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중 평양전투에서의 패배는 "탄진양절(彈盡糧絶)"때문일까?
글: 염극비(廉克飛)
좌보귀(左寶貴)는 평양에서 전사하여 역사에 영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평양전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전사한 후, 섭지초(葉志超)는 부대를 이끌고 5백리를 미친 듯이 도망쳐 중국내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섭지초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백년동안 여론의 비판은 주로 그를 향했고, 섭지초가 담량이 적고 멍청하여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 사건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쓰는 것은 무슨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이라면 좌보귀와 섭지초를 대비하여 평가하면서 하나는 흑, 하나는 백, 하나는 용사, 하나는 겁쟁이로 그릴 것이다. 무대에 올리는 희극이나 소설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필자도 굳이 섭지초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필자의 수준으로 이 평양전투의 실패원인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직예제독(直隸提督) 섭지초는 회군(淮軍)의 노장인 유명전(劉銘傳)을 따르며 이름을 얻은 고위장수이다. 일찌기 태평천국, 염군(捻軍)과의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목숨을 돌보지 않아 "섭대매자(葉大呆子, 매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말임)"라는 별명을 얻었다. 젊어서 이렇게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렸던 군인이 왜 수십년후에는 이렇게 크게 바뀌게 되었을까? 평양전투의 관련당사자의 공문 보고서와 개인회고등을 보면 모두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일을 언급하고 있다. 즉 9월 15일 심야에 청군은 평양에서 철군하는데, 이는 섭지초 혼자서 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모여서 집단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9월 15일 황혼무렵, 섭지초는 장수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 섭지초가 낸 의견은 이러하다: "북문의 인후(모란봉, 현무문)을 이미 함락당했다. 탄약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며, 물자수송도 되지 않아서, 군심이 놀라고 두려워한다. 적군이 밤을 새워 계속 공격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잠시 평양을 버리고, 상대방이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한 후, 우리가 힘을 다시 회복하여 크게 공격하여 일거에 회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 기술을 보면, 섭지초가 철수한 원인은 첫째, 모란봉과 현무문이 함락당했다는 것이다. 평양성의 고지를 점령당했고, 도시방어의 한 쪽이 뚤린 것이어서 형세가 청군에 아주 불리했다. 이어서 "탄약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며, 물자수송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더욱 심각하다. 요지를 빼앗기더라도 여전히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다. 그러나 탄약은 근대전쟁에서 중요성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청군은 원래 조직정도, 사기와 전술수준이 모두 높지 못했다. 만일 거기에 탄약까지 부족하다면, 그 전투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이다.
9월 19일 새벽, 이홍장(李鴻章)은 평양전투패배후에 섭지초가 보낸 최초의 전황보고서를 받는다. 그 보고서에서 섭지초는 15일의 평양전투패배를 기록하는데, 섭지초는 당시 평양에서 철군한 것은 주로 두 가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첫째는 "자진양완(子盡糧完)". 탄약도 떨어지고, 식량도 바닥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산대포제향성영시방(四山大砲齊向城營施放), 병용무지입족(兵勇無地立足)" 즉 평양성의 사방의 높은 고지를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일본군의 포화가 맹렬하여 버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평양성 황혼회의에서, 섭지초가 철군의 의견을 낸 후, 여러 통령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말한다. 즉 참석한 장수들도 모두 섭지초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점은 위여귀(衛汝貴)의 서신에서도 입증된다. 그날 평양황혼회의에 참가한 성군(盛軍, 盛宣懷의 부대)의 통령인 위여귀는 회군의 성선회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좌보귀가 전사한 후 "성을 지키는 사람이 부족하고" 게다가 "탄약도 떨어졌다" 섭지초는 부득이 여러 장수와 철수책을 논의했다.
