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최후의 삶의 기회였다는 것을.
북대 교수 계선림(季羨林)의 회고에 따르면, 장개석은 3대의 비행기를 보내, 이들 북평(北平, 북경의 당시 이름)의 저명한 학자들을 남경으로 먼저 데려간 후 다시 대만으로 모셔가려 했다. 호적은 친히 남경공항에서 기다렸다. 비행기가 도착한 후, 첫번째 비행기의 좌석은 텅 비어 있었고, 두번째 비행기도 마찬가지였다. 호적은 홀로 공항에서 대성통곡했다. 호적의 통곡은 천고의 일곡이고, 천고의 일탄이다. 그후의 사실은 증명한다. 이 통곡, 탄식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호적은 이들 지식인의 운명을 아마도 에감했던 것같다.
당시 명단에는 곽말약(郭沫若)을 포함한 81명의 원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59명은 남기로 선택해쓰며 22명만이 대륙을 떠난다. 그중 10명은 대만으로 갔고, 나머지는 구미등 나라로 멀리 떠났다. 1949년은 그들의 인생에 분기점이 된다.
호적: 공산당의 수법은 믿지 않는다.
호적은 중국정계, 학계에 영향력이 컸다. 장개석은 친히 전보를 보내어 호적에게 남경으로 올 것을 독촉했고, 중공도 그에 대한 통전공작을 강화했다. 당시 모택동은 호적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호적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에게 북경도서관장을 맡기겠다!" 일찌기 교직을 버리고 청화원(淸華園)을 떠나 비밀리에 공산당 점령지역으로 가서 중공의 고관이 되기를 기다렸던 호적이 아끼던 제자 오함(吳唅)은 자신의 적계를 호적에게 보내어 밀담한다. 그에게 북대에 남아줄 것을 요청하고, 국민당을 따라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호적은 그의 말을 들은 후, 냉랭하게 한 마디 한다: "공산당의 그런 수법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찾아온 사람에게 오함에게 세 마디를 전하라고 한다: "소련는 빵은 있고, 자유는 없다. 미국에는 빵도 있고 자유도 있다. 그들(중공)이 오면 빵도 없고 자유도 없다."
공산당 고위층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직접 호적에게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적은 공산당은 절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다. 일찌기 1919년, 호적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반대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꿈같은 소리이다" "공산주의는 완전히 무단사상(武斷思想)이다."
1946년, 호적은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이라는 글을 써서 세계의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이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는 영국, 미국, 서구의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공산당,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 독일의 나치당이라고 하였다. 글에서 호적은 분명하게 두 정당의 서로 다른 성격을 열거하고, 그들은 자유와 비자유, 독립과 비독립, 용인과 비용인의 구분이 있다고 밝혔다.
1949년 5월, 이미 중공에 투신한 당시 북경 보인대학총장이며 호적과 사적인 교분이 깊은 진원(陳垣)은 <호적에 보내는 한 통의 공개서신>을 발표한다. 그에게 "현실을 바로 보고, 마땅히 인민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호적은 한 때 진원에게 함께 대륙을 떠나자고 한다. 그러나 진원은 거절했고, 그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말한다: "북평이 해방되기 전날, 남경정부는 여러번 비행기로 데려가려 했지만, 나는 비록 당신과 진인각(陳寅恪)선생은 이미 떠났지만, 청년학생들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광명을 기다린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나는 새로운 역량이 이미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적은 진원의 선택에 대하여 '심가연석(甚可憐惜)'하다고 했다. 다음 해에 <공산당통치하에 절대로 자유는 없다>는 글로 대답한다. 그리고 이 서신은 "공산당 통치하에는 학술자유가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사년: 연안으로 갔기 때문에 공산당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부사년은 1920년대 중국 사학계, 국학계의 남부끄럽지 않은 천재, 기재이며 대사급(大師級) 인물이다. 그는 강열(剛烈)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부대포(傅大炮)'였다.
부사년은 소련과 중공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1932년, 그가 발표한 <중국은 현재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글에서 공개적으로 공산당은 "대체로 조상대대로 내려온 유구(流寇)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많은 청년들이 점점 극렬한 좌파분자가 되는 거슬 보고 아주 불안했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도 한다: "내가 17,8세의 청년이라는 나도 아마 공산당에 흥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과 접촉한 이후로 절대로 공산당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항전후기인 1945년 7월 1일, 부사년은 황염배(黃炎培), 장백균(章伯鈞)등과 연안으로 간다. 부사년은 모택동과 하룻 밤동안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황염배가 연안으로 갔던 일을 "여좌춘풍(如坐春風)"이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부사년은 연안의 작풍은 순전히 전제우민(專制愚民)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택동과의 대화과정에서, 그가 항간의 각종 소설, 심지어 저급취미의 소설을 포함하여 모두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민중의 심리를 연구했고 이용했다. 그러므로 부사년은 모택동이 그저 "송강(宋江, 수호전)과 같은 류"라고 여긴다. 바로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부사년은 아무런 망성림없이 대륙을 떠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국립대만대학의 학장을 맡는다.
전목: 모택동의 남하 포고문에서 천기(天機)를 읽었다.
