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두환(杜環)은 아프리카를 여행했을까?
글: 황수(黃帥)
대당천보10년(751년), 전성기의 대당제국은 대식제국 및 중앙아시아연합군과 탈라스에서 격전을 벌이고, 서로 이기고 지다가, 최종적으로 대식국이 약간의 우세로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당군을 이긴다. 이 전투는 영국의 변경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당시에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현재의 역사적 안목으로 보더라도, 탈라스전투는 특별히 중요한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교전쌍방의 신분이 특수하여, 사학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탈라드전투는 당나라의 서역경영전력에 끼친 영향이 크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의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하여 강력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학가인 백수이(白壽彛)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당나라와 대식의 관계는 이로 인하여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식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전통을 여전히 이어갔다. 백수이 선생은 <책부원귀>의 사료에 근거하여, 당고종 영휘2년(651년)부터 대식은 사신을 대당에 보냈고, 당현종 개원, 천보연간에 사신이 왕래한 횟수가 가장 많았으며, 당덕종 정원14년(798년)까지도 양국은 여전히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이 있다. 탈라스전투이후, 두환이라는 당나라사람이 대식의 포로가 되어 이후 중앙아시아, 서아시와와 북아프리카를 10여년간 떠돌고 전설적인 작품 <경행기(經行記)>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이 아프리카를 여행한 최초의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모는 우리가 이미 볼 수 없다. 다만 그 중의 지언편어(只言片語)는 사학가인 두우(杜佑)가 <통전(通典)>에 수록해 놓았고, 나중에 왕국유(王國維)가 정리했다. 두환은 서방의 13개국가를 여행했는데, 순서대로 각각 다음과 같다:
발한나국(拔汗那國), 강국(康國), 사자국(獅子國), 불름국(拂菻國), 마린국(摩隣國), 대식국(大食國), 대진국(大秦國), 파사국(波斯國), 석국(石國), 쇄엽국(碎葉國), 말록국(末祿國), 점국(苫國).
이들 국명은 모두 고칭(古稱)이다. 그중 강국, 대식국, 대진국등은 우리가 익숙한 이름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는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인들이 가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 두환이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갔느냐는 것은 논쟁이 있다. 상세하게 고증한 후에도 역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후세인들은 두환을 여행가라고 칭하는데, 당시로 보면 두환의 여행은 실로 오늘날의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다. 두환의 서방여행은 먼저 피동적으로 시작된다. 751년에서 762년까지 기간동안의 여행은 이역풍광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식군단을 따라 다닌 것이다. 상식과 위배되는 것은 <경행기>에 기록된 여러 나라의 순서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두환의 원저에서 설정된 서술순서인가, 아니면 나중에 서로 다른 학자가 정리한 판본으로 이한 문제인가. 이미 고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지리순서로 본다면, 당연히 쇄엽국, 강국등이 먼저 서술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위치한 마린국이 서술의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중간은 바로 지역이 넓은 대식제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두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번 여정을 소화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중간에 십년이 넘는 긴 기간이 있다. 두환은 아마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땅을 반복적으로 오갔을 수 있다. 심지어 한번만 아프리카 땅을 밟은 것이 아니고, 그래서 이 곳을 아주 잘 알았을 수 있다.
