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광 vs 상홍양: 한무제의 두 탁고대신은 왜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그때는 염철회의 대변론 후의 다음 해였다. 즉 한소제 원봉원년(기원전80년) 구월, 잘나가던 상홍양(桑弘羊)은 시종 자신의 경력과 공로가 모두 곽광(霍光)보다 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치적인 지위는 곽광보다 낮은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사탄상(蛇呑象) 즉 뱀이 코끼리를 삼킬 정도이다" 상홍양은 그리하여 연왕단(燕王旦)과 한소제(漢昭帝)간의 황위쟁탈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역사상 이를 "연왕지변(燕王之變)"이라 부른다. 그는 이로 인하여 일가족이 처형된다. 일대의 '경제의 왕"은 이렇게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사실상, 기원전87년 상홍양은 수속도위(搜粟都尉)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한 후, 곽광, 상관걸(上官桀)등 4명이 한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나이어린 한소제를 보좌하게 된다. 그후 적극적으로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며, 경제에 쏟던 마음을 모조리 정치투쟁에 쏟게 된다. 그는 모든 정력을 수보대신(首輔大臣)인 곽광과의 대결에 쏟았고, 크게 일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열(慘烈)했다.
아쉽게도 상홍양의 정치적인 운용은 경제에서의 운용처럼 그다지 심후하지 못했다.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을 취하고 장점을 보완하는 식이었다. 그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런 명구가 떠오른다: "어찌할 것인가 꽃이 지는 것을. 사람의 머리도 떨어지는 꽃과 같이 땅에 떨어진다"는 결과는 충분히 예껸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그가 일생동안 '이(利)'를 추구한 결과이다." 사적인 욕심이 팽창하다보니 이익에 눈이 멀었고, 결국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한무제가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윤대조(輪臺詔)를 내린 후, 3년이 지나서, 즉 후원2년(기원전87년) 불행히도 순유도중에 붕어한다(진시황도 마찬가지였다). 한무제가 죽은 후, 총명하고 영리한 8살짜리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이 황제에 오른다. 그가 바로 한소제이다(한무제는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그를 후계자로 세우면서 생모를 죽인다. 즉 구익부인을 죽인 것이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기본적으로 정무를 돌볼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무제는 유조로 곽광, 상홍양, 김일제(金日磾), 상관걸, 전천추(田千秋)를 '탁고오대신(託孤五大臣)"으로 삼아 어린황제를 도와 군국대사를 처리하고 공동으로 조정을 장악하게 했다. 상홍양은 유조를 받들어 보정대신이 됨과 동시에 부국상(副國相)급인 어사대부로 승진한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가장 가까운 대신이지만, 왜 이후 두 사람이 반목하고 원수가 되었을까? 다른 게 아니라, 모든 것은 이익의 재분배에 있다. 소위 말하는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먼저 이 몇 사람의 정치적 배경부터 설명하기로 한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그들의 투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곽광은 한소제의 수보대신이다. 집안배경도 대단하다. 바로 곽거병(霍去病)의 배다른 동생이다. 십여세때 이미 궁금(宮禁)을 드나들었다(그 유명한 곽거병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일처리를 잘 했던 그는 한무제가 첫손으로 꼽는 총애하는 신하였다. 한무제의 병이 위중할 때, 직접적으로 곽광의 이름을 거명하며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것을 본받아 한소제를 보좌하라고 말한다. 즉 생사여탈권의 최종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니, 바로 '그림자황제'가 된 것이다.
이런 인사안배에 대하여 곽광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안배경, 일처리방법 그리고 총애정도를 볼 때 그를 제외하면 이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곽광은 항상 일처리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정내에서 한결같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그런 결정을 듣자 마음 속으로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마음에 없는 겸손을 보인다. 저는 재주가 부족하니 그런 큰 임무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나서 미녀를 보고도 곁눈질 하지 않고, 말을 기르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부마도위 김일제를 주공역할을 맡을만한 사람으로 추천한다(바로 백전백승의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흉노 휴도왕의 태자이다)
총명한 흉노인인 김일제는 당연히 곽광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당연히 멍청하게 속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웃기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매끄러운 말솜씨로 자신은 흉노인이고, 대임을 맡을 수 없으며, 오로지 곽광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으며, 만일 곽광이 자신을 조수로 쓸 생각이 있다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돕겠다는 등등의 말을 한다. 그리하여 마음에도 없는 겸양이 이어진 다음에 곽광은 고명대신 5명중 수석대표가 된다. 주요 의사결정권자는 바로 그인 것이다.
당시 이 5명의 대신중에서 '외국인'인 김일제는 확실히 곽광을 따랐고, 탁고이후 다음해에 사망한다. 전천추는 비록 승상의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으며 능력도 평범했다. 그는 그저 '화사료(和事佬)'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염철회의때 그는 바로 화사료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일에 관여하지 않는 인물이고, 매번 곽광이 하자는대로 했다. 그래서 권력투쟁 방면에서 실제로는 곽광, 상홍양, 상관걸의 세 명이 남게 된다.
상홍양은 한나라의 돈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의 경력과 공로는 커서 곽광이 수보대신이 된데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하물며 그들 둘은 경제정책등에서 심각한 이견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말을 기르던 업무를 맡은 미앙구령(未央廐令) 출신의 상관걸은 말을 잘 기르는 일은 하지 않고, 정치적인 야심도 컸고, 궁중내에 인맥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보쟁탈전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심지어 궁중정변을 일으켜 한소제를 폐위시키고자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상관걸과 상홍양은 연맹을 맺어 곽광에 대항하게 된다.
