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사변(西安事變)때 각 세력의 입장은...?
글: 안득(安得)
금년(2018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82주년기념일이다. 1936년 12월 12일, 중국 동북군장수 장학량(張學良), 서북군장수 양호성(楊虎城)은 서안에서 '병간(兵諫)'을 일으킨다. 당시 중국최고지도자인 장개석과 그의 수행인원들을 억류하였다. 일시에 남경국민정부, 국민당지방실력파, 소련, 일본등 각 세력은 힘겨루리를 펼치고, 중국공산당이 최대수혜자가 된다.
서안사변때, 소련의 태도는 사변의 발전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일대요소였다. 이전에 중국공산당은 장학량과 서북대연합을 건립하여 소련의 물자와 기술원조에 의존하여 공동으로 항일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사변발생후, 일본신문이 최초로 대외보도하였고, 다시 국민정부의 전주석 왕정위(汪精衛)는 당시에 마침 독일에서 히틀러와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 쌍방은 1936년 11월, 소련을 겨냥한 반코민테른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지도자 스탈린은 서안사변이 일본의 음모라고 여겼다. 소련의 프라우다, 이즈베스티야는 공개적으로 장학량을 친일파라고 질책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로 장개석을 체포한 것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측이 사변을 빌어 장개석을 제거하려는 계획에 대하여도 스탈린은 진노한다. 코민테른 지도자 게오르규 디미트로프의 일기에 따르면, 사안사변이 발생한 후인 12월 14일 심야에 스탈린이 돌연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의 그 왕명(王明)은 어떤 놈이댜. 사건을 저리르는 스파이인가? 그가 장개석을 죽이라고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장학량은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중국공산당도 아직 항일을 지도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다. 만일 장개석을 타도하면 반드시 중국은 내전에 빠질 것이고, 그저 일본만 유리해진다고 보았다.
소련은 사변의 의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은 일시에 피동적인 입장이 된다.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모택동이 스탈린으로부터 장개석을 석방하라는 전보를 받은 후, 대노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욕을 해대며 다른 한편으로 발을 굴렀다고 한다.
장학량 본인은 소련의 입장을 전해들은 후, 더더욱 중국공산당에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변발생후, 중국국내의 반응도 중국공산당 및 장학량, 양호성등의 예상을 벗어났다. 사변전에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단계적으로 강화시키는데도, 장개석은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의 군사정책이 인심을 갈수록 잃어갔으며, 중국국내 및 국민당내부의 지방실력파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불만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사변후, 장개석이 구금되자, 이전에 비등하던 '반장(反蔣)'정서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오히려 '옹장(擁蔣)'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장개석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더욱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중국의 <대공보> 총편집인 장계란(張季鸞)은 <서안군계에 보내는 공개서신>을 통하여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즉시 장개석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남경정부는 이 서신이 인쇄된 <대공보>를 40만부 찍어서, 비행기로 서안으로 보내 공중살포했고, 동북군이 크게 동요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남경정부측에서는 각로제후들이 서로 딴 생각을 품고 있어, 형세가 심각했다. 서안으로 가서 장항량과 면담한 중국공산당지도자 주은래는 두번에 걸쳐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그가 알고 있는 상황을 보고했다: "남경 친일파의 목적은 내전을 조성하는데 있고, 장개석을 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송미령은 장개석에게 서신을 보내어: 항일하려면 차라리 적의 손에 죽어라고 했습니다. 공상희는 조정을 시도하고, 송자문은 정전을 조건으로 서안에 왔으며, 왕정위는 귀국할 것입니다."
사변이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신속히 반응을 보인다. 사변발생 다음 날, 일본 외무성은 긴급수뇌회의를 소집한 후, '정관기변(靜觀其變, 조용히 상황을 지켜본다)"는 태도를 확정한다. 12월 18일, 일본외무성은 성명을 발표하여, '장개석이 내놓을 성명과 요구에 근거하여 적절한 자위조치를 취할 것을 준비한다"고 밝힌다. 적극적으로 간섭할 준비를 하는 동시에, 일본은 방공(防共)을 명목으로 중국에서 내전이 확대되는 것을 지지했다.
초보적으로 장개석이 서안에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신속히 의견일치를 본다: "만일 장개석이 살아남도록 한다면, 그것은 병을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것이다." 다만 국면이 진전되면서 특히 소련이 반대하고, 일본이 핍박하며, 국내여론이 바뀌자, 장개석을 죽이는 것은 확실히 대국에 불리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그리하여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때, 사변의 주인공 장학량, 양호성은 이미 전국민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내부의 군심도 불안정하고, 외부에서는 대군이 압박을 해왔다. 장개석은 송미령, 송자문이 서안으로 온 후에 태도가 완화된다.
이렇게 하여 각측의 힘겨루기 속에서, 서안사변은 갱개석이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여 항일하기로 한 후 평화적으로 해결된다.
서안사변후, 장개석은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번 사변은 나의 국민혁명과정에서 일대 좌절이다. 팔년간 공비토벌의 공로는 앞으로 두 주 내지 일개월이면 전력을 다할 수 있었는데, 이제 거의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날아갔다." 그 뜻은 만일 이번 사변이 없었더라면, 중국공산당은 금방 소멸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섬서북부(연안)으로 온지 얼마되지 않았고, 홍군은 장정을 거친 후 감원이 엄중했으며 서로군은 거의 전멸했고, 소련의 원조를 육로로 취득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국군의 지속적인 토벌로 처지가 확실히 아주 어려웠다. 사변후, 특히 항일전쟁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역량이 신속히 발전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서안사변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약변강(由弱變强)'의 전환점이다.
그러나, 사실의 또 다른 일면은 장학량이 이끌던 동북군이 홍군을 토벌하는데 전적이 계속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주 전체 연대, 사단이 전멸하곤 했다. 특히 1935년 11월, 동북군 109사단은 직라진(直羅鎭)전투에서 전멸하고 만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서북에서 근거지를 건립하고 확대하는데 기초가 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서안사변전에, 홍군은 이미 싸울수록 강해지는 추세였다. 장학량이 반공입장을 바꾸어, 중국공산당의 공동항일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전투에서의 실패로 잃은 체면을 만회하려는 생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