몇몇 주요당사자의 보고서와 회고에서도 좌보귀의 전사, 모란봉, 현무문의 함락으로 형세가 불리했다고 한다. 이는 다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탄약이 떨어지고 식량이 바닥났다"는 것이 핵심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진실한 것일까?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깊이있게 논의하지 않았고,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대충 살펴보고 섭지초가 '거짓보고'를 하였다고 단정짓는다. 확실히 섭지초가 이전에 성환역(成歡驛)전투에 관하여 거짓보고를 한 정황은 있다. 패배를 승리로 보고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조정에서 상도 받았다. 그러나, 연구자로서 반드시 '역사의 진상'을 찾는 것을 원칙을 해야 하지, 함부로 '역사적사실'을 추측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여 섭지초가 다시 한번 거짓보고를 올린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탄약이 떨어졌다'는 점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데에는 한 사람이 필요사다 바로 구봉지(邱鳳池)이다.
구봉지가 누구인가? 기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고위장수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도 아니다. 다만 그의 직책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핵심열쇠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양전투에서 성군의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계위원(軍械委員)이었기 때문이다.
9월 15일 저녁 철군때, 구봉지는 오른쪽 종아리에 총알을 맞아 일본군의 포로가 된다. 1895년 8월(광서21년 칠월)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은 996명의 청군포로를 석방한다. 22명의 장교중에서 포로로 잡혔던 오품후보순검(五品候補巡檢) 구봉지가 있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간 후 포로로 잡힌 경위를 짧게 보고서로 작성했다: <구봉지해운포탄자약뢰전청절(邱鳳池解運砲彈子藥雷田淸折)>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당시 전투의 여러 세부상황과 관련한 얻기 힘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보고서에서, 그는 자신이 천진에서 평양으로 운송한 군수물자자료를 상세히 서술한다:
"....칠생탈반자탄 1200개, 양방위돈과산포탄 1200개, 사푼오경소격림포가특림기관포탄 5만개, 합흘개사병자 45만개, 운자사득윈체스트카빈총 총탄5만개, 한뢰각 80개...."
이 짧은 몇 마디에서 우리는 당시 6천 성군의 장비현황을 알 수 있다.
포병은 75밀리포, 37밀리 위돈과산포, 11밀리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보병은 미국제인 합흘개사6연발소총과 단발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기병은 윈체스크13연발 카빈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관총, 소총등 경무기 분야에서는 성군이 그 시대 가장 선진적인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가진 것은 독일의 1871모젤총을 모방한 무라다식 단발소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확실히 단발소총은 한발 한발씩 쏘아야 하므로 연발소총에 비하여는 뒤떨어졌다.
그리고 가특림기관총은 근접전에서 뛰어나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현대적인 기관총과는 차이가 있다. 일종의 과도기적 무기라 할 수 있다. 다만 분당 350발을 쏠 수 있다. 만일 제대로 사용한다면, 밀집하여 돌격하는 보병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런 무기의 최대단점은 무겁다는 것이다. 기동성이 없다. 그래서 방어에 주로 쓰인다. 공격하는 일본군은 이런 무기가 없다.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쌍방의 군사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성군은 회군의 주력이다. 장비도 가장 뛰어났다. 다만 당시 청군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인 낙후한 화승총, 대도, 장모(長矛)를 사용했다. 그래서, 청군의 장비현황은 실제로 들쭉날쭉이었다. 오직 일부군대만이 일본군과의 근접전에서 우세를 보였다.