상관걸을 비록 말기르던 출신이지만, 정치적인 지혜가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무제가 한번은 병든 몸으로 말을 보러 갔는데, 말이 마른 것을 보고, 상관걸이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질책한다. 그러자 상관걸을 기민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황상의 병을 걱정하다보니 말기르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말이 마르게 된 것입니다. 한무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상관걸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시중(侍中), 태복(太僕)으로 승진시킨다. 한무제가 붕어할 때는 다시 좌장군(左將軍)으로 승진해 있었다.
이상의 정치적 배경을 분석해보면, 황권과 행정권의 귀속과 재분배를 둘러싸고 승부가 결정될 때까지 정치투쟁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모주석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있는 곳에는 좌, 중, 우가 모두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붉은 물결이 있다.
전천추와 김일제 두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그냥 중간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력을 집중하여 좌우 양파를 보기로 하자. 상관걸, 어사대부 상홍양이 수보 곽광과 대항하는 것이다.
원래는 같은 탁고대신이고, 상관걸, 상홍양과 곽광은 무슨 숙적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이익재분배와 관련된다. 모순이 격화될 때 이익의 국면이 재분배되는 것은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원인으로 이 세 명의 정계의 거물들이 '내분'을 벌이게 되었을까? 모든 것은 '검은 돈을 나누는데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分臟不均)'
원래 상관걸과 곽광은 사돈간이다. 두 집안은 모두 황실과 이런저런 관련이 있다. 친상가친(親上加親)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친밀한 관계임에도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다니, 이를 보면, 그들이 싸우던 이익이 얼마나 크고 생사에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上官安)은 곽광을 딸을 처로 맞이한다. 동시에 상관안에게 딸이 있는데, 한소제의 언니인 악읍공주(鄂邑公主)가 중간에 나서서 직접 입궁하여 황후가 된다. 집안이 세력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정치적 자원은 원래 천하를 횡행하기에 충분하다. 아쉽게도 사돈인 곽광은 그들 집안이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문제는 화로 황제의 누나의 애인에게서 벌어진다. TV드라마보다 더욱 막장이다. 원래 악읍공주에게는 애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정외인(丁外人)이다. 악읍공주는 자신의 손녀를 황후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이에 감격한 탁고대신 상관걸도 그냥 있지 않았다. 소위 애옥급조(愛屋及鳥)이다.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즉시 자신의 사돈인 수보 곽광을 통하여 정외인을 후로 봉하게 하려 한다. 이를 통해 악읍공주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가족이고, 좋은 것은 남에게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쉽게도 상관걸은 계산을 잘못 했다. 거절을 당하게 된다. 그는 사돈인 곽광도 당연히 호응해줄 것이라 여겼었다.
원칙을 견지하는 곽광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정외인은 확실히 철두철미한 '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주의 진정한 남편도 아니다. 기껏해야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간부(姦夫)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공주의 남편은 제후로 봉한다'는 원칙에 따라 후로 봉해줄 수 없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을 곽광이 뒤집어 버렸다. 수보대신인 곽광은 시종 '애인'은 후의 작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는 후의 작위를 그저 덤핑판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작위는 가치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제도가 흐트러진다.
이런 식으로 체면을 봐주지 않자, 상관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는다. 곽광이 뭐 대단한가. 나는 전황제때 이미 관직이 태복에 이르렀고, 지위도 너보다 높았다. 지금 손녀가 순조롭게 황후에 올랐고, 너와 나는 모두 장군이다. 단지 너는 명목상의 수보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나를 무시하다니, 작위가 네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니, 상관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곽광의 이번 거절은 정치적 부작용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곽광에 있어서, 이런 방법으로 정적의 반응을 떠보려 했던 것일까? 역시 알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이런 자그마한 일로 상관걸은 곽광에 큰 불만을 갖게 된다. 두 집안은 이때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갈등이 겹쳐지고 결국은 서로 창과 칼을 들이밀며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려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연히, 이 두 집안이 싸우는데, 상홍양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나중에 여기에 끼어들었다가 목숨까지 잃게 되었을까? 이는 결국 '이익'때문이다. 결국은 '탐욕때문에 모두 잃는다.' 가장 고귀한 목숨까지도.
그렇다면, 상홍양은 어떻게 곽광타도의 진영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그 자신이 곽광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한제국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심지어 한무제까지도 그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경력과 공로는 모두 곽광보다 위라고 여겼다. 곽광은 그저 황실과의 인척관계와 아부로 고위직에 오른 것이 아닌가? 국가에 대한 공헌을 따지자면 그는 나에 비교할 수조차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홍양은 자신의 영향력을 가지고 관직을 팔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관직을 주려고 했는데, 곽광때문에 저지당한다. 이 점은 상관걸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계산을 잘 하는 상홍양은 아주 불쾌해진다. 상홍양과 상관걸은 공통된 강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힘을 합쳐서 곽광에 대항하는 정치연맹을 맺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포스트 한무제시대'에 3명의 정치적 영향력과 웅심발발한 탁고대신들간에 이익재분배를 놓고, 결국 대립하는 양파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권력을 위해 크게 한바탕 싸우게 된 것이다. 상홍양과 상관걸은 참열한 '궁정정변'을 통해 상대방을 피로 씻으려 한다.
이 커다란 궁중정변이 바로 '연왕지변'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왕단이 중신 상홍양과 상관걸의 지지를 받아 한소제 유불릉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역사의 쿠데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