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의 교수들은 왜 직위에 연연하지 않았는가?

중은우시 2018. 12. 3. 10:25

글: 위득승(魏得勝)


서남연합대학("서남연대")의 상무회의기록을 보면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두 글자는 "사직(辭職)"과 "위류(慰留)"이다. 서창파 5호(청화대학 판사처)의 상무회의기록을 예로 들자면, 양무지(楊武之)가 이학원 수학과주임의 직무를 사직하는 서신에 대하여 '위류'를 결의하고; 뇌종해(雷宗海) 선생이 문학원 역사학과 및 사버학원 사지(史地)과 주임의 직위를 사직하는 서신에 대하여 위류를 결의하고, 나상배(羅常培) 선생이 문학원 중국문학과 주임 및 사범학원 문학과 주임의 직무를 사직하는 서신등이다. 그외에도 문일다(聞一多), 예준(倪俊), 풍우란(馮友蘭), 곽병권(霍秉權), 탕용동(湯用彤), 양진성(楊振聲), 진달(陳達), 정천정(鄭天挺), 장위신(張爲申)등이 전후로 상무회의에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행정직무를 사임하겠다고 한다. 그중 장위신 선생의 교직원소비합작사위원회 사임이 허가되는데, 뒤에는 아주 따뜻한 글이 붙어 있다: 조사해보니 장선생이 이 위원회 위원의 직무를 맡은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서 따로 서신을 보내어 감사해야합니다"


이어서, 번제창(樊際昌)과 정천정 두 교수의 사직을 보자. 번제창이 사임한 것은 등록팀사무원 겸 등록팀대리주임의 직무이다. 상무회의는 위류를 의결한다. 얼마 후, 번제창 선생은 다시 사직을 청한다. 상무회의의 의결사항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번제창 선생의 '사의가 확고하고, 만류해도 소용이 없으니,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비교해보면, 서남연대 총무장 정천정 선생의 사직은 더욱 곤란했다. 상무회의는 계속하여 위류를 의결한다. 그러나, 정선생은 계속하여 사임했다. 마지막에는 상무회의가 나서서 타협한다. "정선생이 다른 분을 데려오면 사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하여 심리(沈履)선생이 후임을 맡기로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심리 선생이 이 직무를 받아들인지 1주도 되지 않아 다시 사임을 청하게 된 것이다. 이유는 "몸이 약해서 번잡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남연대 상무회의는 다시 정천정이 복직을 의결한다. 이것은 억지로 맡기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정천정 선생도 이것때문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우리는 모르고 있다. 서남연대의 교수들이 왜 하나같이 행정직무를 원수처럼 여겼는지, 그리하여 사임서가 낙엽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는지.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서남연대 교수들의 8년간의 연구성과는 그후 수십년 전국모든대학의 연구성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아무렇게나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풍우란은 <신리학>을 썼고, 김악림은 <논도>를 썼으며, 화라경은 <퇴뢰소수론>을 썼고, 호보록은 <수리통계논문>을 썼으며, 전목은 <국사대강>을 썼고, 왕력은 <중국어법이론>을 썼다.. 장한인은 <전면철도연선경제지리>를 썼고, 비효통은 <녹촌농전>을 썼으며, 주배원은 <격류론>을 썼다. 오대유는 <다원분자진동광보 와 구조>, <건축중 소리의 낙장현상>을 썼고, 종개채는 <확률론과 수론의 공헌에 대하여>를 썼으며, 마사준은 <원자핵 및 우주방사선의 향학이론>을, 손운주는 <중국고생대지층의 구분>을, 주여화는 <분자중배 및 유기종합론에 관하여>를, 풍경란은 <천강전동기요>를, 이모치는 <공로연구>를, 주광잠은 <시론>을, 고화년은 <곤명핵도등촌토어연구>를, 당용동은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를, 문일다는 <초사교보>를, 진인각은 <당대정치사술논고>를, 정천정은 <발강지지와대음등논문>을, 나정광은 <교육행정>을, 양종건은 <허씨녹풍룡>을, 왕죽계는 <열학문제의 연구>를, 조구장은 <대기의 와류운동>을, 장청상은 <중국상고음악사논총>을, 음법로는 <선한음률초탐>, <당송대국의 내원 및 그 조직>을, 이가언은 <가도연보>를, 번홍은 <자본축적론>을 썼다. 이들 학술논저는 철학, 사학, 문학, 미술, 음악, 자연과학, 사회과학, 응용과학, 고대경적등등을 포함한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 교육부는 모두 6차례의 학술장려활동을 진행했다. 이상에 열거한 것은 모두 교육부 학술심의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하고, 각각 1,2,3등상을 받은 것들이다.


만일, 서남연대 교수의 사직서가 낙엽처럼 쌓였다면, 서남연대 교수들의 학술성과는 과실이 풍성했다. 오늘날의 대학교수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행정직무를 얻기 위하여 온갖 수법을 쓰고 있다. 자연히 학술방면에서 그다지 성과는 없다. 학술부패, 표절같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생각해보면 인문정신의 쇠락이야말로 한 민족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쇠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