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오왕부차검(吳王夫差劍) 9자루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중은우시 2018. 12. 27. 14:18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춘추시대, 오월 양국은 아주 뛰어난 주검(鑄劍)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춘추중기부터, 오나라는 제후들과 쟁패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였고, 풍부한 광산자원과 뛰어난 야금주조실력으로 수군보병을 위주로 하는 군대를 건설하여, 초,월과의 전쟁의 필요 및 동주시기에 성행하던 패검(佩劍)의 유행에 영향을 받아, 무기장비를 강화하고, 청동병기를 혁신했는데, 특히 처동검의 주조와 장식에 신경을 썼다.


춘추시기의 검은 청동으로 주조했고, 서로 다른 부위에 일정양의 주석, 납, 철, 유황등 성분을 넣어서, 검신의 인성(靭性)과 칼날부위의 날카로움을 유지했다. 이렇게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도록 한다. 오나라의 청동검은 고대병기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 종류는 주로 단검, 비이검(扉耳劍), 착격무고검(窄格無箍劍), 관격유고검(寬格有箍劍), 편경검(扁莖劍)등이 있다. 동주시기 남방각국 내지 중원지구의 병기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오나라 청동검은 춘추시기에 이렇게 변화하는 추세였다. 검신은 길어지고, 주척(柱脊)은 능척(棱脊)으로 바뀌고, 절면요호(截面凹弧), 혈조(血槽)가 있고, 앞쪽 칼날이 좁아지고, 칼날은 직선에서 호선으로 바뀌었다.


남아하불대오구(男兒何不帶吳鉤), 수취관산오십주(收取關山五十州). 고대인의 눈에 오구라는 것은 바로 뛰어난 병기였다. 뛰어난 병기를 얘기하자면 부득이 오왕부차검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부차는 오왕 합려의 아들이고, 기원전495년에 왕위를 승계한다. 기원전494년, 부초(夫椒)전투에서 월나라를 대패시키고, 월나라의 도성 지금의 절강 소흥을 함락시킨다. 이렇게 월을 굴복시키고 강동을 통일한다. 이어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중원을 쟁패한다.


기원전494년 애릉(艾陵)전투에서 제나라를 격패하고 제나라군대 10만명을 섬멸한다.


기원전482년, 황지(黃池)에서 진정공(晋定公)을 만나 삽혈위맹(揷血爲盟)하여 다시 한번 오나라의 춘추대국의 지위를 확립시킨다.


부차가 집권하는 기간동안, 오나라는 아주 호전적이었고, 매년 군대를 동원해서 전쟁을 치른다. 그리하여 국력이 바닥난다. 구천은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않고, 국력을 점점 회복하여, 부차가 전국의 군대를 이끌고 황지로 가서 회맹을 하는 틈을 타서, 월군이 쳐들어가 오나라 태자를 죽인다. 부차는 진나라와의 쟁패에 성공하여 패주의 지위를 얻은 후 급히 돌아온다.


기원전473년, 월국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부차는 검을 뽑아 자결하니 향년 55세이다.


검신에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攻吳王夫差自作其元用)"이라는 글자가 주조된 일련의 오왕부차청동검은 오왕부차의 권력을 상징했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오왕부차의 권력이 사라지면서 오왕부차검도 전국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이천여년이 지난 오늘날 오왕부차검은 전국각지에서 연이어 발견되었고, 지금까지 모두 9자루가 발견되었다.


첫째 검, 낙양박물관(洛陽博物館)





낙양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오왕부차검은 전해지는 바로는 오나라에서 당시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주천자(周天子)에게 예물로 바친 것이라고 한다. 1991년 낙양시 서공구 중주중로의 전국묘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오왕부차검은 관격유고검에 속한다. 설계에서 실용과 장식을 모두 고려했다. 관격검은 쥐기 편하고, 벨때 날카롭다. 실전에서도 효과적인 작용을 한다. 검신의 설계에서는 능척, 요호절면, 수협전악(收狹前鍔), 호선내수인부(弧線內收刃部)로 살상력을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전쟁터에서 더욱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오왕부차검은 전체길이가 48.8센티미터, 너비가 4.2센티미터이다. 원수(圓首), 원통상경(圓筒狀莖), 착격(窄格)이며, 명문이 두 줄로 새겨져 있는데, 부식이 심해 지금은 겨우 "왕부차(王夫差)...작기원용(作其元用)"의 일곱글자만 보인다. 아마도 원래 명문은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의 열 글자일 것이다.


둘째 검, 국가박물관(國家博物館)





1935년 민국시대에 안휘성 수현의 서문내에서 오왕부차검이 한 자루 출토된다. 검의 총길이는 58.9센티미터이고 너비는 5.3센티미터이다. 원수(圓首). 원주상경(圓柱狀莖)에 두 줄의 원고(圓箍)가 있다. 검격에는 녹송석이 상감되어 있고, 장식은 간화수면문(簡化獸面紋)이다. 칼날은 예리하고 검신에는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의 열 글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검은 중국의 저명한 고문학자, 구기물학자인 우성오(于省吾)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다. 우성오 선생은 오왕부차검, 소우착금검(少虞錯金劍)을 얻어 그의 장서루를 '쌍검이(雙劍謻)'라고 불렀다. 호는 '쌍검이주인'이라 한다. 그의 저서로는 <쌍검이은계변기>, <쌍검이은계변기속편>, <쌍검이길금문선>, <쌍검이길금도록>, <쌍검이고기물도록>등이 있다.


