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선종(唐宣宗) 이침(李忱): 당나라 멸망의 최대 책임자일까?

중은우시 2021. 9. 25. 01:07

글: 화운초(和運超)

 

당선종 이침이 즉위한 후,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사람들을 회유하여, 이덕유(李德裕)에게 악의적인 보복을 진행하며, 그가 했던 것은 모조리 반배하며 회창(會昌)연간의 인원을 축소정비하는 책략을 바꾸어 버린다.

 

대중원년(847년) 하반기, 이부(吏部)에서 "회창4년에 주현 관내에서 감원했던 383명을 다시 증원했다"고 보고한다. 문학가인 마식(馬植)은 과거에 이덕유에게 중용되지 못했는데, 당선종은 그를 형부시랑으로 삼고, 염철전운사를 맡긴다. 취원식(崔元式), 위종(韋琮)등 신진관리도 대부분 이덕유가 있을 때는 중시되지 않던 자들이다.

 

위모(魏謨, 위징의 오대손, 대중후기에 서천절도사가 된다)같은 인물이 중용된다. 그는 일찌기 양여사(楊汝士), 이종민(李宗閔), 우승유(牛僧孺)등과 관계가 밀접했으니, 당선종은 자연스럽게 그를 기용한 것이다. 위모는 조상인 위징과 마찬가지로 간언하기를 좋아했다. 이침은 항상 이렇게 탄식한다: "위모는 조상(위징을 가리킴)의 풍모를 가졌다. 짐은 그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당연히, 당선종은 당말에 그런대로 괜찮은 황제라 할 수 있다. 항상 관용적이고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고, 엄격하고 가혹할 때도 있었다. 청나라때의 왕부지(王夫之)는 그가 "신한지술(申韓之術, 신불해, 한비자의 방식)"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대신들이 서로 결당하는 것에 아주 민감했고, 엄히 숙청했다. 그가 우파(牛派, 우승유)를 기용하여 이파(이덕유)를 타도해야 했던 것처럼 대신들 사이에서 파벌을 없애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대중초기의 재상 마식은 내시가 허리띠를 보내는 것을 당선종이 보게 되면서, 내시와 결탁하는 그의 금기를 범한 것으로 인식되어 바로 재상에서 파면당했다. 이재에 뛰어났던 소업(蕭鄴)은 이미 재상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를 재상으로 삼겠다는 조서가 이미 학사원 문앞까지 가 있었다. 그때 추밀사가 공연히 한 마디 한다: 소업에게 탁지(호부를 가리킴)를 계속 맡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당선종은 소업과 추밀사가 일찌기 결탁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성지를 회수한다. 그리하여 소업은 손에 거의 잡았던 재상 자리를 놓치게 된다.

 

그외에 당선종은 회창시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대신들은 탄압했다. 예를 들어, 서천절도사 이회(李回)는 호남관찰사로 좌천시킨다. 계관관찰사 정아(鄭亞)는 순주자사로 좌천시킨다. 두 사람은 모두 이덕유의 심복들이었다. 특히 이덕유가 발탁하여 중용했던 명장 석웅(石雄)은 말년에 한 진을 맡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선종은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석웅은 앙심을 품고 죽게 된다.

 

당시에 정유립(丁柔立)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당무종때는 이덕유가 그를 억눌렀으나, 이덕유가 귀양가서 죽은 후에는 오히려 들고 일어나 이덕유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당선종은 그가 아부의 죄를 저질렀다고 보아 남양위로 좌천시킨다.

 

옛 역사서에서 당태종이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 것은 과장된 것인데, 당선종은 도처에서 당태종을 자신의 모델로 표방하며, '소태종'이라고 불리웠다. 자연히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기실 그는 의심이 많았다. 당선종은 당태종과 마찬가지로 가식적인 쇼를 한 측면이 많은 것같다.

 

예를 들어, 당선종은 화청궁에서 휴가를 보내고자 했는데, 간관들이 집단으로 반대했다. 이유는 그가 당현종의 뒤를 따를 것으로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당선종은 일정을 취소했고, 관리들은 그를 칭송한다. 이처럼 일부러 어떤 언행을 해서 대신들의 주목을 끈 후에, 그가 비판을 잘 받아들이는 것같은 모양을 취한 것이다.

