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앙군사위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의 부정부패는 얼마나 심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2014년 3월 15일, 전 중공정치국위원, 중앙군사위부주석 쉬차이허우가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쉬차이허우는 백년중공역사상 수사받은 최고위급 장군중 하나이다.
쉬차이허우는 베이징301병원의 병상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 당적이 박탈되고, 7월 30일 군적이 박탈되었으며, 상장(上將)계급도 박탈당한다. 10월 27일, 군사법원에 기소되고, 2015년 3월 15일, 재판전에 방광암으로 사망한다.
쉬차이허우 궈보슝(郭伯雄)은 전 중공독재자 장쩌민(江澤民)이 발탁하여 중용한 두 명의 군사위 부주석이다. 장쩌민이 명목상 중앙군사위주석에서 물러난 후, 장쩌민을 대리하여 '총잡이'를 장악관리한 두 명이 심복이다. 그들은 장쩌민의 조종하에 중앙군사위주석 후진타오(胡錦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군사위의 대권을 좌지우지했으며, 장쩌민, 쉬차이허우, 궈보슝의 '철삼각'을 구성해서 군대내에서 무법무천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
시진핑(習近平)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앙군사위 주석에 오른 후, 쉬차이허우는 시진핑을 전혀 눈아래 두지 않았다. 홍콩의 <명보>가 2015년 3월 14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한번은 다수가 참가한 군대의 반공개회의에서 당시 군사위 부주석을 맡고 있던 쉬차이허우는 또 다른 군사위주석 궈보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시진핑을 가리킴)에게 5년하라고 하고나서 쫓아내지 뭐!"
쉬차이허우는 도대체 얼마나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을까? 군사검찰원의 기소장을 보면, 쉬차이허우는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승진에 도움을 주면서 직접 혹은 가족을 통해 뇌물을 수수했는데, 금액이 특별히 컸다. 직무영향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이익을 챙기게 해주었고, 그와 가족들은 그 다른 사람에게 뇌물을 받는데 그 금액도 특별히 컸다.
쉬차이허우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는가. 중국당국은 구체적인 숫자를 내놓지는 않았다. 아마도 일단 진실된 숫자를 공표하게 되면,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 1억위안은 훨씬 넘어설 것이다.
쉬차이허우의 매관매직
2015년 3월, 중국의 소장 양춘창(楊春長)은 봉황위성TV와의 기자인터뷰때 이런 말을 한다: "쉬차이허우등의 사건이 터진 후,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권력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한 대군구사령관은 그에게 1천만을 보냈다. 또 다른 사령관은 2천만을 보냈다. 그랬더니 그가 1천만은 필요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물었다: "그럼 이 군대가 그들 집안의 것이나 같지 않은가?" 양춘창은 말한다: "바로 그렇다. 그들 집안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당시 군사위주석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중국당국의 관방통보에 따르면, 쉬차이허우의 첫번째 죄상은 매관매직이다. 쉬차이허우가 중앙군사위 총정치부주임, 중앙서기처서기, 중공정치국위원, 중앙군사위부주석을 지내는 10년동안, 수백만군대와 무경부대의 고위장군의 인사임면 및 배치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쉬차이허우가 체포된 후, 한 '군대관련 원로매체인'이라고 자칭하는 인물은 이렇게 글을 썼다: "쉬차이허우는 군사위부주석의 신분으로 군대를 종파산두주의의 '서가장(徐家莊)'으로 만들었다. 한 무리의 욕심이 많고, 사치스러우며, 바람부는대로 키를 잡고, 아부를 잘하고, 기회를 노리는 악인들을 배양했다. 그들이 전군의 각 부서에 배치되면서 발언권, 승진권을 가졌다. 당위는 그들이 이익을 획득하는 기구로 전락했고, 계속하여 극작가도 써내기 어려울 정치적으로 추악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2016년 7월 6일, 국방대학 이론학습좌담회에서 중국의 상장 류야저우(劉亞洲)는 이런 말을 했다: "쉬차이허우는 임종때 두 마디 말을 했다. 이는 사건담당인원에게서 들은 것이어서 아주 정확하다. 첫번째는 '궈보슝의 문제가 나보다 심각하다' 두번째 말은 '대구(大區) 정직(正職)의 장군들 중에서 나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단 두명이다.'"
