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벌주(武王伐紂)가 일어난 해는?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무왕벌주는 중국역사상 경천동지할 대사건이다. 당시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과 강자아(姜子牙, 즉 강태공)가 수만의 호분(虎賁)을 이끌고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로 쇄도해 들어간다. 당시, 상나라의 주력은 동이(東夷)를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주왕(紂王)은 어쩔 수 없이 17만의 노예를 무장시켜 성을 나와 주나라군대와 맞서야 했다.
그러나, 상나라는 노예에게 엄격했고, 걸핏하면 그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에게 제사지내는 희생으로 썼다. 분명히 이들 노예는 상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을 터이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자, 노예들은 창끝을 거꾸로 겨누어, 주나라군대를 인도하여 조가로 쳐들어간다. 주왕은 결국 자결하고, 500년에 걸친 상왕조는 이렇게 멸망한다.
왜 무왕벌주는 경천동지할 대사건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바로 주나라가 전면적으로 상나라의 잔혹한 제도를 개혁하여, 사람의 가치를 중시하고 다시는 사람을 대규모로 제사지내는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전투는 노예해방운동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상나라의 멸망은 주나라의 예제문명(禮制文明)의 건립을 의미한다. 혈연과 주례(周禮)를 유대로 하여, 주나라는 대소귀족에게 전국을 나누어주어 각지에 분봉했다. 그리하여 하군이민夏君夷民)의 국면이 형성된다. 그후, 이들 분봉받은 제후들은 계속하여 대외확장을 하여 결국은 하나로 뭉쳐진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의 기본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중국은 여전히 무왕벌주가 가져온 영향을 바고 있다. 바로 "주수구방(周雖舊邦),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중국을 오랫동안 곤혹스럽게 했다. 목야지전(牧野之戰)이 발생한 확실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 사서에 따르면, 중국에서 기년(紀年)이 확립된 것은 기원전841년이다. 당시 유명한 '국인폭동'이 일어난다 주나라사람들이 주려왕(周厲王)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그를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국정은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공동으로 집행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공화행정(共和行政)"이다. 그리고 공화행정은 중국에서 기년을 확실히 한 시작점이 된다. 이후 중화문명의 기록은 다시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왕벌주의 확실한 시간이 언제인지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분명히 알지 못했다. 어쨌든 연대가 오래 되었고, 많은 문헌도 유실되었다. 동시에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겪고, 항우의 화소함양(火燒咸陽)도 격따보니 사료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를 편찬할 때, 사마천은 그저 확실한 시간을 공화행정까지만 소급하였다. 그 이전은 힘이 닫지 않았다.
다만, 일찌감치 서한시기부터 중국인들은 성상학(星相學)을 통하여 무왕벌주의 시간을 추산해 왔고, 기원전1122년일 것이라고 말했다. 근대학자인 양계초(梁啓超)는 기원전1027년으로 추산했다. 일본의 천문학자인 신조신조(新城新藏)는 기원전1066년설을 내놓는다. 그 외에 당란(唐蘭)은 기원전1075년설을, 정산(丁山)은 기원전1029년설을, 장홍쇠(章鴻釗)는 기원전1055년설을 내놓았다. 볼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무왕벌주의 연대에 대하여는 최소한 44종의 학설이 존재하는데, 가장 빠른 것은 기원전1130년이고,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1018년이다. 앞뒤로 112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를 보면, 무왕벌주가 도대체 언제 일어난 것인지는 이미 중국인들을 오래 동안 괴롭혀온 이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흠(劉歆)이후, 시간은 200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전기가 나타난다. 1976년, 섬서성 임동현의 한 촌민이 밭을 갈다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기(銅器)를 하나 발굴한다. 그 후, 이 일은 금방 국가에 알려지게 되고 고고전문가들이 달려왔다. 현장에서 감정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현재 중국의 구대국보(九大國寶)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궤(利簋)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왕벌주궤(武王伐紂簋)"라고도 한다/
비록 3천여년이 흘렀지만, 이궤상의 명문(銘文)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학자들의 최종적인 해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왕정상(武王征商), 유갑자조(唯甲子朝), 세정(歲鼎), 극혼숙유상(克昏夙有商), 신미(辛未), 왕재란사(王在闌師), 사유사이금(賜有事利金), 용작단공보존이(用作檀公寶尊彛)."
이를 보고 학자들은 탄성을 내지른다. 이 물건은 무왕벌주의 직접적인 증거물이니 국보중의 국보이다. 금문을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무왕이 상나라를 정멀한다. 갑자일의 아침에 하늘에 세성(歲星)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를 거둔다. 하룻저녁만에 상나라의 땅을 점령한다. 신미일(8일후), 왕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리고 좋은 청동을 우사(右史)에게 내려, 예기를 제작하여 단공을 기념토록 했다."
여기의 '유사(有事)"라는 것은 기실 관직명이고, 우사(右史)이다. 주나라의 관직제도에 따르면, 우사는 군왕의 곁에서 사건을 기록한다. 이 우사의 이름이 바로 리(利)이다. 그래서 이 궤의 이름을 이궤리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 쓰려 있는 단공은 바로 주나라의 조상인 고공단보(古公檀父)를 가리킨다.
그외에 천문학자들은 이 짧은 33글자에서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캐치한다. 그것은 바로 목야지전이 일어난 확실한 시간이다.
소위 "세"는 바로 '세성'으로 목성(木星)을 가리킨다. '세정'이라 함은 목성이 하늘 가운데 위치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상당히 특수한 천문현상이다. 1996년 국가중점프로젝트인 하상주단대공정의 계산에 따르면, 상나라와 주나라가 교체되는 '세정'은 개략 기원전1046년이다. 심지어 이 시간은 날짜까지도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즉 1월 9일이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탄소14측정에서도 이 점은 증명된다.
그러므로 무왕벌주로 일어난 논쟁은 2000여년간의 추측끝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중국은 이를 통해 세계를 선도하는 기록을 갖게 된다. 그것은 신사(信史)의 시간기록이다. 중국의 확실한 신사시간은 기원전841년에서 기원전10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고대이집트, 고대바빌로니아, 고대인도문명을 돌아보면 그들은 중국처럼 남다른 '기록벽'은 없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사시간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외에 고대이집트, 인도, 바빌로니아의 문자는 많은 경우 해독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사를 확인하는데 곤란이 더 많아지게 된다.
고대 그리스문명은 너무 비참하다. 문명은 겨우 기원전800년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이것도 '약'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중국을 돌아보면, 설사 이궤연구로 돌파구가 마련되기 전에도, 신사시간은 기원전841년이었다. 기원전499년이 되어서야 그리스에서는 비로소 문자기록이 나타나게 된다.
비록 그러하지만, 서방학자들은 일찌기 오만한 태도로 중국문명을 부인해 왔다.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에 심지어 상왕조조차도 부인당했었다. 하물며 하왕조와 삼황오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이궤의 출현으로 서방학자들은 할 말이 없게 되었고, 서방중심주의는 한방을 크게 얻어맞았다.
지금 이궤는 중국국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출국전시가 금지된 문화재이다. 이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국보일 뿐아니라, 중국의 중요한 시간점을 기록한 '일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에게 계속하여 일깨워준다. 중화민족의 조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중화문명은 얼마나 유구한지.
이궤를 제외하고도 사모무정(司母戊鼎), 사양방존(四羊方尊)등 국보도 마찬가지로 '일력'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국보는 실제로 중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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