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명조지전(鳴條之戰): 하(夏)나라는 왜 급속히 멸망했는가?

중은우시 2019. 9. 25. 12:17

글: 과기대환단(過期大還丹)


들어가는 말


꿈(夢)은 신비하며 허환(虛幻)하다. 꿈 속의 모든 것은 잡을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신비막측한 꿈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서로 다른 꿈은 인류에게 무엇을 예시하는 것일까?


<설문해자>에서 꿈을 이렇게 해석한다: "잠들면서 느끼는 것(寐而有覺者)"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꿈은 인류 일상생활의 연속이다"라고 하였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는 "꿈은 일종의 억압받는 바램이 변형을 거쳐서 만족을 얻는 것이다."


꿈에 대한 해석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같지 않았다. 설사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은 인류가 꿈의 형성 매커니즘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모호한 인식이 존재한다. 꿈은 여전히 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꿈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한 나라를 꼽으라면 중국에 확실히 그 중 하나이다. "꿈"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아주 많다. 통계에 따르면, 이십오사중에 모두 800여개의 '몽(夢)'자가 나온다. 이는 엄숙한 역사에 약간의 신비와 낭만을 보태는 동시에, 화하문명중에서 아주 독특한 "꿈"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1. "역사제일몽(歷史第一夢)"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양일상투(兩日相鬪)"의 꿈은 왜 '역사제일몽'이 될 수 없는가?


많은 사람들은 <사기>에 기록된 "무정몽전설(武丁夢傳說)"이 꿈에 관하여 비교적 믿을만한 최초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제일몽'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기실 일찌기 <사기>이전에 <여씨춘추.신대람>에는 상나라 무정의 하걸(夏桀)과 관련한 기이한 꿈 이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伊尹又复往视旷夏,听於末嬉。末嬉言曰:“今昔天子梦西方有日,东方有日,两日相与斗,西方日胜,东方日不胜。”伊尹以告汤。商涸旱,汤犹发师,以信伊尹之盟。故令师从东方出於国西以进。未接刃而桀走,逐之至大沙。身体离散,为天下戮。


위의 기록에 따르면, 성탕(成湯)이 하(夏)를 정벌하기 전에, 하걸은 일찌기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양일상투(兩日相鬪), 서일승출(西日勝出)"의 기이한 꿈이다. 그리고 이 꿈은 총애하는 후궁 말희가 들었다. 그리고 말희는 하읍(夏邑)에 간첩으로 가 있던 이윤(伊尹)에게 말한다. 이윤은 말희에게 그 꿈에 대하여 들은 후 기뻐서 날뛰었다. 그리고 성탕에게 말한다. 하걸을 토벌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성탕은 그리하여 가뭄의 재해를 입은 것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대군을 보내어 우회하여 하읍 서부를 기습한다. 동서 양쪽에서 협공하자 하나라군대는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궤멸했고, 하왕조는 멸망한다.


<여씨춘추>는 역사서가 아니다. 다만 거기에 기록된 내용은 다른 선진시대의 전적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 많다. 오로지 그중에 언급된 '양일상투'의 꿈은 유력한 방증이 없었다. 이는 이 꿈의 신뢰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래서 <사기>에 기록된 '무정몽전설'과의 역사제일몽 다툼에서 영광을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전기는 "청화간(淸華簡)"이라는 증거가 나올 때 이루어진다.


2008년 전국시대의 죽간(竹簡)인 '청화간'이 세상에 나타난다. <상서>와 유사한 전적이 다시 나타나서, 학술사상 장기간 논쟁거리였던 의문점들이 해결될 수 있었다. "양일상투"의 꿈도 이로 인하여 역사상 가장 유력한 증거를 갖게 되었다.


청화간의 <윤지(尹至)>편에 마찬가지로 성탕멸하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원문생략).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윤이 하에서 박(亳)의 땅으로 돌아와서, 성탕에게 말한다: "하왕은 완(琬), 염(琰)의 두 여자만 총애하고, 민간의 질고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라 백성들은 모두 같이 죽자는 심정이다(余及汝偕亡). 그러나 현재 하읍의 하늘에 두 가지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서쪽에 하나는 동쪽에 있다. 다만 동쪽의 징조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라 백성들은 어쩔 수 없어 하고 있다." 성탕이 묻는다: "그럼 지금 하를 토벌하는 것이 좋은가?" 이윤이 대답한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그리하여 성탕은 군대를 우회시켜 하읍의 서부를 공격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하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한다. 하나라는 이렇게 멸망한다.


이를 보면, <윤지>와 <여씨춘추>의 기록은 많은 부분에서 부합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동서에 두 개의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동쪽의 징조가 서쪽의 징조만 못했다."는 천상(天象)을 묘사하고 있다. 단지 <윤지>은 직접 본래의 의미인 "상(祥, 이상한 징조)"이라고 표현했고, <여씨춘추는 이상한 징조를 두 개의 태양이라고 한 것이다.


<윤지>는 이학근 선생의 판단에 따르면 <상서(尙書).상서(商書).탕서(湯誓)>와 관련이 있다. <탕서>에는 "시일갈상(時日曷喪), 여급여개망(予及汝皆亡)"이라는 기재가 있다. 그 중의 '여급여개망'은 <윤지>의 "여급여해망"과 문구의 양식이 완전히 일치한다. 이를 보면 양자간의 관련정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판단해보면, <탕서>의 '시일'과 <윤지>의 '서상(西祥)'은 같은 이상한 징조를 서로 다르게 부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라만중들은 이를 가지고 하걸을 비유했다. <윤지>의 "상"은 태양으로 봐야 한다.