사학분야에 조예가 깊고, 진인각, 여사면(呂思勉), 진원과 함께 "현대4대역사학가"로 불리는 전목은 또 다른 공산당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 민국의 대사이다.
1949년 중공군이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진격했다. 지식인들은 떠날 지 남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고전문학연구에 조예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전기박(錢基博) 선생은 전목에게 남으라고 권한다. 전목이 묻는다. 그대는 고문을 연구했는데, 군대가 도강할 때의 그 포고문을 보았는갸? 거기에 대도포용(大度包容)의 기상이 있던가? 전기박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포고문은 바로 모택동이 쓴 것이다. 전목은 그 글에서 난세효웅에게 함용만유(涵容萬有)의 기운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학자인 자신은 용납될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바로 홍콩으로 간다. 그러나 전기박은 중공을 믿고 남는다. 두 사람의 그 후의 운명은 전혀 달랐다. 전목은 홍콩에서 서원을 창립하여,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 전기박의 심혈이 들어 있는 원고는 1959년 '발백기(拔白旗)'운동때 대량으로 불태워진다. 결국은 우울하게 사망한다. 전목의 통찰력은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전목과 같은 대사에 대하여 중공은 당연히 통일전선공작을 잊지 않았다. 1950년대초, 중공은 그의 스승인 여사면과 그의 조카인 전위장(錢偉長)을 통헤 그에게 서신을 써서 대륙으로 돌아오도록 권한다. 전목은 회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풍우란(馮友蘭), 주광잠(朱光潛) 두 친구를 보았다. 지식인의 사상개조운동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추화(醜化)하는 반성문을 썼다. 그렇게 되면, 행시주육(行屍走肉)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존엄을 다 상실했다. 이것은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명말 주순수(朱舜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중국문화를 전파한 것을 본받겠고, 남방국가에 중국문화의 일맥을 전하고자 한다.
동시에 전목은 계속 글을 써서, 중공정권의 각종 역행조치들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는 <중국사상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때 중국에서 만연하고 창궐하는 공산주의는 기껏해야 뼈가 있고, 혈육이 있는 시체에 불과하다. ....대륙정권은 큰 돌맹이와 같다. 아주 높은 산에서 굴러 내려올 때, 붕괴가 가까워질 수록 역량은 더욱 커진다. 삼면홍기는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홍위병문화대혁명은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다음에는 더욱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를 보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중국이다. 문화를 훼멸하고, 인성을 왜곡시키는 중공정권에는 일말의 환상도 품지 않았다.
진인각: '적현편숭신(赤縣遍崇神)"을 예언하다.
'교수중의 교수'로 불리던 국학대사 진인각은 지식이 연박(淵博)하고, 20여종 문자에 정통하여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와 더불어 "청화삼거두(淸華三巨頭)"로 불렸다.
1965년, 이제 막 대기근에서 살아남은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이제는 당국이 백성들과 함께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축하하고 있었다. 태평한 몇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모택동의 이데올로기는 날로 팽창했고,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에감이 좋지 않았던 진인각은 국가의 위급을 보고 마음이 초조했다. 그는 1966년 <병오원단작(丙午元旦作)>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 "일자황주쟁설귀(一自黃州爭說鬼), 경의적현편숭신(更宜赤縣遍崇神)" 5개월후, 겁난이 돌연 닥친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된 것이다.
이 때 그는 비록 호적과 함께 남경까지는 갔지만, 대륙을 떠나지는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는 "자유의 사상, 독립의 정신'을 신조로 삼았다. 당시 열악한 생존환경 속에서도 중공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니 중공이 그를 용납할 리 없다. 문혁이 시작된 후, 이미 두 눈이 멀고, 온몸에 병이 들어 있던 진인각은 급여를 정지당하고, 예금은 동결당한다.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는 "특호반동권위'로 비투를 당한다. 그의 집에는 대자보로 뒤덮힌다. 멀리서 보면 백색 관처럼 보였다. 홍위병은 큰 소리를 내는 몇 개의 확성기를 그의 침상 옆에 놔두어, 이미 두 눈이 멀고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를 완전히 붕괴시킨다 사망하기 하루 전날 오후, 기맥이 이미 거의 흐르지 않던 그는 '말'을 했다. 그는 '내가 사형수가 감옥에 있는 것같다"라고 말하고는 "체읍대우의(涕泣對牛衣)" 싯구를 남긴다.
이는 중화문명의 비극이다. 이는 중국현대사상 가장 어두운 일막이다.
환상은 무서지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오지 않는다.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호적이 떠나기 전에 막내아들 호사두(胡思杜)는 잠시 친척집에 머물겠다고 하면서 부모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호적부부는 크게 놀랐다. 당시 호사두는 막 미국에서 북평으로 돌아왔다. 국내의 몇년간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공산당을 해하는 무슨 일을 한 적도 없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정이 급하고 시간이 없어서 그는 아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놔둘 수 밖에 없었다.
