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평민 유수(劉秀)는 황제에 오르면서 왜 "한(漢)"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썼을까?

중은우시 2020. 6. 11. 21:31

글: 심야요재(深夜聊齋)

 

한(漢)나라는 전후로 400년간 지속되는데, 둘로 나뉜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나중의 북송(北宋), 남송(南宋)과는 달리, 서한과 동한의 사이는 끊어져 있다. 중간에 왕망(王莽)의 신(新)왕조가 있었다.

 

다만, 한동안 '신'왕조는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왕망은 황위를 찬탈한 인물로 덕이 없다고 여겨져서, 왕조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왕조의 중후기 당시의 사회 각계층에도 한왕조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비교적 두드러진 것은 유씨종실(劉氏) 종실의 인물들 중에서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비록 그 중 대부분은 가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무제의 증손자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한성제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는 충분히 설명한다. 중국고대의 전쟁에서 군사력의 대비는 승부를 결정하는 한 방면이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문화라는 소프트실력도 왕왕 적을 이기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었다.

 

문화자신방면에서, 누가 일체의 자원을 끌어모아서, 자신이 천명을 받았다고 증명하느냐는 왕왕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이었다.

 

이 방면에서, 평민출신의 유수는 최종의 승리자임에 틀림없다. 동한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그가 어떻게 '정통성'을 건설했는가? 필자는 아래의 3단계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1. 요(堯)를 선조로, 유방(劉邦)을 조상으로...

 

유수는 한고조 유방의 9대손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대에 이르러, 그저 현령(縣令)을 맡았을 뿐이다. 더욱 비참한 일은 9살때 유수는 고아가 되고, 숙부가 그를 길렀다는 것이다. 그는 일개 평민이 된 것이다.

 

유수가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왕망, 공손술(公孫述), 외효(隗囂)등이 한때 그에게 가장 골치거리인 적수였다. 다만 이들은 선전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은 유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과 비교하자면, 평민출신의 유수는 유방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 뿐아니라, 스스로 요의 후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는 전설상의 상고제왕이다. 유수가 살았던 때로부터 최소 2,300년은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들간에 어찌 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언래, 이것은 유수가 처음 생각해낸 게 아니다. 그의 조상인 유방이 '천재적으로 발명'한 것이다.

 

유방은 특별히 자신을 선전하는데 능했다. 그의 용모특징은 '메부리코에 용안을 지녔고, 아름다운 수염이 있었으며, 왼쪽 다리에 72개의 점이 있었다."

 

유방은 여론조작을 위하여, 일가를 총동원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생부는 유태공이 아니라, 한 마리 용이다.

 

그의 모친이 한번은 굼 속에 용과 만났고, 그 광경을 유태공이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교룡이 몸 위에 있었다" 나중에 유방의 모친은 유방을 가진다.

 

유방의 부인은 여치(呂稚)이다. 그녀도 역시 "동남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이 상서로운 구름을 쫓아가서 유방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뿐아니라, 유방은 요도 끌어내서 자신의 선조로 삼았다. 요가 살았던 시대는 당시 사람들에게 완벽한 상고의 태평성세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런 성인군주가 다시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본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후세의 여러 제왕들도 모두 요임금과 연결하려고 노력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유방의 모사들은 정말 <좌전>에서 유씨가 바로 요임금의 후예라는 근거를 찾아낸다.

 

유방이 나무를 심었고, 유수가 그 그늘을 누린 것이다. 유수는 거병한 후, 자신은 서한황실의 인물이라고 포장했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자신에게는 요임금의 고귀한 혈맥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계속하여 자신을 포장했고, 그에 따른 이익을 착실하게 거둔다.

 

당시 하서지구에서 할거하던 두융(竇融)은 원래 유수외 외효의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끝까지 누구에게 투신할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어느 어른이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승요운(漢承堯運), 역수연장(曆數延長)" 한나라는 요의 기운을 이어받았으니, 그 수명이 연장될 것이다.

 

유수는 대성인 요의 후예인데 무슨 망설일 것이 있는가. 그리하여 두융은 출병하여 유수룰 도와 외효를 격패시키고, 스스로 유수에게 편입된다.

 

2. 한(漢)을 '화덕(火德)'이라고 하다.

 

'오덕시종설(五德始終說)'은 전국시대의 음양가인 추연(鄒衍)이 내놓은 이론이다. 역대왕조가 계속하여 교체된 심층적인 원인을 해석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이 학설에 따르면, 매 왕조는 '토(土), 목(木), 금(金), 화(火), 토(土)"의 오행에 따라, 오행상극으로 새로운 왕조가 옛 왕조를 이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夏)왕조는 '목덕(木德)'이다. 금극목(金克木)' 금이 목을 이기므로, 그를 대체한 상(商)왕조는 '금덕(金德)'이다. 그리고, '화극금(火克金)'이므로 주(周)나라는 화덕(火德)을 대표한다. 그리고, '수극금(水克金)'이므로, 진(秦)왕조는 '수덕(水德)이다.

 

이런 관계로 유추하자면, 진왕조를 대체한 한왕조는 마땅히 '토덕(土德)'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유방은 진왕조의 합법성을 부정한다. 한왕조야말로 주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漢)'왕조는 '수덕(水德)'으로 정한다. 다만 한무제때, 동중서(董仲舒)등의 건의하에 다시 '토덕(土德)'으로 고친다.

 

서한말기에 이르러,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 나타난다. 이 주장에서는 신구왕조간의 선양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서한왕조의 덕성은 다시 '화덕'으로 고쳐진다. 왜냐하면 '화생토(火生土)'의 순서이므로, 서한의 선양을 받은 왕망의 신왕조는 바로 '토덕(土德)'이라는 것이다.

 

동한이 건립된 후, 유수는 오행상극(목극토)에 따라 동한의 덕성을 '목덕'으로 정하지 않고, 오행상생(토생금)에 따라 동한의 덕성을 '금덕'으로 정하지도 않는다. 서한왕조를 이은 '화덕'이라고 한다. "시정화덕(始正火德), 색상적(色尙赤)"

 

이는 바로 동한은 서한의 국조(國祚)를 계승한다는 것이다. 서한이후의 신왕조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유수는 유방의 후예이면서, 서한을 '조통(祖統)'으로 보았다. 그러면 동한은 당연히 서한과 마찬가지로 '화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한이 단절되지 않았고, 정통의 지위는 유수가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3. 태산봉선(泰山封禪)

 

봉선은 고대 제왕의 제사중에서 가장 융중한 의식이다. 태산봉선은 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봉태산(封泰山)과 봉양보산(封梁父山)의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천자가 봉선의 예를 행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히 자신의 정통성의 최고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태산봉선은 구비해야할 조건이 아주 엄격하다. <사기>의 작자인 사마천에 따르면, '공업(功業)', '덕행(德行)', '부서(符瑞)', '수명(受命)'

 

'공업'의 면에서 보자면 유수는 당연히 문제없다. 전란을 끝내고, 한왕조를 재건했다. '덕행'으로 보더라도 유수는 고대의 제왕중 두드러진 인물이다.

 

그러나 '부서'와 '수명'에서 보자면 이는 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유방과 마찬가지로 그저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내면 될 일이다.

 

건무32년 즉 기원56년, 광무제 유수는 봉태산, 봉양보산을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의 황권의 합법성, 합리성, 권위성을 선언한다. 동한왕조가 대통일왕조로서 강성한 이미지를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다.

 

유수 이전에 이런 일을 했던 사람은 오직 3명 뿐이다: 진시황, 호해, 그리고 한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