놔두어 먼지가 그 위에 쌓이게 하였다. 그러자 모두 무유서는 진정으로 은거하여 수도한다고 믿게 된다. 무측천이 재위할 때 무유서는 숭산을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무측천이 사망한 후, 무유서는 두번 경성으로 돌아오지만, 금방 숭산으로 되돌아간다. 첫째는 당중종이 황제에 복위했을 때이고, 두번째는 당중종이 안락공주를 결혼시킬 때이다. 두번 모두 사람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무유서를 경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었다. 무유서가 귀경할 때, 당중종은 그에게 친근하게 대했고, 맞이하는 예의도 아주 융숭했다. 무유서에게 관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맡지 않았다. 당중종이 내린 대량의 상사(賞賜)를 그는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그는 말을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당중종, 당예종, 당현종이 모두 무유서를 아주 존중했다. 그리고 그는 한마음으로 수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무씨가족들이 제거당할 때, 화가 그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당현종은 특별히 성지를 내려 주변의 주현에 그를 건드리지 말도록 명하기도 했다.
기실, 무씨가족이 제거당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무유서가 멍청하다고 여겼다. 부귀영화를 마다하다니. 그러나 무씨가족이 제거당한 후에는 여론이 속속 바뀌었다. 무유서라말로 총명한 사람이라고. 무유서는 그런 말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한마음으로 수도에 임했다.
말년의 무유서는 특이공능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태양빛이 강렬할 때는 별이나 달이 보이지 않는데, 무유서는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에서 자색 빛이 나고, 낮에도 별과 달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몇리 밖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개원11년(723년) 무유서가 서거한다. 나이 69세였다.
무측천의 살륙으로 무씨가족은 그녀가 죽은 후 청산당한다. 그러나 무유서는 일찌감치 무씨가족이 청산당하고 밀려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작위와 관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화를 피한다. 심지어 수련의 길로 들어섰고, 결국 성취를 거둔다. 그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