 

당연히, 당선종이 항상 그렇게 연기를 한 것은 아니고, 그가 한 행동들이 모조리 가식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만일 대신들의 반대가 옳다면, 그는 많은 경우에 받아들여서 시정했다. 이미 내려보낸 조서도 회수해서 고쳤다. 단지 사서에서는 그것을 지나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선종은 대신이 올린 상소글을 받으면 왕왕 먼저 손을 씻고 향을 사른 다음에 진지하게 읽어보았다든지, 그런 것은 보여주기식 쇼의 느낌이 강하다.

 

당선종은 당말에 비교적 출중한 황제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관철한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그는 태자를 세우는 일에 관하여 대신들과 논의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던 위모가 여러번 정중하게 당선종에게 태자를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재상 배휴(裴休, 배휴는 조운, 차세등의 분야에서 적지 않은 실적을 남겼다. 다만 그도 당선종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심취한 하자가 있다)도 당선종에게 태자문제를 언급했다. 그러자 당선종이 이렇게 말한다: "만일 태자를 세우면, 짐은 할 일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오" 이런 말이 나오자, 배휴는 자신이 당선종과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병을 핑계로 은퇴를 청하게 된다. 다만 당선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재상의 자리만 면직시키고, 지방의 자사, 관찰사를 계속 맡게 했다. 당의종(唐懿宗)이 즉위한 후에야 비로소 경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몇년후 74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태위(太尉)에 추증된다. 호삼성(胡三省)이 통감에 주석을 달 때 배휴에 대하여 이런 평을 달았다: "누군가 선종이 잘 살핀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당선종은 우파의 대신들은 대거 기용하는 외에,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 방면에서도 회창시기의 과거제도를 다시 조정한다. 과거 황제는 천자로, 천하의 최고자리에 앉아 자연히 사람위의 사람이었다. 당선종은 종실내에서 출신히 한미했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다. 온갖 방법을 써서 자신이 용상에 앉을 자격이 있고 덕도 있고 재능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심지어 자신이 과거에 참가하여 학문수준을 뽐낼 수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과거에 관심을 두었고, 어떤 때는 민간을 미행하여 여론을 들어 뽑은 선비들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보았다." 오대때 손광헌의 <북몽쇄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선종이 하루는 섬주염사로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유명했던 노항(盧沆)을 만나 시권(詩卷)을 달라고 하고는 나귀를 타고 가버렸다. 다음 날 대신들에게 노항을 얘기하면서, 주사(主司, 과거시험관)에게 합격시키라고 명했다.

 

<당어림>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당선종은 진사를 좋아했다. 매번 조정신하를 만나면 '과거급제를 했는가?'를 물었고, 과거급제를 했다고 들으면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시제가 무엇인지 물었고, 주사의 성명도 물었다. 가끔 사람은 뛰어난데 과거급제는 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오랫동안 탄식하곤 했다. 이런 황제는 아마도 그 혼자 뿐일 것이다.

 

당선종은 대시인 백거이의 대단한 팬이었고, 과거급제한 인재들을 모두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문학인재들을 기용하게 된다. 이는 이덕유가 사람을 쓸 때 치재(治才)를 중시하던 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당나라때부터 송나라때까지, 과거가 번성한 것에 따른 커다란 문제점은 바로 역대이래로 문장과 시부를 잘 짓는 진사과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다만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취지는 원래 실질적으로 관리로서의 업무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조정에는 여러 부서가 있고, 그 일을 맡아서 제대로 처리할 인재가 필요하다. 문학과 치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둘 다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중요한 재상, 상서는 더더욱 치재를 갖추어야 한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재능이 출중한 것만으로는 이런 직무를 맡을 수가 없다. 이런 모순자체는 바로 우파, 이파의 갈등의 중요원인이었다.

 

당선종은 항상 자신이 제2의 당태종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정관정요>를 병풍으로 만들게 하고는 수시로 그 앞에 서서 내용을 음미하곤 했다. 그는 또한 한림학사 영호현(令狐絢)을 시켜 매일 당태종이 편찬한 <금경(金鏡)>을 낭송하게 했다. 매번 영호현과 토론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천하를 태평하게 하려면 이 말이 가장 중요하다" 그후 재상에게 명하여 5권의 <구원어람(具員御覽)>을 편찬하게 해서 자신의 책상앞에 놔두고 수시로 읽었다.