경무기에서의 상대적인 우세에 비하여, 청군은 중무기 방면에서는 비교적 큰 차이를 보였다. 평양전투에서 패전한 청군은 모든 화포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일본군이 노획한다. 일본군의 비교적 상세한 목록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35문의 화포중에서 절반도 되지 않는 16문만이 당시 구미군대의 포병이 쓰는 75밀리산포, 야포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포병은 기본적으로 이런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평양전투에 참전한 일본의 각부대중에서 단지 제9혼성여단만 하더라도 75밀리포 16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평양성을 방어하는 청군이 가진 모든 것에 해당했다. 만일 여기에 삭녕지대의 6문, 원산지대의 18문, 제5사단주력의 18문까지 합치면, 일본군은 모두 58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의 3.6배에 해당한다. 청군의 대부분 대포는 그저 보병을 상대하는 2파운드짜리 포탄이다. 당시에는 포탄의 무게로 표시했다. 구식화포의 경우에는 가공기술이 정확하지 못해서 주로 앞에서 포탄을 넣어서 쏘았다. 그래서 무게로 표시하는 것이 편리했다. 나중에 발전되면서 뒤에서 넣는 원주형 포탄이 나오게 되고, 그때부터 구경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통상적으로 구경으로 표시하는 화포는 화력에서 완전히 우세를 점하게 된다.
성군의 무기장비는 불균형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경장비가 중장비보다 나았다. 그렇다면 청군의 무기보급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구봉지의 보고서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자신은 1894년 7월 21일, 천진에서 성군부대를 다라 배에 올라 조선으로 떠난다. 그는 성군의 무기장비를 관리했다. 평양에 주둔하는 성군의 모든 무기와 탄약불자는 2차에 걸쳐 받았다. 거기에는 75밀리큭로백포탄 1200발, 2파운드포탄 1200발, 가특림기관총포탄 5만발, 각종 소총탄약 50만발이 포함된다.
9월 15일 평양의 격전시까지, 이들 포탄을 사용한다. 재고로 남은 소총탄약은 겨우 10여만발이고, 극로백75밀리포탄은 350발, 2파운드포탄은 300발, 가특림기관총탄약은 재고가 없었다.
성군은 9월 12일 평양에서 일본군의 전초부대와 접촉한 이래 15일 정오까지, 소모한 탄약이 75만발에 달한다. 성군은 국내에서 출발할 때 매 병사들마다 150발의 탄약을 나눠주었다. 평양에 주둔한 성군의 총병력 5천명으로 계산하면, 즉 15일 정오까지 사용한 탄약이 75만발에 이른다는 것이다. 구봉지가 보관하고 있던 탄약은 50만발인데, 이는 다시 하루 보충하는데도 부죽한 양이었다. 포탄 2800발(가특림기관총은 속사무기이다. 소모량은 통계에 잡지 않았다. 평양의 성군이 장비한 각종 화포는 근 20문인데, 출발때 문당 50발의 포탄을 가지고 떠났다. 여기에 구봉지가 보관하고 있던 75밀리, 2파운드포탄이 합계 3,400발이다. 2,800발을 소모했다는 것은 9월 15일오후에 남은 재고는 600여발뿐이라는 것이다. 각종 대포에는 이미 재고포탄이 없다. 12일부터 14일까지 발생한 것은 모두 소규모 전초전이고, 주로 소모한 것은 15일에 발생한 전투에서이다. 이를 보면 정오때 평양성의 성군이 가진 탄약총량은 이리 형편없는 수준이다. 다시 한번 15일과 같은 강도의 전투를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구봉지의 통계수치는 9월 15일 정오까지이다. 그리고 성군 이외의 다른 각군은 포함되지 않았다. 각군의 전체적인 소모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노획한 장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군과 그다지 처이가 없다.
전체 전투에서 일본군은 75밀리 극로백포 18문, 포탄 516발을 노획했다. 평균 1문당 30발이 되지 않는다. 2파운드류의 소형포는 13문을 노획했는데, 포탄은 209발이다. 가특림기관총은 4문을 노획했는데, 포탄은 117발이다.(가특림기관총은 발사속도가 분당 20발이다. 4문의 화포탄약은 겨우 몇분 발사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이런 탄약상황을 보면, 섭지초가 '탄약이 떨어졌다'고 하는 말은 맞는 것같다. 그렇다면, 섭지초가 퇴각의 이유로 말한 '양식이 바닥났다'는 것도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