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초재(耶律楚材): 징기스칸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글: 황수(黃帥)
1211년, 징기스칸의 철기(鐵騎)가 야호령(野狐嶺)에서 금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일 때,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겨우 21살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금나라 황제와 함께 곧 중원으로 쳐들어올 몽골인을 격퇴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이때 이미 몽골인에게 기울어 있었다. 수십년간의 향락과 소비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자손들이 지탱해온 국가는 사상유례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야호령 전투에서 금나라군대는 정예병을 모조리 잃는다. 심지어 황제 금선종(金宣宗)마저 남으로 도망쳐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간다. 일시에 금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분위기가 중원의 대지를 감싸게 된다.
야율초재는 몽골인과 더욱 거리가 가까웠던 중도(中都)에 남는다. 즉 지금의 북경이다. 이곳은 여러 대에 걸친 금나라황제를 안장한 용맥지지(龍脈之地)이다. 그런데 완안씨 가족에게 이제 버림을 받았다. 1215년, 징기스칸의 대군이 중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이 대량으로 피살되고 포로로 잡혀가며, 대량의 건물은 초토화된다. 문인묵객들은 일찌감치 사방으로 도망쳐서, 중도에 남아있는 금나라사람에게는 확실히 세계종말이 온 것과 같았다.
징기스칸은 입성한 후, 야율초재를 만난다. 이때의 야율초재는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지식인중 아주 높은 명망을 누렸다. 징기스칸도 그것을 잘 알았다. 이 문인의 대표를 정복하면 문화적으로 피정복지를 지배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어쨌든 역사적으로 유사한 일은 여러번 재연된다. 단지 누구는 죽어도 투항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누구는 적극적으로 귀순하는 길을 선택할 뿐이다. 야율초재의 번민과 고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야율초재 내심의 갈등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세에서도 왕왕 이를 무시한다. 비록 후세의 야율초재에 대한 평가는 거의 모두 긍정적이지만, 그의 내심의 번민과 시종일관 자리잡고 있었던 자아회의, 자아비판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제세(濟世)의 성취 아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유학을 공부한 독서인은 충군애민(忠君愛民)해야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야율초재의 조상들은 이미 그 정신에 위배했다. 그들 가족은 원래 거란(契丹)의 황족후예이다. 금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것이 첫번째 배반이다. 그리고, 야율초재의 조상들은 금나라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는 징기스칸에 투항한다. 이것이 두번째 배반이다. 비록 그의 조상들 및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강렬한 충군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야율초재는 어쨌든 어려서부터 유가정통학설의 영향을 받아, 혼란한 국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가 내심으로 번민이 없었다거나 고통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부득이하게 즉시 하나의 명확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사명지(以死明志)' 즉 죽음을 선택해서 뜻을 세울 것인지, '이생천지(以生踐志)' 사는 길을 선택해서 뜻을 굽힐 것인지. 이 두가지 선택 앞에서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이미 그는 은거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징기스칸이 이미 알고 있었다. 몽골인도 알고 있다. 그들이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려면 무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야율초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얻어야할 인재였다.
야율초재를 징기스칸이 점찍은 것은 그의 학식이 풍부하고, 외모가 속되지 않다는 것 외에 그는 '잡가(雜家)'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제왕의 곁에서는 뛰어난 모사이면서, 길흉을 점칠 수 있는 고인이기도 하다. 매번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출정하기 전에, 징기스칸은 야율초재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야율초재의 예측이 매번 들어맞았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그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왕공귀족들에게도 이 이민족인 고인(高人)을 존중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일찌기 후계자인 오고타이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자는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보내준 것이다. 이후 군국서정(軍國庶政)은 모조리 그에게 맡겨라."
