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지변(癸酉之變): 가경제 암살미수사건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10여년전에 <대청후궁지환군명주(大淸後宮之還君明珠)>라는 TV드라마가 있었다. 후징(胡靜), 황웨이더(黃維德), 훠쓰얜(霍思燕)이 주연을 했는데, 드라마 첫편에서 가경18년에 발생한 계유지변을 얘기한다.
화면에는 천리교(天理敎) 신자의 수가 아주 많아서, 시커멓다. 최소 천명은 넘을 것같다. 모두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비첨주벽(飛檐走壁)하며 가볍게 오문(午門)을 뚫고 들어가 대내고수(大內高手)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자막으로 가경황제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갔다고 적어놓았다. 이아거(二阿哥, 둘째황자) 민녕(旻寧)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으나, 측푸진(側福晋, 푸진은 부인이라는 뜻임)이 남장을 하고 추격병을 따돌려서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태가 평정된 후, 가경제는 심신이 피폐해져서 열하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이아거 민녕에게 후임황제로 등극하도록 유언을 남긴다. 그는 등극하여 도광제가 된다. 그는 측푸진을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사방에 공고를 붙여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드라마에는 이렇게 설명을 붙여 놓았다: "본 스토리는 순전히 허구입니다" 이 말은 아주 아주 필요했다. 왜냐하면 청나라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드라마가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천리교는 그렇게 사람이 많을 수 없다. 자금성은 북경의 가장 핵심장소이다. 정말 그렇게 많은 교도가 모인다면, 그것도 무기를 들고 공성거를 밀면서 나타나면, 일찌감치 구문을 지키는 청나라병사들에게 발견되었을 것이고, 그들이 금수교(金水橋, 자금성내의 다리)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진압되었을 것이다. 둘째, 가경제는 당시 아예 자금성에 없었다. 그는 막 목란추선(木蘭秋狝, 가을사냥)을 끝내고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니, 알리바이는 충분하다. 밤을 새워 피서산장으로 도망가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셋째, 이아거 민녕은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았고, 측부인의 보호를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용감하게 직접 조총을 들고 2명의 천리교도를 쏘아죽인다. 그리고 동생을 보내 황후를 보호하며 곁을 지키게 했다. 일찌기 가경제가 등극한 초기에 이미 유조를 남겨 자신이 죽은 후에는 민녕이 즉위하도록 정해놓았다. 이번 사건은 가경제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경제의 죽음은 계유지변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가경제는 가경25년에 사망했고, 계유지변은 가경18년에 발생했다. 중간에 7년이라는 간격이 있다. 사망전해에는 가경제가 즐겁게 환갑잔치를 했고, 고희연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심신이 피폐해져서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중국역사상, 반란군이 직접 황궁을 쳐들어오는 일은 극히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건 도발하는 의미가 강하고 황제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다. 가경제는 '한,당,송,명에 없던 일'이라고 말한다. 보라. 이전 왕조에 없었던 일이 청왕조에 발생했다. 나의 운이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라면서 그 자신이 할말이 없어졌다. 천리교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갈래이고, 원래 명칭은 영화회(榮華會)이다. 백성들은 왜 천리교를 믿었을까? 그들이 선양하는 교의는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부모(無生父母)"이다. '진공가향'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극락세계이다.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영화부귀를 누릴 수 있고, 착취와 압제가 없다. '무생부모'는 인간의 고난을 구원해주는 구원자이다. 힘들게 사는 대중을 이상세계로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비현실적이지만, 청나라조정의 압박으로 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백성들에게 아주 큰 흡인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하북, 하남, 산서등지에서 아주 성행했다.
교의를 실현하려면, 자연히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려야 했다. 반란, 의거는 모두 구족을 멸하게 되는 대역죄이다. 보통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그것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희,옹정,건륭의 세 황제를 거치면서 100여년동안 발전하여 중국인구는 3억명을 넘어섰다. 당시의 1무당 생산량, 경지면적, 유한한 양식을 고려하면 이렇게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와 천재지변, 관청의 착취, 통치계급의 사치등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가경이 즉위한 초기,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겨우 백련교의 난을 진압했다. 그러나 사회불안의 근원은 제거되지 못했다.
