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齊)나라의 4대명문집안
글: 유지사(有志社)
선진(先秦)시기에 성(姓)과 씨(氏)는 차이가 여자는 칭성(稱姓)하고 남자는 칭씨(稱氏)했다. 제나라는 강성여씨(姜姓呂氏)이다. 주왕실이 자신의 공신인 여상(呂尙, 즉 姜太公)에게 봉한 제후국이다. 여상은 문왕, 무왕의 스승일 뿐아니라, 동시에 무왕의 장인이고 성왕의 외할아버지이다. 또한 그는 병법에 능했다. 주나라초기, 동방은 이(夷), 상(商)의 잔여세력이 여전히 아주 강대했다. 그래서 제나라는 주왕실이 동방에서 가장 의지하는 봉국이었다. 주왕실에 의해 동방의 정벌지권(征伐之權)이 부여되었다.
정벌지권은 원래 천자(天子)의 권리이다. 그런데 제나라가 동방의 정벌지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제나라의 굴기와 춘추시기에 최초의 패왕이 되는데, 모두 극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 지금의 성씨는 절대다수가 전신시기의 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그중 강성(姜姓, 전부 齊姜은 아니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성씨가 100여개에 이른다. 그중 대부분의 성씨는 공실(公室)과 이런저런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선진시기,이렇게 중요했던 제나라의 공실에서는 어떤 유명한 성씨들이 파생되어 나왔을까?
첫째, 고씨(高氏). 고씨 성의 원류는 다양하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류는 바로 제나라의 공실에서 유래한다. 제문공(齊文公) 여적(呂赤)의 아들 공자고(公子高)의 후손들은 고를 씨로 삼는다. 고씨는 춘추시기에 제나라의 정계에서 중요한 경족(卿族)역량이 된다. 고씨와 국씨(國氏)는 주천자의 책봉을 받는다. 그리하여 대대로 제나라의 상경(上卿)이 되어, 제후(齊侯)를 보좌하여 제나라를 다스린다. 제나라의 정무는 모두 고, 국 두 경과 제후가 공동으로 결정했다. 고, 국은 이로 인하여 "천자이수(天子二守)"라고 불린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고씨는 포씨(鮑氏)와 연합한 전씨(田氏)에게 패배하여, 제나라의 정계에서 퇴출된다. 남북조시기에, 고환(高歡)의 가족은 "제(齊)"를 국호로 하는데(역사상 북제라 부른다), 중요한 원인은 바로 고씨가 춘추시기 강성(姜姓) 제나라와 연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고씨 인구는 천만이 넘고, 중국의 제15대성이다.
둘째, 국씨(國氏). 제나라의 국씨는 고씨와 마찬가지로 제나라의 공족이다. 선조의 이름을 씨로 삼은 경우에 해당한다. 국시와 고씨의 흥기와 쇠락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동시에 주왕실에 의하여 제나라의 정경(正卿)에 봉해지고, 거의 동시에 전씨에 패배하여 축출된다. 고씨, 국씨는 전씨에게 쫓겨난 후, 제나라의 공실도 완전히 고립된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국씨의 당초 역량은 고씨보다 약했다. 후손의 영향력도 고씨와 비교할 수 없다. 국씨는 지금은 이미 보기 드문 성씨가 되어 버렸다.
셋째, 노씨(盧氏). 제나라의 노씨는 고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제나라의 상경 고혜(高傒)의 채읍(采邑)이 노(盧)에 있었다. 그래서 그 갈라져 나온 가족은 노씨(盧氏)가 된다. 한나라말기, 삼국시대의 경학대가이자 명장인 노식(盧植, 유비, 공손찬의 스승)은 노씨가 위진남북조시기, 북방의 4대망족(崔盧鄭王)중 하나가 되는데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국대통령이었던 노태우도 자신이 강태공의 자손이라고 한 바 있는데, 그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 최씨(崔氏). 제나라의 최씨는 제정공(齊丁公)의 후손이다. 제정공의 적자인 계자(季子)는 국왕의 지위를 숙을(叔乙, 齊乙公)에게 양보하고, 최(崔)의 땅을 식읍으로 받는다. 그래서 그의 자손들은 최씨로 하게 된다. 최씨와 관련된 춘추시기의 저명한 사건은 "최저시기군(崔杼弑其君)"이다. 문천상의 <정기가>의 "재제태사간(在齊太史簡)"이라는 문구는 바로 '취저시기군'사건을 가리킨다. 최씨는 나중에 경봉(慶封, 제나라의 권상, 역시 공족에서 유래한다)에게 배신당해 가족이 몰락한다. 겨우 아들 최명(崔明)만 살아남아 노(魯)나라고 도망친다. 나중에 위진남북조때, 살아남은 최씨는 북방사대방족의 으뜸으로 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