 

당선종때, 서북의 강력한 부족세력은 이미 회흘(回鶻)에서 당항(黨項)으로 바뀌었다. 회흘은 회창연간에 기본적으로 와해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회흘은 하서지구로 왔지만, 바로 안정되지는 못했다. 우연하게도 토번(吐蕃)의 내부에서도 문제가 생겨 역량이 급격히 하락한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 서쪽 돈황지구의 장의조(張議潮), 장의담(張議潭)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토번을 몰아낸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귀부(歸附)를 청한다. 당선종은 기뻐하며 그를 귀의군절도사에 책봉한다.

 

장의조, 장의담 형제는 돈황 사주(沙州)의 호족이다. 장씨형제는 서북지구에서 뿌리가 깊었고, 일찌감치 위진시대에 양주에서 장씨가족은 전량(前凉)을 세운 바 있다. 얼마 후, 중원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자, 돈황의 장씨 장맹명(張孟明)은 서역에 장씨고창(高昌)을 세운다. 시간은 아주 짧았다. 다만 일반적으로 현지인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라 본다. 이를 보면 돈황장씨는 고창, 선선, 합밀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다. 가장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은 비록 장씨고창이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후 수당시기에 유명한 국씨고창(鞠氏高昌)의 국씨도 실제로는 하서 유중(지금의 감숙성 난주시)에서 왔다. 국씨고창에도 여전히 유명한 돈황장씨가 보좌했다. 그것이 바로 장웅(張雄) 일가이다. 장웅은 고창에서 좌위대장군을 맡았고 나중에 국문태를 설득하여 당나라에 투항하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장의조, 장의담 형제는 바로 돈황장씨중 당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토번세력이 하서에서 흥성하던 시기에 성장했고, 한족 호족집안의 후예로서, 당나라가 서역과 하서를 잃은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했고, 일찌기 <봉상청사사표문>을 베껴쓴 바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용맹스러운 변방장수에 대한 흠모를 나타냈다. 마침내 회창연간, 토번에 여러 해동안 기근이 들어 사망자가 속출하게 된다. 

 

대중원년(847년) 하동절도사 왕재(王宰)가 대북제군을 이끌고 염주(지금의 섬서성 정변현 일대)에서 토번의 낙문천토격사 논공열(論恐熱, 즉 尙恐熱)을 대파한다. 다음 해, 봉상절도사 최공(崔珙)이 원주(영하성 고원), 위주(영하성 중위현), 부주(감숙성 문현서쪽) 및 석문, 역장, 목협, 특승, 육반, 석협, 소관등 7관을 수복한다. 그동안 논공열은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과주로 가서 하서의 선, 곽등지를 약탈한 바 있다.

 

장의조는 당군에 협력하여, 대중2년(848년) 무리를 이끌고 사주에서 거병하여 토번의 수비군을 몰아낸다. 토번군은 패퇴한 후, 주변의 병력을 모아 사주를 포위하고자 한다. 장의조는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다시 한번 토번을 궤멸시킨다. 마침내 사주일대는 안정을 되찾는다.

 

사주를 수복한 후, 장의조는 사신을 경사로 보내 승전을 알린다. 당시 양주등지는 여전히 토번의 수중에 있었다. 장의조는 몇팀의 사신을 보냈는데, 단지 고승 오진(悟眞)이 이끄는 팀만이 대막을 우회하여 천덕군(天德軍, 내몽골 우랍특전기)에 도착한다. 대중4년(850년) 정월 비로소 천덕군방어사 이비(李丕)가 보고하여, 장안으로 향하게 된다.

 

당선종은 장의조등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이렇게 칭찬했다: "충신의 붉은 심장으로 오랑캐의 뿔을 꺾었다. 두융이 하서에서의 일과 같으니 성세를 보았고, 이릉의 기묘한 병력운용을 보니 의로운 군대로다." 장의조를 사주방어사로 삼는다.

 

장의조는 병부상서를 자칭하며, 사주를 거점으로 전후로 과주(감숙 안서의 동남), 이주(신강 합밀), 서주(신강 투루판 동남), 감주(감숙 장액), 숙주(감숙 주천), 난주(감숙 난주), 선주(청해 낙도), 하주(감숙 화정의 서북), 민주(감숙 민현), 곽주(청해 귀덕의 동쪽)등 넓은 변방지역을 수복한다.

