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일대재녀(一代才女) 임휘인(林徽因)

중은우시 2020. 6. 20. 16:05

글: 육조룡(陸祖龍)

 

[금년(2020년) 4월 1일은 임휘인 서거 65주년 기일이다. 북경만보의 요청으로 총정치부의 저명한 작곡가, 지휘자인 92세의 육조룡 선생이 그가 친히 만난 임휘인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나도 90후이다. 당시 20여명의 청화대학 자제들이 시험을 쳤는데, 거기에는 양사성(梁思成), 임휘인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북경대학에 합격했다. 임휘인 선생은 나보고 대단하다며 칭친해 주었다..." 전화속의 육조룡 선생은 목소리가 크고, 기운이 넘쳤다. 육조룡의 부친 육근인(陸近仁)인데 저명한 곤충학자이다. 일찌기 양사성, 임휘인과 함께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양가의 교류에 대해 육조룡은 지금도 기억이 생싱하다]

 

처음 만난 것은 1941년 서남연대(西南聯大)에서이다.

 

당신은 한그루 한그루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

제비가 대들보 사이에서 지저귀는 것

당신은 사랑, 따뜻함

희망

당신은 인간세상의 사월의 하늘.

 

임휘인이 일대문호는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이 싯귀를 암송한다. 그녀는 최고급의 건축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공화국의 국휘(國徽)와 인민영웅기념비를 설계하는데 참가했다. 그녀가 서거한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왜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 그녀의 미모, 그녀의 이야기를 즐겨 얘기하면서 못잊는 것일까?

 

나는 올해 92살이다. 아마도 새상에 살아있는 사람중에 임휘인을 만나고 접촉해본 몇 안되는 사람일 것이다. 임휘인과 그의 남편 양사성은 모두 나의 부친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동료이다. 그녀와 나의 부친은 나이가 같다. 두분 모두 1904년생이다. 우리 두 집안은 서로 왕래가 있었고, 그녀의 딸은 나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녀의 거실에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들중 여러 사람을 나도 알고 있다. 우리 집과도 상당히 잘아는 분도 있었고, 나의 스승도 있었고, 북경대학 교장 호적(胡適) 선생도 있었다. 당시 나는 아직 젊은 청년이므로, 임휘인에 대하여는 호기심이 있었고, 그저 단순한 청춘기의 일이다. 나중에 점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하여 더욱 숭배하고 '애모'하게 되었다.

 

항전시기, 우리 가족은 대학교수인 부친을 따라 쿤밍의 서남연대로 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그녀를 한번 보았다. 개략 1941년이다. 당시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고, 모두 그녀의 "태태객청(太太客廳)"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쿤밍시내에 살고 있지 않았고, 자신이 설계한 농가에 살았다. 이것은 그들이 일생동안 유일하게 자신들을 위해 설계하고, 시골방식으로 만든 주택이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몇몇 친구들과 서남연대로 가서 놀았다. 그때 마침 노천집회가 열렸는데, 양사성 부부도 참가했다. 여학생들은 임휘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학생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고, 이미 나이가 30여세인데도, 젊어보이고, 멋졌다. 걸음걸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가 처음 그녀를 직접 본 때이다.

 

1946년 우리 가족과 그녀의 가족이 모두 베이징의 청화대학으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만나는 횟수도 늘어갔다. 원래 그들은 조란원(照瀾院)에 살았고, 내 누나의 친가인 마약한(馬約翰) 집과 멀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은 신림원(新林院)으로 이사온다. 거기는 청화대학 2교문의 바깥에 있었다. 우리 집은 북원(北院)에 있어서 교학관, 학생숙사 및 도서관과 아주 가까웠다. 그들은 매번 청화원으로 와서 수업을 할 때마다 시간이 나면 우리 집에 와서 잠시 앉아있곤 했다. 1947년 그녀는 그때 개략 43세 정도 되었는데, 그들이 여러번 우리 집에 왔지만, 나는 자주 집에 있지 않았었다. 한번은 막 귀가했는데, 마침 그들이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한번은 내가 잊을 수가 없다.

