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西漢)에는 왜 재혼한 황후가 많았을까?
글: 진사황(秦四晃)
열심히 고증해본 것은 아니고 개인의 유한한 학문으로 추측해보면, 우리의 진,한 심지어 그 이전시기에는 남녀 및 혼인관계가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것같다. 예를 들어, 진시황 영정의 모친 조희(趙姬)는 여불위, 남편인 자초(子楚), 그리고 노애(嫪毐)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았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은 과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은 적이 있고, 나중에는 부잣집 천금 여치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런 일들은 현재라 하더라도 스캔들이 될 것이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다.
호기심으로, 아예 서한황후들의 혼인관계를 살펴봤더니, 과연 인증이 된다. 황후가 되어 봉관을 쓴 여자들 중에서 재혼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1. 한고조의 박희(薄姬)
그녀는 한고조때 황후는 아니었다. 다만 아들 한문제때, 당당하게 대한왕조의 황태후가 된다. 그래서 황후의 반열에 넣기로 한다.
박희는 원래 사생녀였다. 진나라때, 그녀의 부친은 일찌기 위나라왕족인 한 여자와 사통했고, 혼외자로 그녀를 낳는다. 천하에 진나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위왕실의 후예인 위표(魏豹)는 복국하여 왕을 칭한다. 위씨 아가씨와 사통했던 박씨성의 남자는 일찌감치 죽었고, 사생녀를 낳은 위씨아가씨는 이때 이미 아줌마였다. 사람들은 위온(魏媼)이라고 불린다. 그녀는 견식이 있어 딸을 위왕궁으로 보낸다. 교묘하게도,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자 관상가 허부(許負)가 박씨를 보뎌니 그녀가 장래 황제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당시는 초한간에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천하가 누구에게 귀속될지는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 위왕표는 자신의 궁중에 향후 황제를 낳을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듣자, 이는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면 바로 그가 황제의 부친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원래 한왕 유방과 힘을 합쳐서 항우를 치고 있던 위표는 즉시 자신의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그는 유방을 버리고, 중립을 선언하며, 박씨가 사생녀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취하고 총애한다. 그리하여 박희의 첫번째 남편은 바로 위왕표이다.
위표의 꿈은 달콤했지만, 불행히도 유방의 계하수(階下囚)가 된다. 위나라는 한왕 유방에게 귀속되고, 위표의 여인도 모조리 한왕 유비의 직염방(織染坊)으로 들어간다. 여기에 당연히 박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한고조 유방에게는 영웅의 뜻이 있을 뿐아니라, 천하의 '명화(名花)'는 모두 거두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느 날 유방은 틈을 내서 관부인(管夫人)과 조자아(趙子兒) 두 미인을 데리고 영대(靈臺)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관부인과 조자아가 박희를 언급했는데, 박희가 옛날에 그녀들과 약속하기를 세 사람중 누구 하나가 먼저 귀해지면, 다른 자매들을 끌어주는 것을 잊지 말자고 했다고 약간은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유방은 눈앞의 두 여인이 너무 세리(勢利)를 쫓는데 반감을 갖고 박희를 동정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를 한번 품어주기로 겨ㄹ정한다. 그날 밤 박희를 불러서 시침하게 한다. 그런데, 박희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어젯밤 꿈에 용이 첩의 가슴에 있었습니다!" 유방은 그저 웃으면서 말한다: "그건 네가 귀하게 되려는 징조이다."
운명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바로 이 한번의 시침으로 박희는 용종을 임신한다. 다음 해에 유방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는데 그가 바로 한문제 유항(劉恒)이다.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적인 면도 있다. 몇년 후, 여씨의 세력이 몰락하고, 유항은 중신들의 추대로 황제에 오른다. 황제의 모친이 된 박희는 졸지에 존귀한 몸이 된다. 대한의 황태후로 오른다. 이는 한 사생녀의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2. 한경제의 왕황후
왕황후는 괴리(槐里) 사람이다. 모친인 장아(臧兒)는 일찌기 연왕(燕王) 장도(臧荼)의 손녀이다. 그녀는 괴리의 남자 왕씨에게 시집갔고, 그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낳는다. 왕신(王信), 왕지(王娡), 왕아후(王兒姁). 왕씨가 병사하고 장아는 셋을 데리고 장릉의 전(田)씨에게 시집간다. 거기서, 전분(田蚡), 전승(田勝)의 두 아들을 낳는다.
자아는 처음에 큰딸 왕지를 김씨에게 시집보낸다. 그녀는 딸 김속(金俗)을 낳는다. 우연한 기회에 모친이 길을 가는데, 점치는 사람이 그녀의 슬하에 있는 두 딸의 명이 아주 좋다고 말한다. 돌아와서 그녀는 바로 이미 시집가서 아이엄마가 된 딸을 이혼시키려 한다. 남편은 당연히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아는 억지로 딸을 끌고와서 그녀를 동궁(東宮)에 들여보낸다.
왕지는 이미 결혼했던 여인이고, 동궁에는 예쁜 여자들이 널려 있으니 그녀에게 기회가 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시 일은 알 수가 없다. 예쁜 여인들이 무더기로 있는데, 유계(劉啓)는 굳이 '중고품'인 왕지를 좋아한다. 왕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유계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낳는다.
한문제가 죽고, 유계가 즉위한다. 그리고 왕지는 황후에 오른다.
왕황후는 아들 유철이 황제에 오른 후 황태후가 된다.
3. 한선제 허황후
허평군(許平君)은 한선제 유순(劉詢)의 조강지처이다. 그러나 유순에 있어서 여전히 재혼여인을 취한 것이다.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와 실질적인 접촉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유순은 처음에 유병이(劉病已)라고 불리웠다. 할아버지 즉 한무제의 태자 유거(劉據) 사건에 연루되어 민간으로 내려가고, 운명이 기구했다. 나중에 한소제의 관용으로 궁안의 액정(掖庭)살게 된다. 그를 황증손(皇曾孫)이라 부른다.