두환이 후세에 남긴 기록이 너무 적으므로, 후세는 그가 아랍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잘 알 수가 없다. 그중 어떤 신기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그 자신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많은 상세한 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경행기>를 보면, 두환은 서방제국에 대한 묘사가 객관적이다. 거의 개인감정을 담지 않았다. 이는 <산해경>이래의 지리기재에 관한 서석의 서술습관과 일치한다. 다만 두환은 어쨌든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이 이국세월을 보낸 것이다. 설마 그에게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설마 그는 교류과정에서 곤란을 겪지 않았단 말인가? 설마 그의 기재는 단지 머나먼 고국에 하나의 박물지식의 글을 남기기 위함이란 마린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그저 글의 세부사항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경행기>의 기재중 가장 상세한 곳은 당연히 대식국이다. 당시 대식국은 압바스왕조시기이고, 중국전적에서는 이를 "흑의대식(黑衣大食)"이라 칭했다. 압바스왕조의 영토는 아주 넓었다. 중앙아시아 대다수의 지방이 포함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동부와 지중해 동안까지 점거해서, 서방으로는 동로마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당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두환의 기록을 보면, 대식국의 지리기후, 풍토인정에 대한 간단한 묘사가 있다. "부곽지내(郛郭之內), 이염지중(里閻之中), 토지소생(土地所生), 무물불유(無物不有). 사방복주(四方輻湊), 만화풍천(萬貨豊賤), 금수주패(錦繡珠貝), 만어시사(滿於市肆); 타마여라(駝馬驪騾), 충어가항(充於街巷). 각석밀위노사(刻石蜜爲盧舍), 유사중국보여(有似中國寶轝)"(성곽안의 길거리에는 토지에서 나는 것이 없는 것이 없다. 사방에서 몰려드니 온갖 물건이 있으며 값도 싸다. 비단과 보배가 시장에 가득하다. 낙타, 말, 나귀, 노새가 길거리를 채운다. 석청을 깍아 상을 만들고, 중국의 가마와 비슷한 것도 있다). 이를 보면, 이때의 대식국은 물산이 풍부하고, 풍성한 경제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의 기록은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한다. "능견기저(綾絹機杼), 금은장(金銀匠), 화장(畵匠), 한장기작화자(漢匠起作畵者), 경조인번숙(京兆人樊淑), 유자(劉泚); 직락자(織絡者), 하동인(河東人) 악환(樂䁵), 여례(呂禮)" <통전>에 남아 있는 <경행기>의 원문중의 내용은 분명히 두우가 가장 뛰어난 내용이라고 생각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소수의 남아 있는 내용중에, 번숙, 유자, 낙환, 여례라는 네 명의 이름이 남아 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는 설명해준다. 두환이 서행을 할 때, 혹은 두환이전에, 이미 중국의 장인들이 대식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중서교류가 얼마나 밀접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이 네 사람은 자원해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인지, 아니면 두환처럼 군대에 들어갔다가 포로로 잡혀서 온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학자 장일순(張一純)의 <경행기전주>의 고증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논쟁은 이 네 명의 진실한 성명이 있으므로 그들의 신분에 집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식으로 온 원인이 자원인지 포로인지는 당시 당과 대식의 국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찌되었건, 두환은 그들의 이름, 고향과 직업을 기록해 두었다. 이는 이들이 그에게 아주 중요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함께 생활한 동료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두환이 그들의 고향을 이렇게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경행기>에서 이름을 드러낸 몇몇 중국인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인들은 고인의 이주능력을 저평가해왔다. 또한, 고인의 전체 세계에 대한 이해정도를 저평가해왔다. 개방된 성당에서 중원인이 머나먼 서방까지 간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늦어도 한나라말기에 중국인은 이미 로마제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당나라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앞왕조를 초월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지리에 대하여 전면적인 이해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지중해연안의 상황에 대하여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나라의 지리강역으로 보면, 두환이 포로로 잡한 그 해에, 당나라의 국토 서단은 이미 발카쉬 호수(Balkhash Lake)를 넘어섰다. 그리고 서북으로 넓혀가는 추세였다. 당고종때는 당나라의 강역이 전성기에 도달하였는데, 서북방향으로 가장 멀리는 아랄해 일대에 이르러 몽지도호부(濛池都護府)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고대인구의 이주중에서 유동능력이 비교적 강한 것은 상인과 군대였다. 심지어 상인이 더욱 강했다. 당나라의 강역이 이처럼 광활했을 뿐아니라, 그중 일부 상인은 지중해지역까지 진출하여 장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두환은 그저 지중해에 도착했다고 기록된 첫번째 중국인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보다 앞서서 이미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이 머나먼 신비한 땅을 밟았다고.