 

북경대학 합격후 임휘인에게 칭찬을 듣다.

 

그때는 바로 1947년 가을이었다. 대학입학시험 결과가 나온 후의 어느 날이다. 양사성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 잠시 앉아 있었는데, 그날 나는 마침 집에 있었다. 부친은 양선생과 한켠에 앉아서 학교 일을 얘기하고 있었고, 임휘인 선생은 나의 모친과 해바라기씨를 먹으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매처럼 친밀했다.

 

나의 그녀에 대한 인상은 명랑하고 얘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띄었다. 어떤 때는 크게 웃기도 하고, 친화력이 대단했다. 특히 그녀의 밝게 빛나면서도 깊이있는 두 눈이 너를 보게 되면 너무 아름다워서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그녀를 보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임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러자 모친이 바로 고쳐주었다. "용(龍)아, 아니지. 양백모(梁伯母)라고 불러여지!" 원래 양사성은 나의 부친보다 3살이 많았다. 나는 당연히 그녀를 백모라고 불러야 햇다. 그러나 그녀는 웃음을 지으면서, "아주머니라고 하면 더 젊어보이는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의 모친과 얘기를 나누면서 때때로 고개를 돌려 나에게 몇 마디 묻곤 했다. 나는 당시에 약간 긴장하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녀가 묻는 것에 대답할 때는 항상 떠듬거렸다. 그녀는 말했다: "조룡, 듣기로 이번에 청화대학 자제들 중에서 20여명이 시험을 쳤는데, 너만 북경대학에 합격했다면서, 재빙(再氷, 그녀의 딸)은 몇점 차이로 떨어졌다. 매교장(梅貽琦, 당시 청화대학 교장)의 셋째 딸도 합격못했다더구나. 너 대단한데." 당시 나는 그녀가 대학입학상황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아주 의외였다. 놀라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해서 거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일은 당시 청화대학의 가족들 간에 확실히 작은 파문을 일으켰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수석을 했다고 지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별 것아니라는 반응이었다. 내가 시험결과를 보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친은 마침 글을 쓰고 계셨다. 잠깐 고개를 돌려서 물어보셨다: "합격했니?" 내가 대답했다. "예!" 그러자 그는 "응!"하고는 그만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쓰던 글을 계속 쓰셨다. 모친은 나를 보고는 비교적 기뻐하며 말했다: '합격했구나. 괜찮네." 다만 그다지 크게 기뻐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칭찬하는 말도 한마디 없었다. 저녁식사때 나에게 뭐 맛있는 음식을 해주지도 않았다. 아마도 나의 두 누나와 형이 모두 청화대학에 합격해서, 우리 집에서는 그저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같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것으로.

 

그날 나의 누나의 친구인 호금심(胡錦心)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활발하고 예뻤다.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그녀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다. 부친은 그녀를 아주 좋아했다. 그녀가 나의 형과 배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녀는 옆에서 임휘인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조룡의 형과 누나도 우등생이예요! 형인 육조음(陸祖蔭)은 20살때 북경대학 물리학과 조교가 되었어요. 정말 대단해요" 생각지도 못하게 임휘인이 말을 받았다. "나도 알고 있다. 쿤밍 서남연대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물리학과에 삼걸(三傑)이 있는데, 양진녕(楊振寧), 이정도(李政道), 육조음이라고. 맞지?"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재빙을 알고 있니?" 나는 말했다. "우리는 같은 학년인데, 잘 알지는 못해요!" 그녀가 돌연 웃으면서 말한다: "Hey, young man, You can contact her(젊은친구, 그녀와 연락해봐라!)" 그녀는 돌연 영어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란다. 한동안 정신을 못차렸다. 그런데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이게 나의 영어실력을 시험해 보는 것인가? 그래서 더욱 긴장했다. 급한 나머지 이렇게 대답했다: "I dared not contact her(감히 그녀에게 연락할 수 없어요)." 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Hey, young man, you must bravely dash to her(용감하게 한번 부딛쳐 봐!)" 그러자 정말 곤란해졌다. 한동안 어떻게 대답할지 모르고 있다가 돌연 고등학교때 반에서 친구들과 농담하면서 써먹었던 영어문구로 대답했다. 문법이 맞는지 아닌지도 신경쓰지 않고. "O, I dared not contact her, If I did, it would be wrong as wrong can be!(제가 연락할 수 없어요.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장 잘못될 수없을 정도로 잘못된 일일 겁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보고 말한다: "헤이, 조룡, 셰익스피어의 문구까지 알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좋네, 좋아. 과연 북대에 합격할 만하네." 기실 이 문구 "You are wrong as wrong can be!"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대사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고등학교때 농담하면서 상대방이 자주 쓰던 영문이었다. 그래서 그 문구를 알고 있었는데, 재녀의 칭찬을 받다니 더욱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직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이 날의 만남과 인상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네가 이렇게 흥분하고 있지?" 형이 옆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일기를 빼앗아 갔다. "에이, 이게 뭐 그렇게 흥분할 일이야. 나는 자주 그 집에 가는데. 며칠 전에도 왕선충(王先沖, 물리학과 조교)과 함께 그녀집에 가서 차를 마시고 왔는 걸. 그녀는 우리 형제를 칭찬해 주더라." 나는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그럼 왜 나를 안데리고 갔는데..." 그러자 형이 말한다: "어린애가 어딜 낄려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다.

