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외역(馬嵬驛)의 수수께끼: 진현례(陳玄禮)는 당현종의 사람인가, 태자 이형(李亨)의 사람인가?
글: 화운초(和運超)
고선지(高仙芝), 봉상청(封常淸) 두 명장이 사리분별못하고 충동적인 당현종 이융기(李隆基)에 의해 사사된 후, 유일하게 황제가 떠올린 노장은 이전에 하서(河西)와 농우(隴右)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바 있는 가서한(哥舒翰)이었다. 그러나, 우선 나이가 아주 많고, 다음으로 병을 앓고 있어서 사서에는 특별히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가서한이 출정할 때 병세가 다시 위중해져서 업무를 처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심복인 왕사례(王思禮)는 일처리가 너무 과격해서 업무를 또 다른 신임하는 부하인 전량구(田良丘)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했다. 전량구는 명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독단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했다. 부하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 왕사례로 하여금 기병(騎兵)을 맡게 하고, 이승광(李承光)으로 하여금 보병을 맡게 했다. 그런데, 왕사례와 이승광은 자주 다툼을 벌였고, 잘 협력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군내에서 명령체계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가서한의 신체상황에 의문점이 있다고 한다. 임사영(任士英)은 <당숙종평전(唐肅宗評傳)>에서 사서의 가서한의 병세에 관한 묘사에 헛점이 있다고 의심했다. 가서한이 중풍에 걸린 것은 사실이다. 반년의 휴양을 거쳐 상당히 회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그의 지휘행동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임명전에, 당현종은 가서한을 만났고, 어떻게 안록산(安祿山)을 평정할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까지 했다. 만일 가서한의 신체상황이 아주 나빴다면, 황제가 아무리 멍청해도 병이 위중한 가서한에게 억지로 총사령관의 직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장병의 사활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허투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서한이 군대에서 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은 것같지도 않고, 병이 위중한 모습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특히 안록산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하였는데, 가서한은 원래 아주 냉정했다. 황제에게 이렇게 글을 올린다: "안록산은 오랫동안 군내에 있어, 병법에 정통하고, 준비를 해서 온 것이다. 속전속결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 반란군은 정예병사는 숨겨두고, 노약자나 환자 장애자로 아군을 유인하는데 이는 분명히 속임수이다. 만일 아군이 가볍게 출격하면, 반드시 반군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때가 되어 후회해도 이미 늦는다." 당현종은 분노로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서한의 진언을 듣지 않고 오히려 엄히 질책한다. 하루빨리 출병하여 안록산을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천보15년(756년) 육월, 가서한은 대군을 정돈하여 관을 나가 영보(靈寶)에 주둔시켰고, 결과적으로 참패당한다. 이 전투는 당나라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다. 당현종과 당숙종 부자의 운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여긴다. 가서한이 왜 일패도지하였는지, 만일 사서에 쓰여 있는 표면적인 문자에 현혹된다면 분명히 너무 황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오로지 역사의 맥락을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고선지와 봉상청이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때 관군은 궤멸되어 제대로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다. 도처에서 사람을 붙잡아와서 군인으로 삼았다. 십여만, 이십만의 병력은 많이 과장된 것이고, 정예병사는 그저 왕사례 수하의 5만기병뿐이다. 방충(龐忠)등의 십만보병은 절대다수가 끌려와서 수만 채우는 병사들이다. 두보가 천계후기부터 지덕연간까지 피눈물로 쓴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런 당나라의 관군은 무슨 전투력이랄 것이 없었다. 그저 백성을 끌어들여 함께 전쟁터의 화살받이가 되었던 것같다.
사서에 기록된 안록산의 인생궤적을 보면, 그 개인의 군사능력이나 전략기획은 그다지 강해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용맹이 넘칠 뿐이다. 가끔 교활한 술책을 보여주기는 한다. 관군은 여러 해동안 나태해져 있고, 변방군은 여러 해동안 이족들과 싸워오다보니 그 차이가 비교적 컸다. 안록산 수하의 최건우(崔乾祐)의 정예기병이 당군의 배후에서 쳐들어와 앞뒤에서 협공하니 당군은 혼란에 빠져 궤멸되어 흩어진다. 황하에 빠져 죽은 사람이 수만명이다. 가서한은 동관(潼關)으로 물러나 지키고자 했으나, 부하인 화발귀인(火拔歸仁, 돌궐 화발부 출신으로 안록산과 함께 장안으로 진격한 맹장 이귀인과는 다른 사람이다)이 붙잡히히고, 화발귀인은 그를 안록산에게 바친다. 안록산은 낙양에서 가서한을 보고는 득의양양한다: "너는 과거에 나를 무시했었지. 지금은 어떠냐?"