 

대중5년(851년) 팔월, 장의조는 2차로 장안에 사신단을 보낸다. 형인 장의담, 이명달, 이명진, 압위 오안정등 29명이다. 이들은 과주, 사주등 11주의 지도를 바친다. 당나라는 장의담을 장안에 남겨 거주하게 했는데, 인질로 잡은 혐의가 있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장의조가 일부러 형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건 양주에 일부 토번군이 남은 외에 하서지구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양주를 수복하기 위하여, 장의조는 적극적으로 준비한다. 양주는 하서의 중부에 있어, 동서의 교통을 차단하는 위치이다. 대중12년(858년) 팔월, 장의조는 조카 장준심(張準深)으로 하여금 번,한병력 7천여명을 이끌고 동으로 쳐들어가게 한다. 3년간의 혈전을 거쳐 당의종 함통2년(861년) 양주를 수복하고, 조정에 글을 올린다. 이제 토번이 백여년간 지배했던 하황고지는 모조리 수복된 것이다. 명목상으로 모두 당나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실제로는 이 지역은 장씨가족자제들이 지배했고, 대대로 세습되었다. 귀의군은 성격으로 보아 전형적인 당말의 지방번진이었다.

 

하서의 수복은 당나라에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당선종의 개인적 성취로 말하자면,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당선종은 지방에 대하여 대체로 포용과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적극적으로 경영하려는 웅심은 없었다. 당무종, 이덕유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그래서 후인들은 당말의 나빠진 국면을 얘기하면서 그 근원을 당선종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귀의군의 출현은 객관적이고 특수한 면이 있다. 그러나 당선종에 대한 비판에 포함된다. 역사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선종, 당의종은 덕이 약해서, 변방을 다스릴 여유가 없었고 오로지 명목상 복속되어 있을 뿐이었다." 장의조는 절도사, 관내관찰사, 영전지도사등을 겸직하고, 하서의 군사, 행정, 재경의 직권을 모두 행사했다. 실질적으로 서부의 왕이었다.

 

당연히 서쪽 변방을 지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직위를 주어 수비를 강화하고, 동시에 각지역의 생산을 회복시켜 하서의 국면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서지구는 원래 여러 부족이 있다. 동쪽의 당항, 북쪽의 회흘, 서남의 토곡혼등은 모두 옛날에 토번에 신복했었다. 그래서 장씨가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귀의군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한 것은 실제형세가 복잡함을 고려해야 했었다. 그래서 역사서에서는 "아침마다 말을 기르고, 매일 병사를 훈련시키며, 흉악한 자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관할지역내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귀의군은 서로 다른 대우를 했다. 이미 한화된 사람은 마을에서 한족과 잡거하게 했다. 대중4년(850년) 이주를 수복한다. "강족과 한족 약 1,300명이 섞여 살았다" 토번화가 비교적 심한 자들은 토번제도를 계승해서, 부락형식으로 관리했다. 동시에 우두머리급 인물을 회유한다. 그외에 돈황, 하서지구는 승려를 중시했다. 예를 들어, 장안으로 가는데 성공한 사신이 바로 고승 오진이었다. 그는 장안에서 널리 승려 ,속인들과 교류하며, 시문을 논하여, 명망이 높았다.

 

당의종 함통8년(867년) 이월, 장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장의담이 사망한다. 이미 69세가 된 장의조는 사주를 떠나 장안으로 간다. 우신무통군(일설에는 좌신무통군)을 수여받고, 전답을 하사받으며 선양방에 저택도 하사받는다. 여기에 관직은 사도(司徒)를 받으며 하서절도사가 된다. 돈황현지에서는 장의담의 아들 장준심이 귀의군을 맡아서 실질적으로 승계한다. 5년이 지난 후(872년), 장의조도 장안에서 사망한다. 나이 74세이고 태보(太保)의 관직을 추증받는다.

 

비록 당나라가 하서를 수복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장의조, 장의담형제가 사실상 거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귀순한 것도 완전히 가식적인 것이나 허위가 아니었다. 현지백성들은 그들의 공적을 계속 칭송했고, 오늘날에돈황 156호석굴의 남벽에는 여전히 저명한 <장의조통군출행도>를 볼 수 있다. 

 

서북은 당무종에서 당선종으로 넘어가며 현저히 변화했다. 하투지구의 당항족이 기회를 보아 확장을 시도했고 새로운 위협이 된다. 당나라는 북쪽 변방에서 새로운 부족 사타부(沙陀部)를 중시한다.

