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택(史天澤): 원나라때 유일한 한족(漢族) 승상
글: 종횡오천년(從橫五千年)
원나라는 몽골인이 건립했다. 그래서 관리임용방면에서 민족색채가 농후했다. 고위관료는 거의 모두 몽골인, 색목인이었다. 대다수의 상황하에서, 한족은 그저 중하급관리만 맡을 수 있었다. 기실 원나라 역사상 한인 승상이 한 사람 배출된 바 있다. 유일한 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출장입상(出將入相) 50여년간 쿠빌라이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렇다면 그 전설적인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원나라초기의 명장(名將) 사천택이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사천택은 하북 영청현(永淸縣)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사병직(史秉直)이다. 사씨집안은 금나라에 충성하지도 않았고, 남송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현지의 호족이다. 사천택의 큰형 사천예(史天倪)는 의리를 중시하고 재산을 가볍게 여겼다. '조(粟) 팔만석을 굶주린 자들에게 나눠주니,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를 따랐다." 나중에 몽골명장 무카리(木華黎)가 병력을 이끌고 금나라를 칠 때, 사병직은 몽골에 귀순한다. 그리고 일가족은 모두 중임을 맡는다.
사천택은 셋째이고, 사병직의 막내아들이다. "키가 팔척이고, 목소리가 큰 종소리같았다. 말을 잘 탔고, 힘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1225년, 사천택은 모친을 연경으로 호송하다가 도중에 부장(副將) 무선(武仙)이 반란을 일으켜, 큰형 사천예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천택은 대노하여, 즉시 갑옷으로 갈아입고 남으로 되돌아간다. 가는 길에 병마를 모으는데, "병사와 말이 아주 많았다." 사천택은 앞장서서 반군에 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승리를 거두고 진정(眞定)을 수복한다.
남송의 관직을 받은 홍오군(紅袄軍)의 장수 팽의빈(彭義斌)이 산채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천택은 50명의 정예병을 뽑아 선봉으로 내세우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후원을 맞아 일거에 팽의빈을 격파하고, 그를 참수한다. 그후 사천택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철저히 무선을 격퇴시키고, 상주(相州), 위주(衛州)등지를 점령한다. 오코타이가 즉위한 후, 세 명의 만호를 두어, 몽골대군내의 한군(漢軍)을 관리했다. 그 중에 사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 봉지(封地)는 진정, 하간(河間), 대명(大名), 동평(東平), 제남(濟南)의 오로(五路)였다.
그후 수십년간, 사천택은 몽골정권의 금나라 및 남송과의 모든 전쟁에 참가한다. 그는 먼저 병력을 이끌고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투에 참여했다. 변량(汴梁)전투에서, 완안백살(完顔白撒)의 8만군대를 추살한다; 채주(蔡州)전투에서 사천택은 "나룻배를 묶어 몰래 여수(汝水)를 건너 연일 혈전을 벌인다." 송원전쟁이 발발한 후, 사천택은 여러번 남하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다. 1235년, 사천택은 조양(棗陽)전투에서 가장 먼저 성에 오른다. 그후의 양양(襄陽)전투에서 그는 2척의 배를 이끌고 공격한다. 송군에서 '말에 빠진 자가 만을 헤아렸다'
조어성(釣魚城) 전투에서, 사천택은 명을 받아 남송의 원군을 막는데, "삼전삼승을 거둔다. 송나라전선 백여척을 빼앗았다." 몽케가 죽은 후, 쿠빌라이가 즉위한다. 그는 사천택을 아주 신임했다. 사천택을 하남등로선무사(河南等路宣撫使), 강회제익군마경략사(江淮諸翼軍馬經略使)등 요직에 임명한다. 1261년, 사천택은 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에 오른다. 그리고 쿠빌라이를 따라 북상하여, 아릭부케를 대패시킨다. 다음 해, 이단(李檀)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사천택이 평정한다. 그후 사천택은 스스로 상소를 올려 병권을 내놓는다.
1266년, 쿠빌라이는 황태자에게 "영중서성겸판추밀원사(領中書省兼判樞密院事)"를 맡긴다. 그리하여 사천택은 보국상장군(輔國上將軍),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된다. 1년후, 쿠빌라이는 다시 사천택을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에 임명한다. 1269년, 쿠빌라이는 남송에 대한 전면전을 계획하고, 사천택을 양양전선으로 보내어, 군대를 정비하고 전투를 준비한다. 1271년, 사천택은 다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에 임명된다. 이때의 사천택은 나이가 들어 병이 많았다. 쿠빌라이는 특별히 당부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만 경과 상의하겠다. 작은 일로 경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한다.
1273년, 사천택은 다시 양양전투에 참가하여, 번성(樊城)을 함락시킨다. 송나라장수 여문덕(呂文德)이 투항한다. 1274년, 쿠빌라이는 바얀(巴顔), 사천택에게 20만을 주어 남송을 정벌하게 한다. 도중에 사천택을 병에 걸려 되돌아온다. 다음 해에 진정에서 사망하니, 향년 74세이다. 임종전에, 사천택은 쿠빌라이에게 상소를 올린다. "신은 목숨이 다했습니다. 죽어도 여한은 없습니다. 다만 원컨대 천병(원나라군대)이 장강을 건널 때, 살륙을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원나라 역사상 오직 2명의 한인만이 바투루(巴圖魯)의 봉호를 받는데, 그중의 한 명이 바로 사천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