가서한은 이때 이미 나이들고 몸이 좋지 못했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었다. 땅바닥에 엎드려 사죄한다: "눈을 가지고도 폐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하는 난리를 평정할 군주이시고 하늘의 명을 받으셨습니다. 이광필(李光弼)은 토문(土門)에 있고, 내전(來瑱)은 하남(河南)에 있으며, 노경(魯炅)은 남양(南陽)에 있습니다. 제가 폐하를 위하여 그들이 투항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조치하면 세 곳의 당군을 평정하실 수 있습니다." 안록산은 가서한이 서북군의 총사령관이며, 연군을 포위한 것이 기본적으로 모두 서북군의 장병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서한을 사공(司空)에 임명하고 사람을 보내 화발귀인을 참수시킨다. 이렇게 가서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광필같은 경우는 하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숙종 이형으로부터 엄명을 받아 계획을 변경하여 안록산을 막기 위해 관중으로 진격했다. 몇몇 서북군의 대장들은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받은 후 모두 가서한이 일대명장, 중신의 존엄한 체면을 잃었다고 욕한다. 또한 이광필, 내전은 모두 서북군출신이지만, 어쨌든 가서한과는 인연이 깊지 않고, 직접 가서한의 지시를 듣는 관계는 아니었다. 안록산은 이에 크게 실망하여 가서한을 별원에 구금시킨다. 안경서(安慶緖)가 황위를 빼앗고 낙양을 떠날 때 가서한의 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린다.
가서한의 패배는 장안의 국면을 완전히 혼란으로 빠트려버린다. 양국충(楊國忠)은 안록산이 정말 장안성으로 쳐들어와 그에게 복수할까봐 겁났다. 그리하여 당현종에게 파촉(巴蜀)으로 도망갈 것을 종용한다. 그리하여 유혈이 낭자한 마외역의 사건과 부자가 서로 갈라져서 각자 갈길을 가는 일막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양국충과 안록산의 갈등은 이임보(李林甫)가 있을 때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둘은 모두 이임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안록산과 이임보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양국충은 자신의 승진을 위해 암중으로 안록산과 힘겨루기를 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태자 이형을 탄압하는 주력이 된다. 그리하여 무형중에 이형의 반대편에 선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사서에는 이임보가 죽기 얼마 전에, 왕홍(王鉷, 조부는 명장 王方翼이고, 당고종에게 폐위된 왕황후의 당형(堂兄)이다)의 발탁문제를 놓고, 양국충과 이임보는 이미 이견을 드러내ㅐㅆ다고 한다. 왕홍은 천보 연간에 호부랑중으로 화시화적사(和市和籴使), 호구색역사(戶口色役使)에서 경기채방사(京畿採訪使)로 승진했다. 장안과 주변지구에서 대량의 재물을 긁어모아 내고에 넣고 황제와 양귀비가 쓰도록 했다. 그 직위 자체는 높지 않았으나, 황제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이임보조차도 왕홍을 끌어들이려고 해서 혼자서 20여개 직무를 가지고 겸하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홍의 두 형제는 불궤(不軌)의 혐의가 있었는데, 양국충은 이임보가 왕홍을 발탁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한다. 이임보가 죽은 천보11년(752년) 왕홍은 형제의 일로 사사당한다. 양국충은 우상(右相)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가 바로는 당현종시대 마지막 3년이다.
이때, 당초 양국충에게 은혜가 있던 선우중통(鮮于仲通)은 남조(南詔)에서 패배하고, 고선지는 서북에서 패배하여, 대당성세의 몰락추세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다음 해에는 관중에서 기근이 일어난다. 양국충은 나이많아 총기가 흩어진 황제를 속여, 좋은 보리와 쌀만 황제에게 보여주면서 재해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고 말한다. 양국충이 재상에 올라 황제에게 아부하는 바람에 안록산은 재상에 오르는데 실패한다. 게다가 양국충은 가서한을 발탁하여 안록산을 억누르려 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안록산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갈등은 아주 첨예하게 되었다.
