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한 이유는...?

중은우시 2019. 1. 2. 01:53

글: 문재봉(文裁縫)


이릉(李陵)의 할아버지 이광(李廣)은 천하에 이름을 날린 신전수(神箭手)였다. 이릉도 할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의 오천보병은 고르고 골라 능력이 뛰어난 '신전수군단'이었다.


이릉의 부대가 일당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수중의 활에 의존한 것이다. 다만, 연속 8일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교전으로 이미 이릉의 화살은 모두 바닥이 났다. 일단 화살이 없으면, 이릉의 부대는 맹호가 발톱을 잃은 것과 같고, 사람이 두 팔을 잃은 것과 같다. 대세는 기울었고,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흉노선우는 크게 기뻐한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릉을 맹공한다. 비록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맹렬히 반격해 보았지만, 화살이 다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 한나라로 다시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이릉은 부대를 이끌고 투항한다. 수하 5천용사중 4백명이 남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전쟁터에서 죽었다.


이릉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문무대신들은 경악한다. 한무제는 더더욱 분노한다. 이릉이 누구인가? 그는 명장 이광의 손자이고, 한나라의 기치이자 상징이다. 어찌 투항할 수 있단 말인가. 패전을 하더라도 살신성인해야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단 말인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황제가 크게 분노하는 것을 보자 신하들도 결과가 심각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상하가 모두 분기탱천하여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황제에게 이릉을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이씨일가를 멸문시키고, 뼈를 갈아서 뿌림으로써 후대에 경계를 삼게 하라고 요청한다.


이런 가운데, 한 사람은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했고,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발언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아야 할 것은, 이 대신이 발언하지 않은 것은 그의 관직이 너무 낮아서이다. 그저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봉록도 겨우 600석(삼공은 '만석'이다)에 불과하다. 만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는 차라리 이 곳에 와서 서 있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평소에 한 마디도 하지않는 이 대신이 무슨 일 때문인지 황제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태도때문에 일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 대신이 바로 <사기>의 작자인 사마천이다.


이 대신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분노한 한무제는 즉시 묻는다: "태사령, 너는 어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황제가 자기에게 묻는 말을 듣자, 사마천은 즉시 무릎을 꿇는다. 평소에 그저 글이나 읽던 그가 무슨 일 때문인지, 직언을 하기 시작한다. 이릉을 변호한 것이다.


먼저, 사마천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릉은 다시 얻기 힘든 국사(國士)라고. '국사'가 무엇인가? 그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가 받을 수 있는 영예이다. 그러므로, 설사 이릉이 투항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공로를 감안하여, 이렇게 잔인하게 그를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사마천은 다시 황제에게 말한다. 이릉은 5천 보병을 이끌고 8만 흉노주력과 8일 밤낮을 격전을 벌였다. 비록 패배하고 투항했지만, 그는 한나라의 위풍을 높였다. 이릉이 세운 전공이 있으니 공으로 과실을 상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마천은 다시 황제에게 말한다. 이릉의 일관된 행동을 보면, 그가 이번에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이 택한 '거짓투항'일 것이라고. 바로 일시의 미봉책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목숨을 남겨두어 그가 적의 내부에서 책동을 한 후 공을 세워 죄를 갚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마천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분노가 극에 달한 한무제는 즉시 명을 내린다: 이릉의 배반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사마천은 반적의 편을 들고 있으니 감옥에 집어넣고, 추후문참(秋後問斬)하겠다."


원래 이릉을 위해 변호새주며 한무제를 안위시키려던 사마천은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목이 잘리기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확실히, 사마천의 말은 한무제의 마음을 깊이 찔렀다. 그리고 두번이나. 이미 한무제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첫번째 한무제의 마음을 찌른 것은 사마천이 이릉의 충성심을 얘기할 때였다.


황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바로 영원히 충성할 사람이다. 충성스러운 신하라면 그것이 우충(愚忠)이더라도  하물며, 이릉은 한나라에서 사방에 명성을 떨친 대표적 인물이다. 만일 그가 투항했는데, 황제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다른 대신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만일 모두 이릉처럼 투항하고, 더 이상 황제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황제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부번째 한무제의 마음을 찌른 것은 사마천이 이릉의 전적을 얘기할 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전투에서 이릉은 확실히 용감하게 싸웠고, 전적이 놀라울 정도였다. 다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릉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는 이번에 '패스'해야하는 사람이다. 이번 전투에서 공성약지를 책임진 선봉은 누구인가? 바로 이광리(李廣利)'이다 그야말로 '슛'을 날릴 인물인 것이다.


이릉과 비교하면, 이광리의 전적을 형편없었다. 흉노의 주력도 만나지 못한 상황하에서 이광리는 3만대군을 이끌고 출정했지만, 적을 1만 죽이고, 자신은 2만이 죽었다. 상대방보다 손실이 배나 큰 것이었다. 이런 결과로 한무제는 이광리의 작위를 높여줄 수가 없었다.


이를 보면, 이릉과 이광리의 전적을 비교할 때, 누가 칭찬을 받고 작위를 받아야 할 것인가? 확실히 이릉이다.


