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왜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중은우시 2020. 7. 15. 12:55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서주(徐州)의 옛 명칭은 팽성(彭城)이다. 요(堯)임금이 팽조(彭祖)를 대팽씨국(大彭氏國)에 봉했는데, 팽성은 바로 대팽씨국의 도성이었다. 나중에 상(商)의 주왕(紂王)에 멸망했다. 춘추시기에 팽성읍은 송(宋)나라에 속했다. 팽성은 송나라의 중요성읍이다. 왕왕 제후들이 쟁탈하는 목표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십이월, 항우는 여러 제후의 병력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격파하고 진왕조를 멸망시킨 후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오르고, 팽성을 도읍으로 한다. 그는 패주의 신분으로 전국을 18개왕국으로 나누어 제후, 부장(部將)과 항장(降將)을 왕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가 진나라황궁을 불태워버릴 때, 어떤 참모는 그에게 함양에 남을 것을 권유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관중은 산과 강으로 사방이 막혀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도읍으로 삼으면 패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함양을 수도로 삼으면 어떤 잇점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항우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역사상 항우가 팽성을 수도로 삼은데 대하여는 좋지 않게 보는 견해가 많다. 송나라때 소식(蘇軾)은 <서주상황제서(徐州上皇帝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항우가 함곡관을 들어가 함양을 불태우고 동으로 돌아와서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항우의 웅재대략으로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택한 것이다. 팽성은 험준하고 건고하여, 제후가 뜻을 얻을만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신이 그 땅을 보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직 서쪽만 평원으로 수백리가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 가면 양,송이 있는데, 초는 관문을 열고 적을 맞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옥상에서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옥상에서 물을 붓는 것같다는 것은 고지에서 저지대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니 손쉽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소식은 군사전략적인 면에서 항우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한다.

 

항우가 함양을 버리고 팽성에 도읍을 정한 이유는 군사적인 각도에서만은 아니다. 다른 방면에서도 분석해 볼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정치형세로 보면, 진이 육국을 멸망시킨 후 폭정을 가하여, 반진의거를 불러왔다. 온 세상이 진왕조의 호랑무도(虎狼無道)을 욕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아무도 진시황을 본받아, 독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주시대의 "약한 왕실, 강한 패주"의 방법으로 제후들을 분봉한다. 항우는 실질적인 지배권을 차지하였지만, 형식적으로는 초회왕이 '의제'라는 허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회왕은 팽성에 있었다. 자연히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온 것은 그를 존경하는 것도 있고, 자칭 서초패왕이라 하였으므로 초의 땅에 있어야 했다. 이는 당시 항우의 정치적 태도를 보여준다.

 

둘쨰 원인으로, 항우의 신세내력 및 성격을 보면, 항우는 초나라의 마지막 대장군 항연(項燕)의 손자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 항연은 진군에 패배하여 자결한다. 항우는 부모를 모두 잃고 숙부인 항량(項梁)을 따라 피바다 속에서 도망칠 수 있었고, 하상(下相, 지금의 숙천시)에 정착한다. 초나라의 마지막 도성인 수춘(壽春, 지금의 안휘 수현), 항연부자의 순국장소인 기현(蘄縣, 지금의 숙주시), 하상등지는 모두 서초에 속하는 지역이고, 고향이다. 의관, 언어도 어려서부터 친숙하다. 항우는 서초를 그리워했고, '부귀해지고 고향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이다.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그 참모는 항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항우를 목후(沐猴)라고 비웃다가 팽(烹)당한다.

 

세번째 이유는  팽성은 진나라말기 전쟁에서 계속하여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초회왕은 이곳에서 명령을 내렸고, 각로대군은 진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팽성은 길상지지(吉祥之地)이다. 반진장병의 마음 속에는 숭고한 지위가 있다. 항우가 이곳을 수도로 삼은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물며 초회왕은 앞에 약속한 바가 있다. "먼저 관중에 들어간 자를 왕으로 삼는다." 유방이 먼저 함양에 들어갔고, 항우는 한발 늦었다. 공개적으로 약속을 어기기는 어려웠다. 할 수 없이, 팽성을 수도로 정하고 맹약을 존중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이것은 전략적인 의미가 있다.

 

네번째 원인은 팽성은 황회평원(黃淮平原, 황하, 회하 사이의 평원)에 위차하여 물산이 풍부하다. 일년 수확한 식량은 수년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군수물자조달이 충분하다. 항우는 진나라의 항복한 장병 수십만을 갱살했고, 진나라의 아방궁을 불질렀다. 그리하여 관중의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게 되었다. 유방은 '약법삼장'으로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렇게 항우와 유방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이해와 은원을 생각하면, 항우는 팽성을 수도로 삼는 것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