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구익부인(鉤弋夫人): 한무제의 수수께끼같은 후궁

중은우시 2019. 1. 5. 22:57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기원전87년 이월 십이일, 한무제는 병이 위중해졌다. 나이 겨우 8살의 유불릉(劉弗陵)을 황태자에 앉힌다. 태자를 세운 다음 날, 한무제는 사망하고, 유불릉이 황위를 승계하며 생모인 구익부인 조씨를 황태후로 추존한다.


사서에는 이 황태후 구익부인의 기록이 간단하여 겨우 몇 행에 불과하다. 이전의 진황후(아교), 위황후(자부)와 비교하면 너무나 적다. 다만 구익부인의 전설은 그녀를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여자중 하나로 만들었다.


구익부인은 조씨(趙氏)이며 이름을 전해지지 않는다. 하간(河間) 사람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무제 유철이 순행을 할 때, 하간을 지나게 되었는데, 천상(天相)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망기자(望氣者)'가 한무제에게 이곳에 분명 기녀(奇女)가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즉시 조서를 내려 찾게 한다. 과연 망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금방 수행관리가 젊고 예쁜 여자를 찾아낸다. 이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두 손을 주먹모양으로 꽉 쥐고 있으면서, 이미 십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주먹을 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한무제는 그 여자를 불러서, 두 손을 보니 과연 주먹모양으로 꽉 쥐고 있었다. 한무제는 손을 뻗어 이 여자의 손을 가볍게 펴자, 소녀의 손은 바로 펴진다. 그리고 손바닥에는 작은 옥구(玉鉤)를 꽉 쥐고 있었다. 그후 한무제는 이 여자를 뒤따르던 가마에 태우게 하고, 황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를 "권부인(拳夫人)"이라 부른다. 나중에 조씨는 구익궁에 거주하므로 구익부인이라 부르게 된다.


구익부인의 이 전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녀가 소아마비에 걸려서 두 손을 꽉 쥐고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주먹에 옥구를 쥐고 있게한 것은 현지 관리와 수행인원들이 황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벌인 연극이라고 말한다. 진상이 무엇이건 간에, 구익부인의 전설은 기이하다.


태시3년(기원전94년), 구익부인은 황자를 하나 낳는다. 이름을 '불릉'이라 한다. 그가 나중의 한소제(漢昭帝)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불릉은 상고의 요(堯)임금과 마찬가지로 임신14개월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유불릉은 한무제의 막내아들이고, 자라면서 한무제를 많이 닮아갔다.


무고지화(巫蠱之禍) 이후 한무제는 유불릉을 후계자로 겨렁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어리고 모친은 젊어서 황태후가 되어 나라를 어지럽힐까 우려했다. 그래서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강산사직이 아녀정장보다 중요하다. 한무제는 독하게 마음먹고 구익부인을 죽인다.


구익부인의 죽음에 관하여, 반고(班固)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한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무제가 감천궁(甘泉宮)에서 휴양하고 있을 대, 모시던 조씨가 잘못을 범한다. 그리하여 한무제의 질책을 받는다. 나중에 조씨는 우울증에 빠져 운양궁(雲陽宮)에서 죽었다. 그리고 거기에 매장한다.


어쨌든 젊은 구익부인은 이렇게 사망한다. 그러나 구익부인의 죽음은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구익부인이 죽은 후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향기가 십리나 퍼졌다고 한다. 이는 세상사람들에게 모두 구익부인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렸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구익부인이 아마도 신선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속속 그녀를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한무제조차도 기이하게 여긴다. 그도 자신의 비가 범인이 아니지 않을까 의심한다. 확인을 해보기 위하여, 그는 사람을 시켜 구익부인의 묘를 파게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관을 여니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 광경이 드러난다. 관내에는 신발 한 쌍만 있을 뿐 시신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구익부인에게 벌어진 여러가지 기이한 현상들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