천리교의 우두머리는 임청(林淸), 이문성(李文成), 유국명(劉國明)등이었다. 그들은 가경18년 구월 십오일 의거를 일으키기로 상의한다. 왜 이 시기를 잡았을까? 당시 서북에 혜성이 출현했고, 그들의 별자리에 대한 논리에 따르면 이 때가 의거가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이는 황당무계한 것이다. 양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다만 임청은 이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미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고인들에게 억지로 현대인의 사고를 강요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보다 별로 나은 점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문성은 하남 활현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성공한 후 북상하여 호응하며, 임청은 북경성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안팎에서 호응하여 함께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리자고 상의한다.
그러나 천하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이문성이 무기를 만들다가 관청에 발각된다. 그리하여 부득이 시간을 앞당겨 의거를 일으키게 되었다. 비록 활현 현성은 점령했고, 지방관리는 죽였지만 청나라군대의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 임청은 이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계획대로 황궁을 쳐들어간 것이다. 이때 모두 200명이 출동된다. 동서 양대로 나누어 태감의 도움을 받아 동화문, 서화문으로 자금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200명은 동시에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쉽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에 장삿꾼으로 위장하고, 여러 조로 나누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북경성에 들어간다. 채시구(菜市口), 주시구(珠市口)등지에서 회합하고 다시 계획한 장소로 향한다.
구월 십오일, 오시가 지나면서, 양갈래의 천리교도는 각자 상응하는 성문으로 향한다. 동화문쪽은 아주 순조롭지 못했다. 수비군들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성문을 걸어잠근다. 그래서 소수의 천리교도들만이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아거 민녕의 조총에 살해당한다. 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고, 천리교도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융종문(隆宗門)을 불태우고자 했으나 뒤이어 지원온 관병에게 일망타진당한다. 이틀 후, 조정은 임청을 체포했고, 그의 이번 행동은 철저히 실패로 끝난다.
이 소식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간다. 군신들이 모두 깜짝 놀란다. 많은 관료들은 황제에게 잠시 멈추었다가 사태가 확실해진 후에 북경성으로 들어가자고 권한다. 동고(董誥)는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황제에게 신속히 자금성으로 되돌아가야한다고 권한다. 경사에 남아 지키고 있던 조진용(曹振墉)은 사변소식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른다. 반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후에 겨우 평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빗대어 이런 대련을 남긴다: "용용록록조승상(庸庸碌碌曹丞相), 곡곡제제동태사(哭哭啼啼董太師)" 두 사람은 이 대련을 보고는 마주보고 웃었다. 이런 때의 '용록'과 '곡제'는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경제도 깜짝 놀랐다. 그가 최초로 내린 명령은 이아거 민녕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가 "담량과 견식이 있고" "충과 효를 겸비하여" "짐이 눈물을 흘리면서 살펴보았는데, 기쁘기 그지없고 글로서 다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아거를 지친왕(智親王)에 봉하고, 급여를 배로 늘여준다. 그리고 그에게 특별히 성문밖으로 나와 감사인사를 할 필요는 없고 그저 황제가 자금성으로 들어갈 때 동화문에서 무릎꿇고 감사인사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다른 유공자드에 대하여도 가경제는 하나하나 상을 내린다. 그의 조카인 면지(綿志)도 천리교도 1명을 때려죽였다. 그리셔 군왕(郡王)의 작위를 내리고, 매년 1천냥백은을 추가로 지급하게 한다. 장친왕(莊親王) 면과(綿課)는 직접 무기를 들고 천리교도를 체포하고, 1명을 사살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내렸던 이전의 처분을 모조리 취소하고, 종인부로 보내어 상을 받게 했다. 건예영, 화기영의 관병은 궁으로 지원을 와서 용맹하게 대응했다. 1인당 1달치의 급여를 추가로 지급했다. 황제는 사망한 관병은 상등, 중상을 입은 관병은 2등, 경상을 입은 관병은 3등으로 구분하여 각각 상을 내린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관병, 사병에 대하여는 가경제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보군통령 길륜(吉綸), 좌익총병 옥린(玉麟)은 이번 사변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업무태도, 업무능력에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이어서 모두 면직시킨다. 