쉬차이허우의 돈과 재물
2014년 제32기 <봉황주간>보도에 따르면, 2014년 3월 15일 저녁, 군사검찰원의 수사관이 베이징 푸청로에 있는 쉬차이허우의 호화주택중 하나를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결과 경험이 많던 사건담당관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다. "원래 사회에서 쉬차이허우가 부정부패에 심하게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구쥔산(谷俊山)사건이 발생한 후 지금까지 이년여가 지났다. 쉬차이허우가 부정부패를 했더라도, 재물은 일찌감치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여겨서, 집안에는 무슨 돈이나 재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쉬차이허우의 이 2000여평방미터규모의 호화주택의 지하실을 연 후, 사건담당자들은 깜짝 놀란다. 도처에 현금이 쌓여 있는데, 달러, 유로, 인민페가 골고루 있었다. 사건담당자들이 일일이 셀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저울로 무게를 재었고, 다시 봉조(封條)를 붙였다. 압수수색된 현금은 무게가 1톤이나 나갔다. 어떤 것은 봉투에 들어 있는데 열지도 않았다. 각종 금은보석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100여킬로그램, 200여킬로그램의 허텐옥(和田玉), 각종 귀한 경복(硬木)과 진귀한 비취제품도 한 무더기였다. 가득 쌓여 있는 허텐옥은 대부분 원래 그대로였고, 어떤 것은 옥석의 외피만 한겹 벗겨서 안의 색깔정도가 노출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당, 송, 원, 명의 골동품과 서화도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호화주택 한 곳에서 압수수색한 현금과 재물만 산더미처럼 쌓였다. 사건담당자들은 할 수 없이 십여대의 트럭을 불러서 모조리 운반해야 했다.
쉬차이허우의 군사위건물지하에도 비밀보관실이 있었다. 그 안에도 현금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의 비서와 1명이 여군이 관리했다. 쉬차이허우는 이 여군과 관계를 가진 후에 그녀가 '대학을 다니고, 승진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끝까지 약속을 지키진 못했다. 쉬차이허우가 은퇴한 후, 이 여군은 절망했다. 하루는 산둥의 고향에서 멘빠오차(빵차)를 한대 끌고와서 보관실에 있던 현금을 차 안에 가득 넣고 실종되어 버린다. 쉬차이허우는 그 보고를 받고도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감히 그녀를 추적하거나 조사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
2014년 3월 6일, <법광>은 이렇게 보도한다. 중국당국은 쉬차이허우사건에 관련된 내용을 당내의 어느 정도 직급이상의 사람들에게 통보했다. 이 통보에 따르면, 쉬차이허우와 가족이 구쥔산에게 받은 현금이 약 4천만위안이라고 했다.
2014년 3월 20일, <빈과일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22세의 여자 자오단나(趙丹娜)는 홍콩의 여러 은행에 8개의 계좌를 열어 쉬차이허우의 가족이 100억홍콩달러를 돈세탁하는 것을 도와주다가 ,홍콩당국에 조사를 받는다. 2014년초, 자오단나는 쉬차이허우의 딸이 도와주어 3천만홍콩달러의 보석금을 포기하고 도주해버린다.
쉬차이허우의 호화주택
<봉황주간>에서 언급한 쉬차이허우의 베이징 푸청로의 호화주택은 "조어대6호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는 12동의 호화주택중에서 가장 큰 단독빌라였다. "조어대6호원"과 그 서쪽에 있는 "조어대1호원"은 모두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의 부부장 구쥔산이 책임지고 개발한 호화부동산프로젝트이다. "조어대1호원"의 호와주택은 평방미터당 35만위안에 팔렸다. 쉬차이허우의 이 집은 도대체 얼마나 할까?
<봉황주간>의 보도에 따르면, 쉬차이허우가 조사를 받기 전에, 외부에서는 쉬차이허우가 상하이에 4채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쉬차이허우는 거짓말이라고 하고, 누군가 모함하는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군대의 고위직에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보내서 조사해보라고 요구한다.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군사위 기율검사위에서 다시 조사확인후, 그 부동산은 확실히 쉬차이허우의 명의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부동산의 소유자는 쉬차이허우의 아직 어린 외손자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쉬차이허우의 처인 자오리(趙黎)은 이번 수뢰사건의 실제주인공이다. 뇌물을 제공한 사람에 따르면 자오리를 찾아가서 뜻을 얘기했더니, 자오리는 그냥 상하이의 보통부동산인줄 알고 거절한다. 그러나, 상대가 그녀를 상하이로 데려가서 한번 실물을 보여주었는데, 4채가 하나로 연결된 사단장급 장군에게 분배되는 주택이었고, 인테이러도 호화스러웠고, 위치도 좋았다. 자오리는 이를 살펴본 후 기꺼이 받았다. 나중에 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4채의 부동산은 구쥔산의 남동생이 쉬차이허우에게 바친 것이었다고 한다.
