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후공(侯公): 한나라 초기의 신비인물.

중은우시 2019. 3. 13. 17:49

글: 천고명장영웅몽(千古名將英雄夢)


한신(韓信)이 제(齊)나라를 무너뜨리고, 팽월(彭越)이 전횡(田橫)을 격파하고, 영포(英布)가 회남(淮南)의 몇 개 현을 함락시킨 후, 초한(楚漢)의 대치는 마침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항우(項羽)는 갈수록 더 힘들어 졌다. 이제 항우의 서초진영의 주력은 겨우 광무(廣武)의 십만 초군, 서초 복지의 수만 초군, 강동지역의 수만 초군, 그리고 회남에 주둔하며 영포와 대치중인 초나라의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의 2,3만초군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제후들은 한에 투항하였거나 중립을 지켰다. 항우는 도와줄 사람도 없고, 식량도 떨어져서 이미 유방과 천하를 쟁패할 자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비록 전쟁에서의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항우는 세상사람들의 눈에 천하무적이었다. 그의 강철같은 의지와 산하를 뒤흔드는 기세는 여전히 천하의 제후들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방도 스스로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은 없었다.


당시 한신은 제나라에 병력을 주둔하고 있고, 팽월은 양(梁)에 병력을 주둔하고 있고, 영포는 회남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서초의 영토로는 한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항우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방은 서초에 화의를 청하기로 결정한다. 누가 누구를 이길 수 없으니, 그냥 이대로 있지는 것이다. 너는 나의 부친을 돌려주고, 우리 둘이 모두 병력을 물리며,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도 나의 길을 가며,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듯이 서로 상관하지 말자는 것이다.


항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제가 될 수 없고, 군신도 될 수 없으며, 몇년간 적수로 있으면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차라리 평화공존하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두 나라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으니, 나중에 다시 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5년(기원전203년) 팔월말, 유방이 전후로 협상전문가 2명을 파견한다. 육가(陸賈)와 후공(侯公)이다. 항우와 평화협상을 벌이려는 것이다.


제1차로 육가가 갔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제2차로 후공을 보내었고 그는 성공했다.


육가는 한나라때 아주 유명한 문학가, 정치가이며 유학의 대가이다. 유방의 존경을 받았고, 자주 제후들을 유세하러 다녔다. 그는 말을 잘 해서, 죽은 것도 살려낼 수 있는 말재주를 지녔다. 그리하여 외교에서 여러번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진군의 군영으로 들어가서 진나라의 중위군 장령과 협상을 한 일이다. 이렇게 하여 유방이 효관(嶢關)을 함락시킬 수 있게 도왔고,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나중에 남월국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 조타로 하여금 칭신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천하에 이름난 육가가 자신만만하게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낭패하게 돌아온 것이다. 유방도 고민에 빠진다.


이 순간, 이름도 없던 후공이 자원한다. 스스로 초군의 군영으로 가서 항우에게 군사를 물리도록 설득하겠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원인은 간단하다. 육가는 비록 말을 잘하지만, 유생이다; 후공은 비록 이름이 없지만, 종횡가(縱橫家)이다. 유생은 뼛속부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이치를 설파하기를 좋아한다. 종횡가는 왕왕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항우같은 패도적인 인물이 누구의 말을 듣겠는가?


그리하여 후공의 설득하에, 항우는 유방과 화의를 하기로 한다. 천하를 둘로 나누며, 홍구(鴻溝)를 경계로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가 되기로 한다. 이후 양국은 서로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한다.


홍구는 바로 광무간(廣武澗)을 흐르는 고운하이다. 이 운하는 대체로 현재의 정주시 서북에서 황하의 물을 동쪽으로 끌어들여, 개봉시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며, 현재의 하남 회양현에서 영수(潁水)로 흘러들어간다. 다시 동남으로 지금의 안휘성 부양에서 회하(淮河, 지금은 정주의 가로하만 남았다)로 흘러들어간다. 이렇게 두 나라의 경계선을 나누는 것은 기실 아주 개략적이다. 장기의 기판으로 보면 초와 한의 경계선에서 병졸들이 두 걸음만 걸으면 넘어간다. 이 합의가 최종적으로 실시되더라도, 변경에서의 분쟁은 계속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초,한 쌍방은 모두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기원전203년 구월, 초한양군은 형양(滎陽), 성고(成皋) 일선에서 2년 오개월간 대치한 후, 마침내 합의를 이루어 휴전하게 된다. 합의체결후 항우는 아주 기뻐하며, 후생을 국빈의 예우로 대접한다. 그리고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稚)등을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며 축하했다. 꼬박 3일간 연회를 연다. 후공은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한나라 군영으로 돌아온 후, 유방은 그 자리에서 후공을 "평국군(平國君)"에 봉한다. 이것은 제후의 급에 이르는 명호이다. 사람들은 속속 후공에게 술을 바치며 축하했지만, 후궁은 그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우리의 후공 선생은 돌연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한왕 유방이 보내준 하사품과 평국군의 인장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원래 후공은 종횡가일 뿐아니라, 도가이다. "평국"과 "경국(傾國)"은 종이한 장 차이이다. 이런 명호를 진퇴의 술을 잘 아는 도가에서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자고이래로 종횡가의 명인들 예를 들어 손빈, 방연, 소진, 장의, 공손연, 역이기등이 모두 좋은 최후를 맞지 못했다. 후공은 정말 지혜가 큰 인물이다.


그리하여, 이 경천위지의 종횡기재는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했다. 마치 하늘을 날아서 지나간 구름처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신비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구월말, 항우의 군영에 2년 5개월간 연금되어 있던 유방의 가족들이 마침내 한군의 군영으로 돌아온다. 양군의 장병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보기에, 오랫동안 기다렸던 평화가 곧 도래하고, 난세는 끝날 것같았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