 

사타족은 원래 서북의 새외에서 왔다. 이들의 연원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신구당서는 모두 돌궐의 별부라고 적고 있다. 별부라는 말은 돌궐과 연원이 깊은 갈래부족이라는 말이다. 사타족은 철륵족계통의 설연타부에 속한다. 설연타는 당태종 정관연간에 흥성한 바 있고, 당군을 도와 돌궐을 격패시킨다. 다만 나중에 당군과 회흘의 연합군에 소멸당한다. 이들은 당군이 서역을 얻을 때 "강을 건넌 후 다리를 철거당한" 전형적인 피해자이다. 그들의 잔여부족은 원래 사막 오아시스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사타라고 불리게 되면서 점점 동으로 이동해 하동지구로 온다.

 

안록산사사명의 난이 일어난 후, 하삭일대는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사타부락은 원래 약소했다. 그러나 여러 기회를 잡아 점점 발전한다. 다만 계속 당나라를 떠받들고, 당군을 따라 곳곳에서 전쟁에 참여한다. 예를 들어 당헌종 원화5년 성덕진 왕승종(王承宗)을 상태하고, 원화9년 회서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고, 당목종 장경4년에 왕정주(王廷凑)를 수복하는데 모두 하동 사타부가 참여한다. 그들의 공적은 당나라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당문종 태화4년(830년), 유공작(柳公綽)이 하동에 진주하면서, 정식으로 사타부를 변방관군에 편입시킨다. 그들은 당나라군대의 후기에 가장 중요한 번병(蕃兵)이 된다.

 

사타의 우두머리는 처음에 주사집의(朱邪執宜), 주사적심(朱邪赤心)의 양대에 걸쳐 기본적으로 명망을 쌓는다. 당무종 회창3년 다시 당군이 회흘을 소탕할 때의 주력이 된다. 당헌종때부터 당무종때까지의 수십년간 사타군의 활동범위는 하삭일대의 번진지구였다. 당선종이 새로 즉위한 대중원년(847년)부터 사타부는 염주를 지키는데 참여한다. 당군을 따라 토번 농공렬과 회흘, 당항연합군을 대파하는데 참여한다. 그들은 하동에서 하서까지 점점 원래의 관할지를 벗어나, 전체 당나라의 북방변경을 지키는 주요역량으로 성장한다. 비록 나중에 당항이 귀순한 후 서북번병으로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게 되지만, 어쨌든 당항은 더욱 편벽한 곳이었고, 태도도 사타보다 더욱 괴이했다.

 

여러 사람이 사타군의 당헌종때부터 당무종, 당선종시기의 발전과정을 경시했기 때문에, 당말오대에 돌연 한 무리의 사타족 인물들이 나타나는 것이 돌연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후당 이존욱의 황당함, 후진 석경당의 후안무치, 후한 유지원의 무능을 보면서 사람들은 사타족이 단지 오대십국시절에 한때 잘 나갔다고 여기며, 사타군의 당나라후기의 역사에 대하여는 못보게 된다. 여기에는 왜 사타부족이 당나라말기 오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의 배경도 포함된다.

 

그외에 당무종, 당선종 시기에 당항족이 나타난 것도 새로운 골치거리였다. 토번이 당나라와 함께하면서, 정관연간부터 정원연간까지 100여년간 기본적으로 강세를 보였고, 당현종 개원연간에는 특별히 하서와 하투의 당항과 토곡혼부락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으로 옮겨왔다. 일부 토곡혼부락은 나중에 하동에서 사타와 병존한다. 오대시기에 이르러 하동지구는 사타족이 칭왕, 칭제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토곡혼세력이 있었다. 원래의 하서,하투는 회흘과 토번이 당문종때 돌연 쇠락하면서 오랫동안 억압받았던 당항족이 신속히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회창5년말 분,녕,염의 삼주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이덕유는 초무(招撫)를 주장한다. 당항은 아직 대군을 출동시켜 토벌할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전쟁을 하려면 대량의 인력물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무종은 당항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정벌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물자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런데, 회창6년 당무종이 돌연 붕어한다. 결국 대중원년 염주수비전투에 쓰인다. 당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당항의 세력은 잠시 축소된다.

