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때 청군과 영국군의 진실한 사상자 숫자는...?
글: 문방장거(文房掌柜)
제1차 하문지전(厦門之戰): 1840년 7월 3일 청군 전사 9명, 부상 16명. 영국군 사상자 없음.
제1차 정해지전(定海之戰): 1840년 7월 5일 청군 전사 13명, 부상 13명, 영국군 사상자 없음 (청군참전병력 1540명, 정해총병 장조발(張朝發)은 부상을 입은 후 사망했고, 정해지현 요회상(姚懷祥)은 자결함.
대각사각지전(大角沙角之戰): 1841년 1월 7일, 영국군은 정면포격을 선택하고, 육군은 측면에서 포위공격하는 전술을 쓴다. 청군은 277명이 전사하고, 중상을 입고 사망한 자가 5명, 부상 462명이다. 영국군은 부상 38명이다. 청군의 부장(副將) 진련승(陳連昇), 좌령(佐領) 유륭(裕隆, 만주족)이 전사하다.
호문지전(虎門之戰): 청군총병력 11,000명, 청군 250명 전사, 100여명 부상, 총병 관천배(關天培) 전사, 유격(遊擊) 맥정장(麥廷章)도 전사. 영국군 5명부상
광주내하지전(廣州內河之戰): 1841년 2월 27일-3월 18일, 그중 오용지전(烏涌之戰)에서 청군의 총참전병력 1,600명. 총병 상복(祥福, 만주족)을 비롯한 446명 전사, 영국군은 8명 부상
광주지전(廣州之戰): 1841년 5월 18일 - 5월 25일, 청군 총병력 20,000명, 청군의 몇개 포대는 파괴되고 전선 43척, 화벌(火筏, 고대에 적이 배를 공격하기 위해 불을 붙여서 보내는 나뭇배) 32척이 파괴된다. 영국군은 사망 9명, 부상 68명.
삼원리지전(三原里之戰): 1841년 5월 29일 - 5월 31일, 영국군 사망 5-7명, 부상 23-42명.
제2차하문지전: 청군총병력 5,680명, 1851년 8월 26일 청군 사망 40여명(하문섬 남안)과 33명(고랑서) 부상 37명(석벽이 견고하여 사상자가 비교적 적었다). 총병 강계운(江繼芸), 부장 능지(凌志, 만주족)이 전사하다. 영국군 전사 1명, 부상 16명.
제2차정해지전: 청군총병력 5,600명, 1841년 10월 1일, 청군총병 갈운비(葛雲飛, 회족) 정국홍(鄭國鴻), 왕석붕(王錫朋) 전사. 영국군 전사 2명, 부상 27명.
진해지전(鎭海之戰): 청군총병력 4,000명, 1841년 10월 9일, 청의 총독 유겸(裕謙)이 물에 투신하여 죽음. 사상자는 백명이상, 영국군의 사상자숫자도 두 가지 설이 있음. 일설에는 전사 16명, 부상 수인이라고 하고, 다른 일설에는 전사 3명, 부상 16명이라고 함. 청군총병 사조은(謝朝恩)도 전사함.
절동반공지전(浙東反攻之戰): 1842년 3월 10일 - 3월 17일, 청군총병력 31,000명, 영파(寧波) 방면에서 영국군 전사1명, 진해 방면에서는 사상자없음. 3월 15일, 영국군이 자계(慈溪)로 진격하고, 청군 장수 주귀(朱貴), 이성아(伊星阿, 만주족)이 전사. 영국군 전사3명, 부상 일설22명, 일설 15명. 청군은 합계 340여명 전사, 부상 200명.
사포지전(乍浦之戰): 1842년 5월 18일, 청군총병력 7,000명, 영국군은 천존묘(天尊廟)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함. 육군 중위 톰린슨등 9명 전사, 55명 부상. 청군 부도통 장희(長喜, 만주족) 좌령 융복(隆福, 만주족) 전사, 청군팔기병 전사 263명, 순난(殉難) 7명, 부상입은 후 사망한 자가 6명, 실종 1명.
오송지전(吳淞之戰): 청군총병력 4,700명, 1842년 6월 8일, 제독 진화성(陳化成)등 88명 전사, 영국군 전사 2명, 부상 25명.
진강지전(鎭江之戰): 청군 팔기명 1,600명, 녹영병 2,700명. 1842년 7월 21일 -22일, 영국군에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전투. 사망 39명, 부상 130명. 실종 3명. 청군의 사상자수는 다음과 같다:
- 경구팔기(京口八旗): 170명, 161명, 24명(전사, 부상, 실종의 순서, 이하 같음)
- 청주팔기(靑州八旗): 55명, 65명, 24명
- 진강녹영(鎭江綠營): 3명, 6명, 17명
- 호복녹영(湖北綠營): 7명, 8명, 3명
- 사천녹영(四川綠營): 3명
- 하남녹영(河南綠營): 1명, 1명
- 강서녹영(江西綠營): 23명
어떤 사람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보다 나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하면 청왕조는 더욱 봉쇄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도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단지 그 정도 승리로는 전체적인 국면을 만회할 수 없었을 뿐이다. 아편전쟁에서 청군이 승리한 보기 드문 3번의 전투는 다음과 같다:
대만초전(臺灣初戰): 청군병력 14,000명, 향용 47,000명. 다만 각지로 분산되어 있었다; 영국군은 소수의 병력만 출동했다. 1841년 9월 30일, 영국군의 운수함 1척이 기륭(基隆)을 침범하였다가 패퇴하면서 좌초되어 침몰된다. 사망 32명, 포로 132명.
대만재전(臺灣再戰): 1842년 3월 11일, 다시 영국군의 전함 1척이 대안항(大安港)을 침범한다. 수비군의 유인으로 좌초된다. 54명을 포로로 잡는다(그중 5명의 한간(漢奸)이 포함되어 있음). 사망자수는 불상.
정강지전(靖江之戰): 1842년 8월 14일(이때는 전쟁이 이미 끝난 후였다), 영국군이 정강현에 상륙하여 살인약탈을 벌인다. 민중들의 반격으로 영국군 1명이 죽고 수인이 부상당한다. 다음 날 영국전함 3척이 쳐들어왔으나, 수비군이 격퇴시킨다. 영국군 사망 8명, 부상 5명. 수비군은 겨우 수백명이었지만, 사망자는 1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