자금성의 숙직인 보군통령 양주증(楊澍曾)도 면직당하고, 신강 이리로 유배를 보내어 속죄하게 한다. 동화문, 서화문의 관병도 업무에 해태하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천리교도가 궁중으로 진입하게 했으므로, 실로 잘못이 크다. 이미 사망한 자들은 책임추궁을 하지 않되, 부상입은 자들은 공과를 상계하는 것으로 하고, 부상을 입지 않은 자들은 모조리 형부로 보내어 처벌을 한다. 포로로 잡힌 교도들에 대하여는 모두 직예 고안현, 황장 일대의 사람들이어서, 이들 지방이 순천부에 예속되고 직예가 관할하므로 추병태(鄒炳泰), 이균(李鈞) 두 사람은 순천부윤을 맡으면서도 천리교의 계획을 제때 알아내지 못했으니 지휘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하여 강등처분을 내린다. 직예총독 온존혜(溫存惠)는 형부로 보내어 엄치 책임을 추궁하게 한다. 이들 관료들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관료생애가 이들 때문에 끝장날 줄은. 황제에게 치욕을 맛보게 했으니, 황제는 당연히 이들을 가볍게 봐주지 않을 터였다.
계유지변이 가경제에게 준 충격은 아주 컸다. 십월에 그의 생일이 있는데, 자금성에서 변란이 발생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축하행사를 축소시켰다. 그는 황자, 대신들을 건청문으로 불러 한바탕 욕을 했다: "이는 실로 유례없는 변고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짐의 덕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지금 황자로 하여금 직접 무기를 들고 황궁으로 들어온 적을 막게 했으니, 여러 신하들은 무슨 면목으로 서 있는가" 그는 문무관리들이 평소에는 놀고 즐기다가 일이 닥치면 어쩔 줄을 모르고 아무런 방법도 없다. 일이 지나간 후에도 시위소찬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왕공대신들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전심전력을 다하고, 그저 나태하게 놀기만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황제가 위에서 신하들을 비판하면 신하들은 그저 무릎꿇고 공손하게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건청궁을 나서면 그냥 하던대로 한다. 천하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경제는 심지어 죄기조(罪己詔)까지 반포하여 자신의 고충을 쏟아내야 했다.
"우리 대청국은 170년이래 연경을 수도로 정하고, 여러 조상들의 깊은 덕으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성덕과 인심은 하나하나 열거할 수조차 없다. 짐은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백성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이런 변을 당하니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덕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책망할 뿐이다. 그러나 변은 일시에 일어났지만 그 화근은 오래 쌓여온 것이다. 인순태완(因循怠玩)의 네글자는 실로 중국이나 외국이나 같은 것이다. 짐이 비록 재삼 입술이 마르도록 얘기했지만, 여러 신하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정무에 소홀히 하여 당송명에도 없었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명나라때의 정격안과 비교해도 배나 심하다. 이를 생각하면 실로 차마 더 할 말이 없다. 그저 반성하고 몸을 가다듬고 마음을 고치고 위로는 하늘의 인자함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어야 한다. 여러 신하들이 대청국의 충신양신이라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서 짐을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어 달라. 만일 스스로 비비(卑鄙)하다고 여긴다면 관직을 내놓으라. 절대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짐의 죄를 더하지는 말아달라. 눈물을 흘리면서 붓을 들어 썼으니 알아주기 바란다."
가경제는 원인을 "인순태완"의 네 글자로 돌렸다. 모두 관리들이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자금성을 공격하는 자들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통치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조상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등극한 후에도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화근은 대신들 때문이다. 비록 황제가 평소에 그들을 교육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역대왕조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죄기조는 아주 천박하다. 모든 책임을 대신들에게 떠밀어버리는 내용이다.
임청과 길안내한 태감은 가경제가 모조리 능치처참한다. 속된 말로 천도만과에 처한 것이다. 하남 활현의 천리교도도 금방 관군에게 소탕된다. 반란을 실패했지만, 청나라통치자들도 등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하층민중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