야율초재는 이런 신뢰에 부응하고 또한 그를 통하여 그의 원래 목적을 실현한다.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의 진영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가 이 몽골초원의 효웅이라말로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하에 전쟁이 계속되고, 할거분쟁이 계속된다면 더욱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징기스칸이 가는 곳은 살륙이 넘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천만명의 생명을 결정하는 강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아주 이상주의적인 색채이다. 그리고 권모술수적 사고의 생각이기도 하다.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을 따라 서정(西征)하면서, 그의 인생의 앞날은 더욱 넓어진다. 그러나 더 많은 불확실성도 존재했다. 화북평원에서 막북초원까지 천산대막에서 서역설령까지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의 군대를 따라 천킬로미터이상의 정벌길을 따라다닌다. 그가 본 것은 책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고, 그것은 중원문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호라즘(花剌子模)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야율초재는 징기스칸의 좌우를 따르게 된다. 미래 중앙아시아지역의 패주지위를 결정하는 전투에서, 피비린내나는 도살이 진행된다. 야율초재는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칼날아래 죽어가는 것을 차마 그냥 보지 못하고, 더더구나 하중(河中)지구가 허허벌판의 황야로 바뀐 광경은 더욱 참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일대는 자고이래로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암강, 시르강일대에는 비록 대량의 황야가 있지만, 사막오아시스와 강가의 좋은 밭들에는 여전히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유라시아를 차지하는 강성한 제국들은 모두 하중지구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여야 자신의 혁혁한 전공을 과시하는게 되는 것같았다. 호라즘은 비록 아케메네스왕조, 알렉산더대제처럼 영토가 광활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한때 잘나간 중앙아시아의 대국이다. 그의 위세는 직접 지중해 동안까지 미칠 정도이고, 이는 야율초재로 하여금 초조와 불안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혈전은 결국 발생했고, 징기스칸은 3년의 시간을 들여 호라즘의 국토를 붕괴상태로 몰아넣는다. 몽골인은 하중지구의 수십개 도시를 점령하고, 대량의 호라즘인들은 도살당한다. 야율초재는 일찌기 서행도중에 이런 시를 지은 바 있다:
적막하중부(寂寞河中府), 연맹급만가(連甍及萬家)
포도친양주(葡萄親釀酒), 파람간개화(杷欖看開花)
포담계설육(飽啖鷄舌肉), 분찬마수과(分餐馬首瓜)
인생유구복(人生有口腹), 하애과유사(何碍過流沙)
그러나 전쟁이 긴박해지면서 전체 호라즘은 전화에 휩싸인다. 야율초재는 이국풍광을 감상하는 외에 현지의 맛있는 술과 음식을 감상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징기스칸과 정반대였다. 이 토지를 정복하기 위하여, 징기스칸은 반드시 그의 몽골장병들과 끝까지 혈전을 벌여야 했다. 호라즘의 국왕 무하마드(Ala al-din Muhammad)가 카스피해의 한 작은 섬으로 도망칠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잔여세력을 추격하여 호라즘을 멸망시킨다. 야율초재는 비록 항상 징기스칸에게 '호생오살(好生惡殺)'하도록 권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혀에 연꽃이 핀다고 하더라도 칸의 철석같은 마음을 바꾸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매번 이국에서의 깊은 밤에는 눈앞의 영지에서 빛나는 고독의 불꽃을 본다. 야율초재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받은 성현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몽골인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구차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더더구나 투기모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야만적인 군대를 감화시켜 성현의 도리로 그들에게 문명의 소양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라즘에서 발생한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자아회의의 번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야율초재가 생각해낸 것은 도교에서 명망이 아주 높은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였다. 징기스칸도 자주 사람들이 구처기를 추천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야율초재로 하여금 서신을 써서 구처기를 호라즘으로 불러서 만나고 싶다고 한다. 야율초재는 유불도를 모두 아우르는 통재(通才)이다. 그러나 그의 밑바탕은 여전히 유생이다. 머리 속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밖에 없었다. 우울하게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을 때, 불학의 수양을 통하여 자신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소위 '이유치세(以儒治世), 이불치심(以佛治心)'이다. 그러나, 그는 도교의 학설에 대하여는 그다지 찬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한 존중은 해주었다. 그러므로 구처기가 와서 만나게 되었을 때 주로 그를 통해 징기스칸을 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칸에게 전쟁을 끝내고, 휴양생식(休養生息)하게 하도록 권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교와 도교위 발언권쟁탈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구처기는 불원만리 머나먼 동방에서 제자와 함께 징기스칸의 장막으로 온다. 그러나 칸은 어떻게 장생불로할 것인지에 대하여만 관심을 두었지, 구처기가 말하는 휴양생식의 이론에 대하여는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호라즘의 전투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하마드의 후계자인 잘랄 알딘(Jalan al-Din Menguberdi) 국왕은 여전히 잔여부대를 이끌고 싸우고 있었다. 몽골인이 이미 점령한 영토도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대군에서는 이미 전쟁혐오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국타향에서 전쟁을 벌이다보니 수토불복(水土不服)의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져서, 심지어 무서운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에 대하여, 중의약재를 잘 알고 있는 야율초재는 걱정이 많았다. 만일 몽골대군이 계속 인도로 잘랄 알딘의 잔여부대를 추격해가면 아마도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혹서의 기후하에 속속 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이전에 취득한 성과마저 지켜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원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황제가 동인도에 도착하여 철문관(鐵門關)에 주둔했는데, 뿔이 하나달린 짐승이 있는데 모양이 사슴같은데 꼬리는 말과 같았고, 색깔이 녹색이며, 사람의 말을 했다. 시위에게 말하기를, '너의 주인은 빨리 돌아가는게 좋다'. 황제는 야율초재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은 상서로운 동물입니다. 이름은 각단(角端)인데, 사방의 말을 할 줄 알고, 호생오살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부(符)를 내려 폐하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폐하는 하늘의 원자이고, 천하의 사람이 모두 폐하의 아들입니다. 원컨대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두고, 바로 회군하시기 바랍니다." 이 철문관의 괴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야율초재가 이를 기화로 설득하게 된 것이다. 장생천(長生天)을 믿는 징기스칸은 하늘의 뜻을 알았고 ,반드시 장생천의 안배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서정대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린다.
