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충(劉秉忠): 한인으로 쿠빌라이를 도와 남송을 멸망시킨 인물
글: 남몽도주(藍夢島主)
처음으로 "유병충"이라는 이름을 보게 된 것은 <명사>를 읽을 때였다.
<명사.요광효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원공(袁珙)이 처음 도연화상(道衍和尙)을 만났을 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정말 기이한 스님(異僧)이로다. 눈은 삼각형이고, 모습은 병든 호랑이와 같으니, 성격은 반드시 살인을 좋아할 것이다. 유병충류(劉秉忠流)로다." 그런데 요광효는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 짧은 기록에 3명의 중요한 역사인물이 나온다: 첫째, 원공은 원말청초의 유명한 관상가이다. 둘째, 도연화상은 나중에 주체(명성조 영락제)를 도와 성공적으로 황위를 찬탈하게 해준 최고의 군사 요광효(姚廣孝)이다. 셋째는 바로 유병충이다. 그는 비록 <명사>에 이름이 나오지만, 명나라때 사람은 아니다. 다만 원공의 말투로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병충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고, 악인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 유병충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왜 원공은 요광효를 "유병충류"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요광효는 왜 화를 내지 않고 도히려 크게 기버하였을까.
유병충은 원나라초기의 인물로 조적(組籍)은 서주(瑞州)이고, 증조부때 형주(邢州, 지금의 하북성 邢臺市)로 이주한다. 유병충은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조상대대로 요나라의 고관이었다. 증조부때부터는 금나라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관직은 형주절도사에 이른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유병충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17살때, 형대절도사부의 영사(令使)를 지낸다. 다만, 유병충은 이런 하찮은 서기관의 관직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시대를 못만났다고 여긴다. 재능을 가졌지만, 시기를 잘못 만난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관직을 버리고 무안산(武安山)에 은거한다. 천녕사(天寧寺) 허조선사(虛照禪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출가한 기간동안, 유병충은 더욱 독서에 열중한다. 특히 <역경>과 <경세서>의 두 기서를 깊이 연구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그는 천하의 일을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게 되었을 뿐아니라, 그의 신기묘산의 정도는 전대의 제갈량(諸葛亮)이나 후대의 유백온(劉伯溫)에 못지 않을 수준이 된다.
나중에 원세조 쿠빌라이가 현명한 인재를 모집할 때, 유병충은 해운선사(海雲禪師)의 추천으로 금방 쿠빌라이 신변의 제일모사가 된다. 이때 몽골은 아직 중원에 진입하기 전이고, 쿠빌라이도 아직 즉위하기 전이다.
쿠빌라이를 따른 후, 한인으로서, 유병충은 몽골을 도와 남송을 멸망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원나라의 제도를 만들어 주고, 친히 북경성(元大都)의 도시계획을 하고, <역경>의 "대재건원(大哉乾元)"의 뜻을 따서, 몽골의 국명을 "대원(大元)"으로 고친다. 이것이 바로 원나라 국호의 유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병충이 없었더라면, 원나라의 백년기업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병충은 "원나라제국의 총설계사"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병충은 아주 복잡한 인물이다. 한인으로서, 그는 한편으로 한학을 좋아하고 깊이 연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외족을 도와 본국을 멸망시킨다. 그리하여 후세에 좋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유벙충은 또한 아주 간단한 사람이다. 그는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고, 여색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 마음으로 놀라운 큰 사업을 해내고자 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성공해낸다.
유병충은 공헌이 탁월했고, 지위도 높아진다. 그는 쿠빌라이의 신임과 중용을 받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병충이 쿠빌라이를 따를 때 이미 출가한 승려였다. 그는 비록 큰 재주를 지니고 있었지만, 명리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관직, 작위, 봉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오랫동안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쿠빌라이를 곁에서 모신다. 나중에 쿠빌라이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유병충에게 환속하도록 하고, 그에게 좋은 논밭과 집을 내린다. 그리고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두묵(竇默)의 딸과 결혼하도록 한다. 그 외에, 쿠빌라이는 유병충을 광록대부로 삼고, 직위를 태보(太保)로 하여, 중서성(中書省)의 정무를 이끌게 했다.
유병충은 원나라제국에서 아주 잘 살았다. 기이한 것은 그가 59세때, 아무런 병도 없이 죽는다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그 소식을 듣고 아주 비통해 한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곡을 하며 말한다: "유병충은 짐의 곁에서 삼십여년간 충성을 다했다. 그는 조심성있고, 신중했으며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았다. 할 말을 감추지도 않았고, 학문도 싶었다. 짐이 그것을 잘 안다."
유병충이 죽은 후, 쿠빌라이는 그를 태부(太傅)로 추존하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라 한다. 후세에 다시 그를 태사(太師)에 추존하고, 상산왕(常山王)에 추증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한다. 역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독자라면 모두 알겠지만, 이 '문정'이라는 시호는 고대 문신에게 최고의 영예이다. 역사적으로 단지 범중엄(范仲淹), 증국번(曾國藩)등 소수의 공헌이 탁월한 신하들만이 이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원나라를 통틀어, 한인중 삼공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병충 단 1명 뿐이다. 이를 보면 그의 공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유병충은 원나라의 공신이고 영웅이다. 다만 동시에, 그는 한인의 원수이자 배신자이다. 원공은 그를 살인광마(殺人狂魔)라고 여겼고, 후세의 사람들도 대부분 유병충을 민족의 패류(敗類)라고 여긴다. 바로 이런 심리때문에 유병충은 공적으로 따지면 소하, 장량에 뒤지지 않고, 재능으로 따지면 제갈량, 유백온에 뒤지지 않지만, 그의 역사적 지명도는 그다지 높지가 않은 것이다. 명성은 오히려 아주 나쁜 편이다.
기실, 유병충 본인만이 아니라, 그의 조상도 대대로 외족왕조에 봉사했다. 원래 가정은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대하고 심원하다. 그에게 있어서, 요나라건 금나라건, 혹은 원나라건, 자신을 신임하고, 자신을 중용한다면 바로 그의 주군이 되는 것이다. 그는 비록 한인이고, 한족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에게는 민족관념은 전혀 없었다.
저명한 관사아인 원공은 확실히 기인이다. 그는 요광효가 유병충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요광효와 유병충의 가장 큰 공통점은 성격이 살인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천도(天道)는 신경쓰지 않고, 성공(成功)만을 원했다는 것이다.
요광효와 유병충은 모두 스님이다. 그러나 불문의 자비는 없고, 그들은 성공을 갈망했다. 그리고 성공을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다만 기이한 점이라면, 그들은 성공후에도 재물을 탐하거나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여전히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계속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명이록(功名利祿)이 아니라, 후세의 명성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이 들게 하고, 두려움이 들게 한다. 더더욱 전율이 일 정도로 두렵게 만든다. 그들은 능력있는 인물이지만, 좋은 인물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상의 특수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