 

1960년 나는 병으로 부모님 집에 가서 한동안 요양했다. 할일이 없을 때 옛날의 사진과 일기를 들춰보았다. 그녀를 생각하니 이미 5년을 못만났다.

 

나의 그녀에 대한 숭배는 그녀의 사업에 대한 집착, 병든 몸으로 그렇게 많은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녀가 29살때 폐결핵을 앓았는데, 그후 근 20년동안,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여건이 얼마나 열악하든, 그녀는 남편과 15개 성을 돌아다니면서 2천여곳의 고건축을 고찰했다. 그리고 근 2천장의 고건축 구조도를 그려냈다. 그녀는 자주 높은 지붕위를 올라가서 고건축의 구조를 연구하고 측량했다. 병마에 시달리는 명문규수로서 얼마나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일인가?

 

생각지도 못하게 이때 그녀를 본 것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대에 입대해서 북경을 떠났고, 그녀가 1955년 사망할 때까지 나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1952년 나는 총정치부 문공단에 배속되어, 다시 한번 청화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병이 이미 위중하여, 자주 병석에 누워있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그녀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때 부끄럼이 많아서, 혼자서 가지는 못했고 호금심을 찾아서 같이 갔다.

 

생각지도 못하게 1955년 해남도에서 연출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녀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한동안은 마음이 아팠다. 부고를 받고 그녀의 치상위원회에 갔는데, 청화대학, 북경대학과 북경의 저명한 학자들이 운집했다. 정말 공전절후의 규모였다. 그때 청화대학에는 아직 여교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식으로 채용된 교수는 아니었지만, 부고에 '겸직교수'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서예작품을 많이 보았는데, 약간은 수금체(瘦金體, 송휘종의 글씨체)와 유사했다. 시원스럽고 예쁜 글씨였다. 그녀 본인처럼. 그녀가 부채에 쓴 <이성장촌추만(李成將村秋晩)>은 2016년 서서냉 가을경매에서 낙찰가가 80.5만위안이었다. 이를 보면 그녀의 서예조예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부친에게 글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내 기억에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그녀의 수채화도 아주 뛰어났다. 그녀가 펜실베니아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은 회화였었다. 그녀는 시집도 한권 출판했는데, 뛰어난 싯구는 당시 젊은이들의 연애편지에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건축학의 조예도 뛰어났다. 양사성과 함께 중국의 고건축을 보호했고, 근 2천폭의 고건축구조도를 그려냈다.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휘와 인민영웅기념비의 설계에도 참여했고, 특히 하부의 대부분의 부조 화식(花飾)은 그녀가 설계한 것이었다. 그녀가 친히 그린 고건축구조도를 보면,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손으로 그렸다. 현대의 CAD를 써서 그려낸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임휘인은 진정 보기 드문 여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