그 중간에 유일하게 의외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일은 원래 양국충은 이임보를 따라 태자 이형을 탄압하던 핵심분자였는데, 안록산문제에서는 두 사람이 완전히 일치한 입장을 나타냈다. 이형도 여러번 나서서 안록산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의견에 따르면 이건 태자 이형이 고의로 불에 기름을 부으면서 반란사건이 터지도록 도발해서, 자신이 황제에 오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형은 명철보신을 잘 아는 인물이고, 조야의 안팎에서는 이미 안록산을 벼랑끝까지 몰아넣고 있었고, 태자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도 사람들이 주목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득이 안록산문제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했던 것이다.
천보14년, 가서한이 돌연 병석에 눕는다. 양국충이 가장 믿던 군사분야의 지지자가 더 이상 안록산을 견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고선지, 봉상청, 가서한이 연패하면서 서북군의 주력은 거의 상실된다. 양국충, 양귀비는 모두 파촉에서 왔다. 자연히 황제에게 파촉으로 도망가자고 부추기게 된다. 태자 이형, 황손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 건녕왕(建寧王) 이담(李倓)등 종실과 나중에 아주 미묘한 한 인물 영왕(永王) 이린(李璘)과 다른 여러 왕들이 도망가는 도중에 저명한 마외역의 변이 발생한다. 태자 이형은 이 관건적인 사건이 발생한 후 북상하여 영무로 가고, 당현종 이융기와 갈라지게 된다. 사건이 돌연 발생했고, 사건발생은 미묘해서, 마치 그가 정말 황위에 오르기 위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국충, 양귀비를 주살하고 황제와 갈라져서 행동하는 것은 원래 준비된 하나의 계획인가 아니면 각각의 두 가지 사건이 교묘히 합쳐진 것인가? 도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원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태자 이형이 금군장령 진현례를 회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후 이형은 당현종을 떠나 영무로 북상하고, 그해 칠월 황급히 황위에 등극하여 천하게 포고를 내린다. 그는 이 변고의 최대수혜자이다. 당연히 가장 큰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같지 않다.
이형은 이미 태자로 근 20년간 있었다. 어느 정도의 명망과 지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자로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서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 왜곡되었을 수 있다. 이형이 마외역에서 당현종과 헤어졌다는 것은 그가 어느 정도 당현종 및 다른 종실과 선을 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부친을 따라 성도로 가면 미래가 어떨 것인가. 그는 전혀 희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주 분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잠재의식은 있었을 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은 이형이 이보국(李輔國)으로 하여금 진현례를 회유하여 함께 양국충에 대항하도록 했다고 본다. 이는 기본적으로 추측이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에 사람들이 소급해서 되돌아보면서 추측한 것이고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으며 확실한 증거는 없다. 직권예속으로 보자면, 태자 이형이 장악한 비룡군(飛龍軍)은 금군의 후군으로 실제 인마는 2천명가량에 불과했다. 진현례가 지휘하는 용무군(龍武軍)은 황제와 황친귀족을 호송하는 전군으로 인마는 개략 3천여명이다. 전군, 후군은 명목상 모두 이형의 지휘하에 있지만, 그것은 황제를 보위하는 태자의 본분때문이다. 이는 당년 이영(李瑛)이 황궁에 도적이 들어왔다는 소시을 듣고 책임지고 조사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태자의 직책때문이다. 실제로 전군, 후군과 직접적인 예속관계는 없다.
