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금(程咬金)의 삼판부(三板斧): 배후의 역사진상
글: 문방장궤(文房掌櫃)
정교금은 <설당(說唐)>, <수당연의(隋唐演義)>등 연의소설에서 대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하며, 거칠면서도 세심한 복장이다. 그가 사용하는 병기는 일종의 도끼이다. 그의 삼판부로 와강채를 평정한 이야기는 후인들이 즐겨 얘기하는 스토리이다. "정교금삼판부"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가 된다. 일을 함에 있어서 처음에 거창하게 시작하고 절초를 사용해야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의소설은 어쨌든 정사가 아니다. 많은 장면은 모두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거나 과장된 것이다.
정교금(593-665), 역사상 확실히 존재했던 인물이다. 그는 제주(濟州) 동아(東阿)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교금'이었는데, 나중에 '지절(知節)'로 개명한다. 당나라때의 장수이고 노국공(盧國公)에 봉해진다. 능연각(凌煙閣)24공신중 한 명이다. 수문제 개황13년에 태어나서, 당 의덕2년 이월칠일 사망하니, 향년 72세이다. 연의에서는 그가 백여살까지 살았다고 나오지만, 그것은 만들어낸 말이다. 그의 삼판부는 더더욱 믿기 어렵다. 진실한 정교금은 전투때 도대체 어떤 병기를 사용했을까? 신구당서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장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후진(後晋)때의 <구당서> 권72 <정지절열전>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정지절, 본명은 교금, 제주 동아 사람이다. 어려서 용맹했고, 마삭(馬槊)을 잘 다루었다."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祁)의 <신당서> 권103 <정지절열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삭을 잘 다루었다." 정교금이 마삭이라는 병기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사서에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전투과정에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면서, "삭을 찔러 구멍을 내고", 그 삭을 부러뜨려,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이건 <구당서>이건 정교금이 도끼를 사용했다는 말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신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교금이 전쟁터에서 사용했던 무기는 마삭이라는 것을 도끼가 아니라.
그렇다면, '마삭'은 어떤 무기였을까? 한나라때 유희(劉熙)의 <석명(釋名), 석병(釋兵)>에 따르면, "세모난 창(矛)으로 길이가 1장8척인 것을 '삭'이라 부른다. 말을 탔을 때 소지한다.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죽일 수 있다고 한다." 한나라때의 마삭은 길이가 1장8척이다. 후세에 "장팔사모(丈八蛇矛)"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남조 양문제의 <마삭보서(馬槊譜序)>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삭을 다루는 것은 비록 옛날부터 내려온 방법이 아니지만, 근대에 전해져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기예를 갖추었다."
역사자료를 보면, 고대의 냉병기 삭은 모에서 발전하여 만들어졌다. 종류는 아주 많고, 구조도 복잡하다. 약간은 무겁다. 대부분 힘이 좋은 사람들이 사용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며, 삭병(槊柄) 즉 자루부분과 삭두(槊頭) 즉 머리부분으로 나뉜다. 삭병은 일반적으로 6척의 길이이다. 삭두는 원추형이다. 어떤 경우는 끝에 쇠못을 박는다. 어떤 삭병의 끝에는 준(鐏)을 붙였다. 주요 기술은 벽(劈, 쪼개다), 개(蓋, 덮다), 절(截, 끊다), 료(撩, 쓸어올리다), 충(沖, 찌르다), 대(帶, 휘감다), 도(挑, 쑤시다)등이다.
고대소설에서 왜 마삭을 사용한 정교금이 삼판부를 사용했다고 적었을까? 이는 소설작가가 인물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에게는 옷, 말에게는 안장. 인물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하려면 내재적인 기질을 묘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적인 이미지도 중요하다. 정교금은 소설에서 성격이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하며, 거칠면서도 세심하고, 사고뭉치이며, 산을 점거한 혼세마왕의 이미지이다. 이런 인물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하려면, 반드시 그가 드는 무기와 호응해야 한다. 마삭은 약간 온유하다. 도끼만이 정교금의 거칠고 호방한 이미지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십팔반병기중에서, 삭과 부는 비록 같은 중병기이지만, 부는 더욱 크고 더욱 살상력이 있다. 휘두를 때는 산을 가르고 산하를 삼키는 위용이 있다. 각종 연의소설을 보면, 도끼를 사용하는 인물은 대부분 얼굴이 수염투성이이고, 가슴에 털을 드러내며, 눈은 부리부리하고, 거칠며 호방하고, 고기도 통채로 먹으며, 술도 항아리째 마시는 위풍당당한 맹장이다. 이것이 중국의 대중들에게 남겨져 있는 인상이다. 고대 연의소설의 작가가 정교금이 손에 든 무기를 장팔사모에서 삼판부로 바꾼 것은 그가 거칠면서 용맹한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쉽게 대중들이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의소설의 작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하여, 역사인물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이런 일은 드문 것도 아니다. 정교금도 예외는 아니고. 그는 원래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가난뱅이로 그렸다. 이렇게 완전히 출신까지 뒤집어버리는 설정도 가능한데, 손에 든 무기를 삭에서 도끼로 바꾸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허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속았다. 사람들이 정교금을 기억하는 것은 그저 도끼이기 때문이다. 마삭이 아니라. 이렇게 보면 연의소설의 발전사는 어떻게 보면 민간대중에 대한 사기사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