선생이 사망한 후, 생전의 유언에 따라 소장품을 중국국가박물관에 기증한다. 오왕부차검도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검, 국가박물관(國家博物館)


1974년, 안휘성 여강현 농민이 도랑을 파다가 오왕부차검을 한 자루 발견한다. 길이는 54센티미터, 녹슨 흔적은 없으며 광택이 있었다. 병은 타원주형이고, 위에는 두 줄의 고릉(箍棱)이 있다. 검수는 이미 손되되었고, 검격은 비교적 넓었다. 위에는 녹송석 화문이 있다. 경부는 비교적 넓다. 중척에는 명문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의 2행 열 글자가 있다.


그때는 각 성의 문화재의 고고와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고발굴업무도 문화부가 나서서 진행했고, 업무가 끝난 후 이 오왕부차검은 자연스럽게 문화부 직속의 중국국가박문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넷째 검, 국가박물관(國家博物館)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2년도 지나지 않은 1976년, 하남 휘현 백천문물보관소는 폐동(廢銅) 가운데 오왕부차검을 한 자루 발견하게 된다. 검신의 전체 길이는 59.1센티미터, 너비는 5센티미터, 화문이 가득했고, 검끝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검신은 전서 음문(陰文)으로 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오왕부차자사기원용(攻痦王夫差自乍其元用)"


안휘에서 발견된 오왕부차검과 마찬가지로, 이 오왕부차검도 자연스럽게 문화부 직속의 중국국가박물관으로 보내어져 소장하게 된다.


다섯째 검, 산동박물관(山東博物館)





오왕부차금중 가장 기이하게 발견된 것을 따진다면 바로 산동박물관의 이 오왕부차검을 꼽아야 할 것이다.


1965년, 산동 평도현 폐품수집소에서 청동검이 한 자루 발견된다. 업무인원은 현지의 문화재부문에 보고했고,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이 전체길이 57.8센티미터, 너비 5.8센티미터의 편경(扁莖)에 납부(臘部)에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의 2행 열글자가 새겨진 그 이름도 유명한 오왕부차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폐품수집소에서 이런 국보를 찾을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전설적인 방식으로 이 오왕부차검은 발견지에 성공적으로 남아서, 산동박물관이 소장하게 된다. 당시 얼마나 많은 박물관들이 부러워했던가?


여섯째 검, 호북박물관(湖北博物館)


마찬가지로 1976년, 호북 양양 채파 12호 전국묘에서 오왕부차검이 한 자루 출토된다. 수부(首部)는 이미 훼손되었는데 남은 길이가 39센티미터, 너비가 3.5센티미터였다. 원통상경에 납부에 명문으로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의 2행 10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오왕부차검은 같은 해 하남에서 출토된 오왕부차검과 비교하면, 머리부분이 훼손되어 품질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오왕부차검은 국가박물관으로 보내어지지 않았다. 호북박물관도 이 소장품은 거의 선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북박물관은 또 다른 소장품인 오왕부차모(吳王夫差矛)를 더욱 선전하고 있다.


일곱째 검, 천진시예술박물관(天津市藝術博物館)


천진시예술박물관에도 오왕부차검이 한 자루 있다. 이는 민간소장가가 기증한 것이다. 명문 "공오왕부차자작기원용"이라는 2행 10글자가 분명히 보인다. 다만 아쉽게도, 검수와 검봉은 모두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래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여덟째 검, 부양박물관(阜陽博物館)


안휘 부양시의 이름없는 소장가가 오왕부차검을 한 자루 소장하고 있었다. 부양박물관의 전 관장인 한자강(韓自强) 선생은 자신의 저작 <부양과 박주에서 출토된 문물문자편>에서 이 검을 언급하고 있다. 명문이 "공오왕원차자작기원용(工吳王元差自作其元用)"으로 '공(工)'자와 '원(元)'자가 다른 것을 빼면 나머지 모양등은 오왕부차검과 똑같다.


아홉째 검, 소주박물관(蘇州博物館)





1991년 홍콩의 골동품경매때 오왕부차검이 나온다.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9자루의 오왕부차검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마지막에는 저명한 수장가 왕진화(王振華), 왕숙화(王淑華) 부부가 낙찰받아 대만고월각(臺灣古越閣)에 소장했다.


이 검은 전체 길이가 58.3센티미터, 격의 너비가 5.5센티미터로 춘추말기에 만들어졌다. 이 검은 보존상태가 좋아서 세상에 나타나자마자 이름을 떨친다. 고공박물원과 중국국가박물관도 여러번 왕진화, 왕숙화 부부에 요청하여 이 검을 전람했다.


여려해동안의 노력과 왕진화, 왕숙화부부와의 성의있는 소통을 통해, 2014년 상반기에 마침내 소주시인민정부가 4,250만위안을 들여 오왕부차검을 구매할 수 있었고, 소주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다.


오왕부차검이 마친매 주조한 곳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다시 오나라의 수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소주박물관의 명실상부한 진관지보(鎭館之寶()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