 

대중4년(851년) 당항족은 다시 분,녕지구를 공격하고, 동으로 단주까지 확장한다(이곳은 봉상지구에 속한다. 원래 적지 않이 내지로 이주한 당항부락이 있었다. 그래서 당항은 이곳에서 동족인사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크게 키운다). 이느 ㄴ당나라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백민중(白敏中)은 재상의 신분으로 총사령관이 되고, 장신(蔣伸)이 초토부사가 되고, 손경상(孫景商)이 행군사마가 되여 단주방어사 양건광(楊乾光)과 공동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장신은 이번 출정에서 핵심역할을 한다. 비교적 신축성있는 운용으로 한편으로 공격하며 한편으로 회유하는 전략을 취한다. 최종적으로 당군은 순조롭게 당항족을 회유하여 백민중은 몸값이 배로 뛴다. 장신은 대중원년의 진사이다. 그리하여 이번에 백민중을 도운 공적으로 호부시랑, 병부시랑에 오르고, 나중에 당의종때 하중절도사로 발탁되며 재상에 오른다.

 

주요전투외에 당항족은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하주, 연주, 영주(요동지구, 일찌기 안록산,사사명이 있던 곳이다. 이 지역은 역대이래로 부족주민을 안치했었다)까지 확보한다. 당선종 후기에 당항족은 초보적으로 초무되어 안정된다. 당나라때 당항족은 기본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주, 수주, 은주를 기초로(원래 진무군과 삭방군의 관할지이다), 나중에 정난군(定難軍)을 갖는다. 이는 비교적 특수한 칭호이다. 과거 번진군은 진무, 소의, 귀의같은 이름을 붙였는데 확실히 다르다. 당나라때 당항군은 관군을 도와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참가한다. 그들이 난을 평정한 거대한 공로를 기려 정난군이라는 명호를 내린 것이다.

 

변방과 지방사무를 살펴보는 것만이 당선종시기의 대중조정의 국면을 비교적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원화, 회창이래의 중흥국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확실히 이미 새로운 위기가 적지 않게 생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선종이 죽자마자, 그해 말에 절동 구보(裘甫)는 반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이 십여년동안 당선종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당태종을 본받아 나라를 구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태자의 책봉에 대하여 그는 신하들의 의견은 아예 듣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체면상 당무종이 단약에 심취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한 것을 멸시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결국 그도 내심으로 같은 취향을 지녔다. 그리하여 당무종을 해쳐 죽음에 이르게한 방사 헌원집(軒轅集)을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헌원집의 구체적인 사적은 대부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중원 하남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조상의 관적으로 얘기한 것이고, 다수는 실제로는 그가 관중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나이도 불상이고, 성명도 반드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헌원은 전설상의 황제(黃帝)의 이름이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고, 헌원구(軒轅丘)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헌원이 성씨로 전해진 경우도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헌원씨가 존재한다. 그러나, 헌원집이 진짜 이름인지, 아니면 고의로 황제의 이름을 가져다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한 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현재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헌원집이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젊어 보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그의 수양이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분신술과 약간의 환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작은 주전자의 술을 마셔도 마셔도 계속 나오도록 했고, 병치료에 능하여, 그가 손으로 안마를 하면서 몇 가지 주문을 외우면 환자는 호전되었다고 한다.

 

원래 당선종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헌원집을 영남 나부산(羅浮山)으로 유배보낸다. 이곳은 도가의 명승지이다. 동진때 갈홍이 이곳에 은거하며 수도한 이래로 남방도교의 중심지로 남방 모산파(茅山派)의 발원지이다. 대중11년(857년)에 이르러, 당선종은 다시 헌원집을 궁으로 불러 장생술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확실히 당선종은 당태종, 당헌종, 당무종과 마찬가지로 장생불로술에 심취해 있었다.

 

헌원집은 이미 죽다가 살아났다. 당연히 당선종이 옛날 일을 다시 꺼내는 것을 두려워했고, 끝까지 추궁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당선종에게 보건양생의 도리를 주로 얘기했다. 예를 들면, 정심수양, 여색에 빠지지 않을 것등이다. 당선종은 그런 수박겉핥기식의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헌원집의 진짜재주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에게 주먹을 쥐고 물건을 알아맞추게 했는데, 헌원집은 모두 알아맞추었다. 마지막에 그는 헌원집에게 자신이 황제위에 몇년간 있게 되는지 물어본다. 헌원집은 아주 총명하게도 "사십년"이라고 대답한다. 당나라때 이는 당현종보다는 짧지만, 당태종보다는 긴 것이다. 

당선종은 아주 만족하여 겸손하게 말한다: "어찌 사십년까지 바랄 수 있겠는가" 실제로 당선종의 재위기간은 14년이다. 헌원집은 아마도 사실을 감춘 것같다.