이릉은 5천 보병을 이끌고 흉노의 8만주력부대를 크게 타격한다. 이광리는 3만 정예부대를 이끌고 흉노의 2등부대도 당하지 못하고, 6,7할의 병마를 잃고 만다. 이는 한무제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이릉의 전적을 찬양하는 말을 들었을 대, 원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던 한무제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아마도 바로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그는 사마천이 우회적으로 그를 욕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능력으로 장수를 임명하지 않고 친소를 가지고 장수를 임명했다고. 이릉의 공로를 가지고 이광리의 무능을 공격했다고. 나아가 자신의 장수기용에서의 무능을 지적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아팠다. 쌍방의 생각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으므로 사마천이 이번에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지만, 한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크게 오해를 하게 된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는 길이다.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황제는 사마천을 감옥에 넣어버린다. 이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3일후, 사마천의 죄명이 결정된다. "무상(誣上)", 즉 '황제를 모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형판결을 받고, 날을 정해 참형을 집행하여 일벌백계하기로 한다.


이제 사마천의 목은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고대의 형벌에서 "십악불사(十惡不赦)"의 죄가 아니면, 사형을 받더라도, 해결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3가지나 길이 있었다:


첫째, 즉시 복법(伏法)하는 것

둘째, 돈을 내서 속죄(贖罪)하는 것

셋째, 스스로 궁형(宮刑)을 받는 것


이를 보면 이런 해결방법은 그래도 인간적이다. 돈이 없고, 죽기도 싫으면 태감이 되면 된다. 그리하여 영원히 황제를 위해서 복무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얼굴이 두껍지 못했고,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위로는 조상에 부끄럽고, 가운데는 스스로의 몸을 해치며, 아래로는 자손이 끊어지는' 태감이 되는 것을 멸시하고 조소했다.


비록 태감이 되면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던 사마천에 있어서,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다만, 한나라규정에 만일 돈으로 사형을 면하려면 반드시 50만전을 내야 했다. 사마천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렇게 많은 돈을 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돈도 없고, 죽기도 싫으면서, '영원히 역사에 남고, 천고에 불후한" 책을 쓰기 위하여, 사마천은 '궁형'의 길을 선택한다.


이 책은 노신이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고, 무운(無韻)의 이소(離騷)"라고 불렀던 중국역사상 최초의 기전체통사 <사기>이다.


사마천은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궁형을 받고 태감이 된다.


사마천이 이런 치욕을 받아들인 후, '국사'인 사마천도, '사대부'인 사마천도, '남자'인 사마천도 철저히 사라진다. 이를 대체한 것은 새로 태어난 사마천이다.


이후 새로 태어난 사마천은 일종의 참신한 시각으로 사회 최하층의 신분으로 시사를 보고 정치를 보고 역사를 보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아녀정장의 항우이건, 노모심산의 유방이건, 인욕부중의 장건이건, 건공입업의 위청, 곽거병이건, 우울하게 일생을 마친 이광이건, 아니면 심계에 뛰어난 소인이건, 패도무비한 당금황상이건, 모두 성격을 선명하게 그렸고, 모두에게 새로운 영혼을 부여했다. 그들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 것이다.


궁형을 받기 전에 사마천은 먹고 사는데 걱저잉 없던 사람이다. '학득문무예(學得文武藝), 화매제왕가(貨賣帝王家)"의 인물이었고, 한 마음으로 건공입업, 광종요조를 꾀했다. 그처럼 호의호식하는 인물이 하층민의 서민의 인생을 알기는 어려웠다.


서로 다른 계급과 지위로 인하여 사마천은 그런 소인물들과의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사마천이 몸을 낮춰 그들과 어울리려 해도, 오히려 그들이 상처를 입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궁형을 받은 후로는 사마천이 사대부에서 제명되고, 난감하기 그지없는 태감이 되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서생기운이 넘치던 사마천이 돌연 깨닫는다. 더 이상 좁은 시각이 아니라 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보게 된 것이다.


그후 어떤 역사에 대하여건 모두 자신의 이해를 삽입시킨다. 그리고 이들 역사에 의심을 품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견식을 집어넣음으로써 <사기>에서 아주 독득한 기술방식을 택한다. 그리하여 이 천고의 명저에 다시 자신의 불후의 영혼을 불어넣게 되었다.


당나라때의 유명한 사학가 유지기(劉知己)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역사를 쓰는데는 3가지 재능이 필요하다. 즉 사재(史才), 사학(史學), 사식(史識). 그중 '사재'는 기초이고,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역사를 쓸 수가 없다; 사학은 수단이다. 분석능력이 없으면 역사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사식은 비로소 사서의 '영혼'이다. 영혼이 없는 사서는 그저 한 무더기의 자료에 불과하다.


'이십사사'를 살펴보면, 인물이 생생하게 그려진 것은 태사공의 <사기>를 제외하곤 더 이상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위관불제(爲官不濟), 위문불후(爲文不朽), 시이무감(是以無憾), 천백년래(千百年來), 진일인이이(盡一人而已)"이다.


이런 명예를 얻은 것은 사마천 뿐아니라, 그가 쓴 <사기>도 그렇다. 모두 불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한무제에 있어서, 그는 그저 하급의 태사령 하나를 파면하고, 역사상 위대한 사학가를 얻어냈다. 그릐고 역사상 위대한 사학저작도 얻어냈다.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한무제에게는 대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