당시 허평군의 부친 허광한(許廣漢)도 액정에서 근무했고 황증손과 같이 살았다.
허평군은 일찌기 부친에 의해 내자령(內者令) 구사씨(歐俟氏)의 아들과 혼약을 했다. 즉 그녀는 이미 미래에 시집갈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집가는 날 남편이 급사한다. 중국의 민간에서 이런 상황에게 허평군과 같은 여인들에게 붙여주는 명칭이 있다. 바로 "망문과(望門寡)"이다. 비록 그 남자의 손가락도 닿지 않앗찌만, '예'로 보면 여전히 기혼자의 반열에 드는 것이다.
졸지에 딸이 기혼녀가 되어 버렸다. 허광한은 그녀의 미래를 위해 걱정하고 있었다. 이때 액정령 장하(張賀)도와준다. 허평군과 황증손 유병이를 맺어준 것이다. 허광한의 부인 즉 허평군의 엄마는 유병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골치거리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반대한다. 허광한은 그러나 한눈에 황증손이 마음에 들었고, 자신이 나서서 딸을 황증손과 결혼시킨다.
'망문과'였던 허평군은 1년후에 황증손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도 나중에 황제에 오른다. 그가 바로 나중의 한원제 유석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함어번신(咸魚翻身)의 이야기이다. 한소제가 붕어하고, 즉위한 창읍왕 유하는 황당했다. 대장군 곽광의 주재하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황증손 유병이가 이름을 유순으로 바꾸고 황제에 옹립된다. 허평군은 처음에 첩여로 봉해졌다가 나중에 한선제의 고집과 노력으로 평민여자였던 허평군은 대한의 황후에 오른다.
4. 한선제 왕황후
그녀도 또 하나의 '망문과'인 황후이다.
이 왕황후는 허황후가 죽은 후에 한선제가 곽황후를 폐하고, 황후로 발탁한 여인이다. 그녀의 이런 성공은 부친에게 힘입은 바 크다. 그녀의 부친은 투계주구의 인물이다. 왕봉광(王奉光)은 젊어서 놀기 좋아했고, 도박을 즐겼다. 한선제가 민간에서 떠돌 때 두 사람은 알았고, 서로 자주 만났다.
소녀시대에 부친 왕봉광은 여러번 딸을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매번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죽거나 시집가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왕씨 아가씨는 한번 '망문'한 과부가 아니라, 여러번 '망문'한 과부였다.
방법이 없었다. 부친 왕봉광은 그녀를 궁으로 보낸다. 다 안된다면 황제에게 보내자.
황제의 후궁은 왕씨 아가씨의 무대였다. 몇년 지나지 않아 한선제는 그녀를 첩여에 봉한다. 허황후, 곽황후 두 황후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폐위되자, 왕씨아가씨는 황후에 오른다.
결과적으로 보면, '망문'한 과부는 확실히 기운에 너무 센 것이다. 황제가 아니면 그녀들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한원제 왕황후
이 왕황후는 너무나 유명하다. 한원제의 황후이고, 한성제의 생모이다. 왕망(王莽)의 고모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왕정군(王政君)이다.
그녀도 또 하나의 '망문과'이다. 소녀 왕정군은 부친 왕금(王禁)에 의해 혼약이 정해진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일찍 죽는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두번째는 이름있는 사람이다. 동평왕(東平王)의 첩으로 보내려 한. 그러나 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부로 들어가려 할 때 동평왕이 죽어버린다. 왕금은 장탄식을 한다: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인이 나이는 들어가는데 시집은 못가고 있다. 왕금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하루는 점을 쳐본다. 그런데 자기의 딸이 귀하기 그지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디가 가장 귀한가? 천자의 황궁이다. 왕금은 그제서야 깨닫고는 그녀에게 여러가지 재주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돈을 아끼지 않았다. 글을 읽게 해주고, 금을 타게 하고, 여러가지 기능을 익히게 했다. 18살이 되는 해 그는 딸을 궁으로 보낸다.
태자 유석은 원래 총비가 있었다. 사마양제. 아쉽게도 입궁하자마자 질투를 받아 일찌감치 병사한다. 아끼는 비가 질투를 받아 죽자, 유석은 애통해하며 침식을 폐한다. 게다가 그는 분노하여 여색을 가까이하는 것을 거부한다. 한선제가 그 말을 듣고, 짐은 손자를 원한다 대한왕조에 어찌 후계자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한선제는 황후에게 적절한 여자를 고르게 한다. 그러나 유석은 이때도 화가 식지 않은 상태였고 비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액정에서는 용모가 평범했던 왕정군이다. 그날밤에 그녀는 태자궁의 내전으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한번의 잠자리로 바로 임신한다. 그리고 나중의 풍류황제 유오를 낳는다. 한선제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왕정군은 태자비가 된다.
황룡원년(기원전49) 한선제가 붕어하고, 유석이 즉위하니, 태자비 왕정군은 먼저 첩여에 봉해지고, 3일후 황후에 오른다. 형제자매 조카들도 모조리 관직을 얻는다. 이 왕황후때문에 왕씨세력이 나중에 거대하게 된다. 조카 왕망은 황위를 찬탈하여 신왕조를 개창하기 까지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서한의 황제래야 8,9명인데, 재혼한 황후가 절반이 넘는다. 만일 당시의 남녀관계에 자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결혼에 실패한 여인들이 황궁에 들어와서 최종적으로 황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고대인들의 남녀관계가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