여러가지 고려에서 징기스칸은 마침내 회군을 결정한다. 야율초재의 '호생오살'의 사상이 마침내 작용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구처기와 징기스칸의 대화로 지금까지 살륙과 전쟁을 멈춰본 적이 없던 총사령관으로 하여금 처음 자연과 시간의 역량에는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징기스칸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구처기가 무슨 장생불사의 신선이 아니고, 자신도 장생불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드시 남은 얼마 안되는 시간 내에 가족과 국가의 운명을 잘 안배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야율초재는 이로 인하여 점차 구처기와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 그들이 서역에서 같이 지은 시작도 개폭 삭제하고 수정하게 된다. '장춘진인'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시작은 모조리 바꾸어진다. 야율초재는 구처기에게 도덕수양상의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가 징기스칸의 종교관용정책을 이용하여 전진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 자신이 전진교의 장문인이었다. 이렇게 되니, 구처기는 천하의 신도들에게 호령할 수 있게 되고, 원래 처지가 난감하던 유교와 불교는 더욱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야율초재는 당연히 구처기와 신도들이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해치는 것ㅇ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그저 말과 글로 화풀이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징기스칸의 야율초재에 대한 신뢰와 인정은 변함없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서하를 정벌하는 중요한 순간에 사망하고 만다. 그후 신임칸인 오고타이는 그를 더욱 신뢰한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시기에 중서령을 맡는다. 직접적으로 몽골칸의 최고의사결정권내에 들어가게 된다. 심지어 황금가족의 주요구성원들도 모두 존경하고 서로 차지하려는 중요인물이 된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야율초재는 불가피하게 각파세력의 이익다툼에 말려들게 된다. 징기스칸시대에 칸의 말은 일언구정(一言九鼎)의 무게가 있었다. 여하한 내부세력도 모두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야율초재는 단지 칸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오고타이시대에 이르러, 서로 다른 파벌의 이익이 점점 분화되기 시작한다. 야율초재는 적시에 유가의 겸공(謙恭)과 신독(愼獨) 정신을 극치로 발휘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는 없었다. 1244년, 권력쟁탈전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어, 야율초재는 속을 끓이다가 사망한다. 향년 55세이다.
야율초재의 이상은 자신의 경세지재(經世之才)를 통하여 이 '말등에 탄 민족'으로 하여금 천하를 품고 만민을 보유하는 성현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유가사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오랫동안 중원에서 살아온 유생과 비교하자면, 야율초재는 확실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했다. 중국의 유가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천하'에 대한 인식범위는 아주 넓었고, 그런 인식은 시문에서도 나타난다.
학자 왕소운(王篠芸)는 일찌기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야율초재, 구처기등으로 구성된 '서유문학(西遊文學)'의 집단은 '서역시와 몽공몰왕조의 인식교량'의 관계에 있다. 이는 확실히 당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의 이해'이다. 특히 야율초재와 다른 수군서행(隨軍西行)한 문인들과 같이 만든 작품은 중원왕조 지식엘리트의 몽골 '천하'국면에 대한 상상과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몽골서정이후에 얻은 새 영토를 중원왕조의 역사와 인식을 결합키려면 시간적 과정이 필요하다. 혹은 이 중앙제국이 일단 형성되면 부득이 어떻게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매개전파가 낙후했던 당시에, 문학은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뿌리를 찾아보면, 야율초재의 이상도 좋고, 번민도 좋고, 모두 그의 유가학설에 대한 충정불이(忠貞不貳)의 독신에서 비롯된다. 야율초재가 남긴 시작(詩作)은 적지 않다. 그중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반역한 문학집 중에 <담연거사문집>이 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쓴 바 있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기(氣)를 위주로 해야 한다. 호연지기를 가슴 속에 길러서 내뱉으면 문장이 된다. 글을 만들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글이 된다." 야율초재가 흠모한 것은 유가에서 주장하는 호연지기이다. 혼탁한 시대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군자의 기운이다. 그의 문풍은 방박대기(磅礴大氣)하다. 아마도 이런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바라던 것은 바로 제갈량, 범중엄같은 광부천하(匡扶天下)의 제세인재(濟世人才)였다. 글을 탁마하는 소재(小才)가 아니라. 이런 관념을 신봉하는 독서인이 언젠가 황제의 부름을 받아 세상의 만민을 수화에서 구제하겠다는 환상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야율초재는 난세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도탄에 빠진 생령들이다. 그리하여 대의를 세워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겠다는 숙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선택을 한 후에, 정말 바라던대로 되었을까?그가 지고무상한 영예와 자손이 음덕을 받게 된 때에도, 자신의 고국이 지리멸렬하고 산하가 뒤집힌 침통한 장면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유감과 적막을 당시 사람이나 후세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