이보국은 여러 해동안 당숙종과 밀접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실제로 이보국은 계속 태자 이형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궁정금군의 잡역이었다. 일설에는 용무군이라 하고, 또 다른 설에는 비룡군이라고 한다. 금군의 말을 기르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이정충(李靜忠)이라는 이름이었다. 개원연간 고력사(高力士)가 궁금호위사무를 책임지며 감문위장군이 되고, 나중에 표기대장군의 직위를 얻는다. 바꾸어 말하면 환관이 군직출신인 것은 당나라에서 아주 보편적인 경우이다. 바로 고력사가 이보국을 발굴했고, 나중에 동궁에 추천한다. 이때 이보국은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금군출신이라는 배경은, 자연히 이형이 이보국에게 지시하여 진현례를 끌어들이도록 했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신구당서는 진현례를 기록할 때, "양국충을 주살하고자 모의했다"는 문구가 있다. 당연히 사서의 본전에는 공로를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일 이형의 당시 '생사결단'이 입장에서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마외역의 변은 <신당서>에서 백성들이 속속 황제의 행차를 둘러싸고 이 화를 불러온 흉수인 양국충일가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태자 이형은 뒤에서 따랐고 비룡군 2천여명이 있었다. 금군을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다만 양국충은 현종을 따라 앞에서 가고 있었고, 진현례의 용무군이 직접 호위했다.
양국충은 당현종을 파촉으로 가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파촉의 땅은 비교적 안정되고 부유하다. 그러나 촉에 한번 들어가면 다시 중원을 수복하고 장안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금군상하는 <안록산사적>의 기록대로라면 장소경(張小敬)이 가장 과감했다고 한다. 난리를 틈타 양국충 일가를 죽여버리고, 황제를 핍박하여 양귀비를 죽이게 만든다. 주모자인 진현례는 중요한 순간에 당현종에 충성심을 나타내고, 촉까지 계속 따른다. 태자 이형을 따라 북상하지 않았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태도의 문제이다.
진현례는 장안북군의 만기영(萬騎營) 장수이다. <신당서>에는 천기영(千騎營)이라고 적혀있다. 주로 시기에 따라 칭호가 바뀌었을 것이다. 이연이 당나라를 건립한 초기에는 백기(百騎)라고 불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종실자제와 일부 공신자제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금군장수의 주요 공급처이다. 만기영의 배경을 이해해야만 이융기와 태평공주가 왜 만기영을 회유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왜 진현례 및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이 이렇게 양국충과 양귀비에 반감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다. 특히 진현례는 당현종의 여러 해동안 심복이었다. 설사 양국충의 건에서 이형과 협력했다고 하더라도, 그뿐이다. 이형은 진현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대사'를 도모할 망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형은 갈라지고자 한다. 객관적인 처지와 상식으로 판단하면, 여기에 추가하여 황제 신변의 금군대장까지 데려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타초경사하는 거이 되고 갈라져서 떠나는 것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진현례가 당시에 이미 태자의 편이었다면, 다음을 해석하기 어려워진다: 첫째, 금군의 우두머리로서 진현례는 북상하여 신황제를 옹립하지 않았다. 이는 확실히 상식에 어긋나는 거동이다. 조정의 금군장수를 통제하고 중시하지 않았는데, 그때 황제에 오르겠다고 생각했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누가 알았으랴. 영무로 북상한 후 이형의 주변에 군사역량은 얼마 없었고, 이는 완전한 모험이었다. 성패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러 해동안 금군대장으로 있던 진현례가 만일 이형을 따라 영무로 간다면 주변에 겨우 수천명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형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둘째, 만일 진현례가 잠시 당현종 이융기를 호송하며 감시하는 것이었다면 역시 불가사의한 일이 있다. 지덕2년(758년) 태상황이 장안으로 돌아온 다음에 연금과 비슷한 상태에 처한다. 진현례는 그렇다면 사명을 완성한 것이므로 이형이 진현례를 어떻게 대우해줘야겠는가? 표창을 하거나 발탁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채국공(蔡國公)이라는 허울뿐인 작위를 주고 은퇴시킨다.
당시 안사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었던가? 장안은 정말 태평하고, 이형의 자리는 안정되었던가? 그런데 그가 진현례를 황급히 군에서 퇴역시킨 것은 그의 편이었다면 상리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며 진상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진현례는 이형이 회유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확실히 당현종에 충성한 사람이다. 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현례가 마외역에서 한 행동은 '대세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한때 당현종을 핍박했지만, 그는 황제에 충성을 표시하고 성도에서도 계속 황제를 호위했다. 경사까지 평안하게 되돌아올 때까지. 그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은퇴한다. 마음씀씀이가 예민한 이형은 진현례, 고력사처럼 당현종에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은 매우 경계했다. 그리하여 한명 한명 당현종의 곁을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중용하지도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사서의 기술에 부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