쉬차이허우는 쓰촨 청두에도 호화별장이 있다. 실제로 받은 인물은 역시 자오리이다. 자오리는 청두로 가서 이 빌라를 본 후에 작다고 싫어한다. 상대방은 그리하여 대거 확장공사를 하고, 점유면적도 수무(畝)로 늘인다. 자오리는 그제서야 받아주었다.
쉬차이허우의 음란
중국상장 류야저우는 군대 총후근부 부부장 구쥔산이 쉬차이허우에게 미녀를 바친 에피소드도 얘기했다: "그는 쉬차이허우에게 여가수를 바치고, 여배우를 바치고, 여자웨이트리스도 바쳤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딸까지도 쉬차이허우에게 바친다. 더욱 내가 감탄한 점은 쉬차이허우와 그의 딸이 안에서 성관계를 가질 때 구쥔산은 밖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2015년 6월, 해방군TV선전센터의 일부 사람들이 시진핑의 공개서신을 발표했는데, 그 센터의 <군사보도>의 아나운서인 펑린(馮琳), 예명 하이린(海琳)이 쉬차이허우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쉬차이후은 센터의 주임으로 하여금 펑린이 특별프로그램부의 부주임을 맡도록 지시했으며, 그녀로 하여금 전국정협위원이 되도록 어레인지했다. 쉬차이허우가 낙마한 후, 펑린은 기율검사무서에서 여러번 조사를 받았고, <군사보도>의 아나운서자격도 잃는다. 할 수 없이 전직해야만 했다.
홍콩의 <동향>잡지가 2016년 7월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중공내부의 사람이 토로했는데, 쉬차이허우는 방광암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중공내부에서 공표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11월에서 2012년 9월까지 쉬차이허우는 직권을 이용하여 위법하게 80여명의 여성을 국방, 군사부문에 취직시킨다. 그중 적지 않은 여성은 쉬차이허우와 부정당한 남녀관계가 있었다.
2012년 12월에서 2013년 5월까지, 쉬차이허우는 15명의 예전에 관계를 가지며 약속했던 여성들에게 2억2천여만위안의 현금과 부동산을 제공한다.
결론
쉬차이허우가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탐하며 대거 매관매직을 벌인 것은 그의 뒷배경이자 그를 발탁중용한 사람이 장쩌민이기 때문이고, 장쩌민이야말로 당정군 최고위층의 부정부패의 최대 뒷배경이다.
당시 중앙군사위부주석으로 있던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은 전체 군대를 부패시켰다. 2013년 시진핑이 반부타호를 시작했을 때 조사처벌받은 장군이 160여명에 달하여, 1927년 건군이래 내전외전문혁때 낙마한 장군의 총합계를 넘어섰다.
중국상장 류야저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십년간 우리는 모두 군대에 있었다. 군대가 어떻게 되었는가? 군대가 큰 슈퍼마켓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상대한 것은 전쟁터가 아니라, 우리가 상대한 것은 시장이었다. 심지어 시장도 아니었다. 우리가 상대한 것은 그저 매장이었다. 뭐든지 가격을 붙여 팔았다. 뭐든지 가격을 붙였다. 그들이 장악하면서 군대는 엉망진창의 진흙탕이 되었다. 이런 진흙탕은 적군이 들어와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쉬차이허우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2015년 1월 16일, 당시 난징군구사령관을 맡고 있던 차이잉팅(蔡英挺)은 한 보고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쉬차이허우가 한 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경보(慶父), 백비(伯嚭), 조고(趙高), 동탁(董卓), 이임보(李林甫), 채경(蔡京), 진회(秦檜), 엄숭(嚴嵩), 위충현(魏忠賢), 화신(和珅)등 '10대간신'과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있다. 즉 "간(奸)"으로 덕이나 인품은 없으며, 대간사충(大奸似忠)하다는 것이고, "탐(貪)"으로 탐욕에 끝이 없고, 재물을 탐하면서 법을 마음대로 어겼다; "패(覇)"로 무법무천에 전횡패도했다. "가(假)"로 말과 행동이 달랐으며, '양면인'이었다. "사(私)"로 일당을 모아서 사리를 꾀하고, 소집단을 만드었다. 이러한 평가가 전혀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