50년대 중국에서는 호적비판운동이 일어난다. 호적의 막내아들 호사두는 <나의 부친 호적에 대한 비판>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호적을 "제국주의의 주구이자 인민의 공적"이라고 욕한다. 그러나 1957년, 호사두는 우파로 규정되어 '자살'하게 된다. 호적은 1962년 병사할 때까지 아들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부사년의 조카 부락환(傅樂煥)은 1951년 영국에서 유학후 돌아온다. 부사년은 그에게 대만대학이나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일자리를 마련해 놓았지만, 그는 자신의 상상속의 자유, 행복의 대륙으로 간다. 1952년 중앙민족학원 역사과 교수가 된다. 문혁때 부사년에 연루되어, '대륙에 심어놓은 스파이'로 몰려 비투, 수감되고 잔혹하게 고통을 당한다. 결국 북경 도연정(陶然亭) 호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중공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중공이 말로 약속한 민주자유의 사기적 선전과 큰 관련이 있다. 1939년 창간된 중공기관지 <신화일보>는 계속하여 국민당을 욕해왔다. 예를 들어, 1939년 2월 25일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국민당을 가리킴)은 중국에서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오늘의 일이 아니라 여려해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중국인민의 지식, 교육정도를 구미자산계급민주국가처럼 끌어올려야, 비로소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바로 민주제도하에서 더욱 쉽게 민중을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1945년 9월 27일, 모택동은 <신화일보>에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공의 정치강령을 내놓는다: "자유민주의 중국은 이런 국가가 될 것이다. 그의 각급정부에서 중앙정부까지 보통평등 무기명선거로 탄생할 것이고, 또한 그들을 뽑아준 인민에 책임질 것이다. 그것은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 링컨의 민유민치민향(民有民治民享)의 원칙, 루스벨트의 4대자유를 실현할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독립, 단결, 통일 및 각 민주강국과의 합작을 보증할 것이다. 여기에는 고무탄이 필요없다."
이런 말들은 당시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과 마찬가지로 많은 열혈 애국청년들을 속였다. 중국과학원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과학자 개략 5천여명중 1956년까지 2000여명의 대륙으로 돌아왔다. 다만 나중에 처지는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1951년 7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무녕곤(巫寧坤)은 국내에서 급전을 받는다. 그에게 국내로 돌아와 연경대학 교수를 맡아달라는 것이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컬리분교에서 주임연구원 겸 강사를 맡고 있던 이정도(李政道)가 배웅했다. 무녕곤은 돌연 이정도에게 묻는다: "너는 왜 신중국으로 돌아가서 일하지 않는 것이냐?" 이정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세뇌당하고 싶지 않다" 그후 1957년 무녕곤은 우파로 몰려 갖은 박해를 당한다. 같은 해 이정도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28년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때 이정도는 중국의 정계요인들이 영접하는 귀빈이었고, 무녕곤은 막 우붕(牛棚)에서 풀려나와 내부통제를 받고 있던 '우귀사신(牛鬼蛇神)이었다. 당시 무녕곤은 북경으로 돌아와서 '우파개정(右派改正)'절차를 밟고 있었다. 우연히 신문에서 '애국미국적화교과학자 이정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강의한다는 소식을 보게 된다. 그래서 북경반점 국빈관으로 가서 옛 친구를 만난다. 만나서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헤어질 때, 무녕곤이 돌연 기발한 생각을 말한다. 만일 그때 그가 이정도가 귀국해서 교수가 되는 것을 배웅했더라면 결과는 어땠을까?
오함은 안타깝다. 길을 잘못 들었다.
1949년이후 중공의 진면목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중국지식인들이 받은 박해는 삼천년 역사에 없던 것이다.
호적에게 남아달라고 권유했던 오함은 유명한 명나라역사전문가이다. 호적의 고제자이기도 하다. 호적은 여러번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함은 안타깝다. 길을 잘못들었다.
신중국이 성립되자 오함은 신분이 완전히 바뀐다. 인수고관의 신분으로 북대, 청화를 장악하고, 일시에 의기풍발(意氣風發)한다. 그러자 그는 득의망형(得意忘形)하여 갈수록 호적은 전형적인 구좌교자(狗坐轎子)로, 자신이 높이 평가해준 것도 알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길을 잘못들었다'고 생각한다. 스승과 제자가 모두 상대가 길을 잘못들었다고 여긴 것이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역사가 그 해답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답안은 오함에게 너무나 잔혹했다.
문혁때 오함은 <해서파관>으로 비투를 받기 시작한다. 나아가 건국전에 그가 스승 호적에게 썼던 서신까지 발굴되어, 그가 호적에게 의탁하려 했다는 죄증이 된다. 그는 여러번 땅바닥에 꿇어앉아 비투들 당해야 했고, 갖은 굴욕을 당한다. 갇혀있는 기간도안 그의 머리카락은 모두 빠졌고, 가슴에는 얻어맞아 피멍울이 졌다. 1969년 10월 오함은 맞아죽는다. 죽기 전에 양자, 양녀를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저 온통 피로 얼룩진 바지만을 남겼다.
오함과 마찬가지로 남는 것을 선택했던 엘리트들은 마찬가지로 중공의 마장(魔掌)을 벗어나지 못한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그들은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거짓말에 두 눈이 가려져서 불행히도 중공의 희생물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