두 해가 나란히 떴다는 천상은 과학상으로 '가일(假日)'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지 우연한 광학현상일 뿐이다. 다만 고대에 이런 현상은 말 그대로 '흉조(凶兆)'였다. 그리고 상고시대에 제왕이 꿈을 가지고 점을 치는 것(祈夢占卜)도 아주 중요하고 자주 볼 수 있는 점복(占卜)활동이다. 그러므로 비록 <윤지>에는 다른 증거가 없다. 다만, '양일상투'의 기원은 하걸의 '기몽(祈夢)'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할 것이다.


<윤지>는 <상서>와 같은 류의 고문이다. 이는 '아주 믿을만한' 역사서이다. <여씨춘추>에 기록된 '양일상투'의 꿈과 <윤지>의 기록은 서로 확인이 된다. 그래서 신뢰성이 아주 높아진다. 현재 다시 '역사제일몽'이 어느 것일가를 따진다면 필자의 생각으로 하걸의 '양일상투'꿈이 마땅히 차지해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의문이 겹겹인 성탕벌하(成湯伐夏)


과거의 학자들은 '성탕벌하'의 역사를 연구할 때 일반적으로 '양일상투'의 꿈은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꿈의 존재나 성탕이 우회기습전략을 취한 것이 '서일승동일'의 꿈때문이라고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이윤의 개인적인 정치력과 군사재능으로 돌린다. "상지위간(上智爲間)' 즉 뛰어난 지혜는 간첩을 쓰는 것이다와 '우회돌습(迂回突襲)'의 병법과 이를 성공시킨 이윤을 무성(武聖) 여상(呂尙)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군사모략가가 된다.




확실히 이윤의 재능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만일 '양일상투'의 꿈을 성탕벌하의 역사에서 철저히 버리게 된다면,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이 남게 된다.


이윤은 제대로 된 간첩인가?


이윤은 천신만고끝에 하읍으로 가서 간첩으로 지낸다. 그러나 황급히 박읍으로 되돌아온다. 그 결과 그가 가져온 정보는 단지, "하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민중들은 하걸과 동귀어진하기를 바랄 정도이다"라는 그다지 별볼일 없는 정보였다. 비록 확실히 민심의 향배를 분석하여 하나라를 토벌할 시기가 성숙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지만, 성탕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런 백성의 움직임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따로 적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크게 칭찬한 "상지위간"의 장점이 도대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출병시기의 선택이 적당했는가?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 생산력이 낮았던 고대에, 농업의 지위는 아주 중요했다. 전쟁의 개시시기는 일반적으로 농업의 추수시기가 지난 후로 선택한다. 그때는 식량이 창고에 들어가고 날씨도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병하기 적당한 시기이다. 만일 출병으로 인하여 1년간의 수확을 못하게 된다면, 확실히 그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심지어 민원을 불러일으킬 일이다. 그러나, 여러 전적의 기록을 보면, 성탕이 하걸을 토벌할 때는 마침 가뭄이 든 때였다. 이는 출병의 적절한 시기가 절대 아니다. 심지어 하늘을 거슬러(逆天) 움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탕은 왜 이때 출병하려 했을까? 하나라의 백성들의 원성이 비등하다는 말 한마디로 출병시기에 적합하다고 보고, 또한 이때 출병한 것은 이윤과의 맹약을 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반드시 중요한 요소가 있어서 성탕이 이렇게 급박하게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였을 것이다.


말희가 정말 이윤과 결탁하여 배신했을까?


<국어>, <죽서기년>등 전적에는 모두 하걸의 총비인 말희가 이윤과 결탁하여 하왕조를 배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죽서>에는 심지어 말희가 하왕조를 배신한데 대하여 적합한 이유까지 찾아냈다: 하걸이 완, 염 두 여자를 총애하기 시작한 후, 말희는 총애를 잃었고, 낙(洛)의 땅에 버려졌다.


다만 <죽서>의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믿을만 하지 못하다. 낙지는 하나라의 도성인 짐심(斟鄩)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윤은 하나라의 도성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결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단 버림받은 후궁에게서 무슨 가치있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그 외에 말희가 총애를 잃었다는 것은 오직 <죽서>에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전적에는 그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 심지어 <천문>과 <제왕세기>등의 전적에는 모두 말희와 하걸은 함께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실총설과 배치된다. 그리고 만일 말희가 정말 이윤과 서로 결탁했다면, 성탕벌하에 큰 공을 세운 것인데, 왜 성탕이 그녀를 하걸과 함께 쫓아버리겠는가?


말희와 이윤이 접촉했다는 구체적인 사례는 오로지 <여씨춘추>에 기록된 것뿐이다. 말희가 이윤에게 하걸의 '양일상투'의 꿈을 얘기해주고, 이윤이 이를 가지고 성탕벌하의 시기가 성숙했다고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가지고 말희가 이윤과 결탁하여 하나라를 배반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말희는 이윤에게 하왕조를 토벌할 시기가 성숙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말희의 말은 오히려 이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거나 권하는 내용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말희가 하왕조를 배반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많다.


3. "양일상투"꿈의 진정한 역할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연구과정에서 '양일상투'꿈을 배제해버리고 나면, 여러가지 의문이 나타난다. 그리고 <윤지>가 세상에 나타나면서, 이 꿈의 신뢰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탕벌하의 역사연구에서 왜 이 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하면 새로운 경지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고시대에 "복몽(卜夢)"으로 정치군사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었다.


<여씨춘추>와 <윤지>의 기록에 따르면, 성탕이 우회전략을 택한 원인은 주로 '서일승동일'의 꿈에 순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견해는 현재 다수학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용(杜勇) 선생은 '꿈 하나에 의지하여 전술원칙을 결정한다는 것은 믿을만하지 못한 것이다."


정말 믿을만하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