두환의 아프리카에서의 족적은 기본적으로 <경행기>중 마린국에 대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마린국이 도대체 어디인지는 역대이래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수적인 견해로는 그것이 오늘날 북아프리카 동부와 북아프리카 북부일대라고 본다. 특히 이디오피아, 에르투리아 일대로 본다. 당시 이 지역의 가장 강대한 국가는 악숨(Aksum) 왕조이다. <경행기>의 마린국에 대한 기록은 몇몇에 불과하다. 그 지리적인 개략적 위치화 현지의 물산과 풍모이다. "마린국. 추살라(秋薩羅)국의 서남쪽에 있고, 대적(大磧)을 건너 2천리를 가면 그 나라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검고, 풍속은 사납고, 쌀과 보리가 적고, 초목이 없다. 말은 마른 물고기를 먹고, 사람은 골망(鶻莽, 아라비아대추), 즉 페르시아대추를 먹는다. 장려(瘴癘)가 아주 심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추살라국은 인도아대륙에 있는 국가이다. '대적'은 큰 사막이라는 뜻이다. 확실히 인도에서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을 건너야 마린국에 도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프리카에 있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은 논쟁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한 '이천리'는 설사 보수적으로 잡더라도, 인도에서 서쪽으로 보면 이집트 일대가 된다는데 문제는 없다. 다만 문제의 관건은 '이천리'가 아마도 이 국가의 동부국경선의 위치일 것이라는 것이다. 서부 변방과 핵심위치가 어디인지는 두환이 명백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두환의 족적이 마린국에 이르렀고, 그가 아마도 아랍군대를 따라 함께 출정했을 것이다. 당시의 마린국은 압바스왕조의 통치범위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 허영장(許永璋)은 <마린국은 어디인가?>라는 논문에서 상세히 마린국이 오늘날의 모로코일 가능성을 고증한 바 있다. 북대서양 서부의 지리적 풍모와 문헌죽의 마린국은 확실히 아주 비슷하다. 만일 마린국이 정말 악숨왕조라면 왜 기록에 '쌀과 보리가 적고, 초목이 없다'는 이런 내용이 있겠는가? 이디오피아는 황무지가 아니다. 열대초원의 기후로 현지는 비교적 좋은 농업생산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류가 가장 먼저 발원한 곳도 아마 이 지역일 것이다. 그래서, '초목이 없다'는 것은 이 지역이 사막이라는 것인데, 확실히 이디오피아의 실제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설사 8세기라 하더라도, 현지의 생산조건이 이처럼 저하되었다면, 강대한 악숨왕조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만일 마린국이 압바스왕조에 속하지 않는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곳은 더욱 서방의 바바리안이 살고 있는 곳으로 대체적으로 오늘날의 모ㅗ코, 알제리 일대가 해당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두환은 마린국에 대하여 비교적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당나라사람의 족적이 아프리카대륙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그후 두환은 762년, 상선을 타고 해로를 거쳐 광주로 돌아와서, 다시 고향으로 간다. 그렇게 전설적인 경력을 마감한다. 그러나, 고대중국에서 설사 개방된 성당이라 하더라도, 만리 먼길을 여행하고 돌아온 여행자에데 높이 평가해주지는 않았다. 하물며 두환은 대식의 포로를 지냈다. 이국타향에서 떠돌던 고초와 적막, 그리고 그 중의 무수한 복잡하고 기이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한나라에서 당나라까지, 사서에 먼 나라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상세하지 않다. 그저 몇 마디를 남겼을 뿐이다. '천하'라는 관념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고대인에 있어서 이국의 가치는 주로 조공과 상업무역왕래에 의미가 있다. 상대방이 사신을 파견해서 온다면, 먼 곳에 있든지 가까운 곳에 있든지 모두 '천하'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천하'의 질서는 중원왕조에 정복된 적이 있는 크고 작은 이웃나라들이 포함될 뿐아니라, 중국인들이 잘 모르고, 그다지 알지 못하는 먼 나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때의 로마이든 당나라때의 대식이든 그 관계가 복잡한 것은 오늘날의 국제관계의 시야로 보아서는 안된다. 민족국가의 새념이 나타나기 전에 문화가치이념이 주도하는 '천하'관념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것은 중원왕조의 내재적인 구심력을 향상시켰지만, 통치하는 변방을 더욱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중의 이해득실은 국가판도에서만 체현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세계, 역사에 대한 상상에서도 체현된다. 두환의 경력은 너무나 기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황당무계했을 것이다. 그가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환은 스스로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남긴 몇 마디 그이 후세에 중외교류사를 이해하는 중요문헌이 될 줄은. 아쉽게도 그의 기이한 서행경력에 대한 기록은 너무 적다. 문헌도 부족하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에게 더욱 상세한 사항을 알려줄 수가 없다. 이것은 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만일 두환이 군대를 따라 탈라스로 출정하지 않았더라면, 나중의 기이한 겨력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성당의 군사력과 관련이 있다. 그중의 인과관계나 시시비비는 아프리카 사막에 일어나는 황사바람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아래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