 

다만, 헌원집의 최종행방은 묘연하다.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미리 장안을 벗어난 것일 것이다(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헌원집이 연단한 단약은 궁정태의 이원백 등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당선종은 자신의 목숨이 다해간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실수라고 여겨서인지 헌원집을 추궁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우리가 헌원집의 행위가 모두 사기라고 여긴다면 아마도 우리가 옛사람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헌원집이 절기를 지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저명한 시인 피일휴(皮日休)는 <기제나부헌원선생소거>를 남긴다. 그리고 당시의 저명한 도사 여동빈(呂洞賓)도 헌원집을 찾아가 시문을 청한 바 있다. 시기는 헌원집이 장안에 들어온 대중11년(857년)이다. 이는 <여순양조사전>에 실려 있다. 단지 오늘날의 사람들은 보편저긍로 현환적인 색채의 사료에 대하여 신뢰도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자연히 헌원집은 황제를 기만한 사기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비록 당선종이 헌원집에 대하여 이전의 당무종처럼 중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당선종도 단약을 계속 복용했다. 대중후기에 당선종이 중용했던 대신들은 태자를 맡긴 영호도(令狐綯)같은 자들이다. 이전의 백민중도 논쟁이 많았지만, 백민중은 어느 정도 지방을 다스리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영호도는 완전히 쓸모없는 자였다. 그의 부친 영호초(令狐楚)와 비교할 수 없을 뿐아니라, 당선종이 조정의 국면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당선종의 재위후기 지방에서는 자주 수재와 가뭄의 재해가 발생했다. 대중12년(858년)에 이르러, 지방의 관리들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불안이 가중된다. 선주도장 강전태는 관찰사 정훈을 쫓아내고, 호남도장 석재순도 관찰사 한종을 쫓아내며, 광주도장 왕령환은 절도사 양발을 쫓아내고, 강서도장 모학은 관찰사 정헌을 쫓아낸다. 당선종은 최현으로 하여금 선주, 지주, 흡주의 3주관찰사를 겸직하게 하고, 온장을 선주자사로 임명하고, 채습을 호남관찰사, 이승훈을 광주절도사, 위주를 강서관찰사로 임명하여 각주를 평정하게 한다.

 

대중13년(859년) 오월, 당선종은 태의 이원백이 바친 단약을 먹고 중독반응을 일으킨다. 1달동안 조회에 나오지 못한다. 그해 팔월, 당선종은 단약의 독성이 발작하여 사망하니, 향년 50세였다.

 

당선종은 임종때 후사를 아주 엉망진창으로 안배한다. 그는 자신의 셋째아들 기왕(夔王) 이자(李滋)를 두 추밀사 왕귀장(王歸長), 마공유(馬公儒), 그리고 선휘사 왕거방(王居方)에게 맡긴다. 거의 모조리 중추에 가까운 몇몇 환관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형세가 낙관적이었다. 당시 신책군을 장악한 우군중위도 당선종의 명을 따랐다. 오직 좌군중위 왕종실(王宗實)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선종이 붕어한 후, 왕귀장등은 성지를 위조하여 왕종실을 회남의 감군으로 보내려 한다. 그렇게 하여 경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원래 왕종실은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고, 행낭을 싸서 출발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수하중에 의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었다: "황제는 이미 1달간이나 병석에 있는데, 중위도 겨우 문을 사이에 두고 문안을 드렸는데, 지금 이렇게 크게 이동을 시키니, 직접 황제를 만나본 후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당선종은 환관들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었던 것같다. 기본적으로 그가 내린 조서는 순조롭게 집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종실이 궁안으로 들어갔는데, 누군가 대성통곡을 하는 것을 듣는다. 선종이 이미 붕어했다는 것이다. 왕종실은 돌연 속았다고 느낀다. 그는 왕귀장등에게 성지를 위조했다고 질책하며, 사람들 앞에서 대질한다. 확실히 왕종실의 말이 맞았다. 그리하여 형세는 급변한다. 왕종실은 순조롭게 당의종 이최(李漼)를 새황제로 옹립하고, 왕귀장, 마공유와 왕거방은 성지위조의 대역죄로 죽임을 당한다.

 

모두 알다시피 후임황제인 당의종은 환고자제(紈絝子弟)이다. 당선종이 십여년간 유지해온 대당사직은 이때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