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지전(長平之戰) 배후의 역사의문점
글: 서병박(徐兵博)
전국역사에 중요한 일전인 "장평지전"은 역대이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전투는 진나라의 명장이자, 후세인들이 전신(戰神)으로 떠받드는 백기가 지휘한 진,조 양국의 전투이다. 경과는 대체로 이러하다: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한(韓)나라의 상당(上黨)을 공격했다. 수비장수인 풍정(馮亭)은 상당을 조나라에 바치며 투항한다. 조나라는 평원군(平原君, 전국사공자중 1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당을 접수하고 출병하여 진나라를 막는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군대와 진나라군대는 장평에서 만난 것이다. 이 전쟁은 조나라의 '병졸 사십만이 무안군(백기의 봉호)에게 투항하였고, 백기는 거짓말로 속여서 모조리 갱살(坑殺)했다." 사료는 주로 <사기.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유명한 전투의 배후에는 여러가지 역사적 의문점이 숨어 있어서, 우리가 탐구하고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장평지전의 총참전인원수에 '역사적 의문점'이 있다. 사마천이 기록에 따르면, 이번 전투에 진,조 양국이 각각 50여만의 '작전역량'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의 생산력수준(인구생산능력 포함)과 동원능력을 감안하면, 진,조 양국이 그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가 없다. 후세군대에서 출정하면 자주 '백만이라 칭하듯이(號稱百萬)", 장평지전의 쌍방병력수는 '허수'이 성분이 있다. 예를 들어, '전신' 백기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장평지전으로 진나라군대는 절반이상의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이제 진나라가 비록 장평군을 격파했지만, 진나라 병졸이 죽은자가 반이 넘어 국내가 비었다(今秦雖破長平軍, 而秦卒死者過半, 國內空)" 진나라의 총병력이 조나라군대와 같다고 한다면, 약 50만이고, 그렇다면 조군이 투항하기 전에 진군은 이미 20여만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런 병력대비하에서, 조군이 40만을 가지고 20만에게 투항했을 리가 없다. 다른 한펴으로, 승리측인 진나라가 '오십여만' 병력으로 멀리 원정을 떠났다면(작전지역은 진군의 수도인 함양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다),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속하여 3년이상 전투를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후방물자공급을 받으려면 통상적으로 "삼민향일병(三民饗一兵)" 즉 병사 1명당 후방인원 3명이 있어야 한다. 만일 진군이 정말 사마천이 기록한 것처럼 그렇게 수십만의 병력을 투입했다면, 매 사병이 매일 2근의 양식을 먹는 것으로 계산할 때, 매일 100여만근의 양식(그중에 수만필의 말이 먹는 사료를 계산하지 않았음. 그리고 후방인원 자신이 먹는 것도 계산하지 않았음)이 필요하고, 이런 후방공급능력은 당시의 생산력수준으로 보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작전쌍방의 용병방략과 전술상 의문점이 있다. <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조괄은 50만의 조군을 이끌고 응전할 때, 백기는 겨우 2만5천명을 가지고 조군의 후퇴길을 막았고, 5천의 기병으로 조군의 중로를 분할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전쟁원칙을 보면, 이런 병력운용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다. 그리고 당시, 조군이 일단 투항하면 그것은 참수당한다는 것이다(진률에 따르면, 사병은 적군을 참수해야 작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군은 용맹하게 적을 죽이고,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다). 40만의 조나라 강개비가지사가 총사령관인 조괄이 용맹하게 전사하였는데, 투항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그 다음으로, 작전결과와 현대고고학적 발굴간에 의문점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장평고전장에 매장된 시체는 대다수가 옷에 갑옷을 입고 있고, 손에 무기를 든 상태에서 지하에 매장되었다. 이는 '전사'이지 '갱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수량도 그여 수백에서 천명정도이고, 절대로 '사십만'에 이르지 않는다. 장평지전은 문학적인 묘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전쟁임이 틀림없다.
이천여년전의 저명한 군사전투를 원래의 상태로 회귀시키지 못한다면, 아마도 오늘날 군사지휘관에게는 '이상화' '단순화' '공식화'된 사고방식을 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단 우리가 백기가 감히 5천의 병력으로 좁은 전쟁공간에서 45만 조군을 분할했고, 2.5만의 병력으로 40여만의 조군의 퇴로를 차단했다고 한다면, 이런 것은 아마도 군사지휘관에게 잘못된 '작전결심'을 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사기>에서 고의로 전신 백기이 작용을 신격화하려다가, 진나라 최고통치자인 진소왕의 굳은 결심과 장수선택과 운용의 뛰어남을 빠트렸고, 진군의 정예병졸들이 군공작위제도하엣 용맹한 전투기풍을 보였다는 것도 빠트리고, 중장보병을 위주로 하는 진군은 산이많은 상당지구에서 작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는 것도 빠트렸고, 더더구나 진군이 관중과 파촉의 양대양창(糧倉)을 보유하고 있고, 더욱 효율적인 후방운송(수운포함)시스템과 인력자원을 자지고 있었다는 것도 빠트렸다. 예를 들어, 조나라의 실패를 단순히 '지상담병(紙上談兵)'의 조괄 때문이고, 조군의 보병작전능력이 저하되어 있고, 조나라군주는 중요한 순간에 반간계에 걸려 장수를 바꾸고, 전군지휘관의 용인에 간섭하는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데 하여 후인들이 역시인식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맹점에 쉽게 빠지게 할 수 있다.
여러 사료를 비교해 보면, 조나라군대의 총사령관 조괄은 기실 <사기>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지상담병'만 할 줄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장평지전에서 적극적으로 출격하였는데, 이는 3가치 측면에서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첫째, 조군은 양식이 부족했다. 후방조달이 끊겨서 반드시 속전속결전략을 써야만 했다.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없다. 둘째, 조군의 국왕이 급히 진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해서, 전선의 장수를 교체하였다. 조괄을 총사령관으로 교체한 목적은 바로 속전속결로 진나라와 전투를 벌이라는 것이다. 셋째, 염파는 전쟁의 전기에 연전연패했다. 마땅히 수세에 몰린 조군은 '견벽(堅壁)'(조군은 조무령왕시기에 건립한 적극적인 진격을 하는 강대한 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방어와 산간작전을 잘하는 중장보병건설에서는 진나라보다 낙후되었다)에 약하다. 그래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장평지전을 돌아보면, 조군이 군사적으로 패배하게 된 근본원인은 조나라의 종합국력과 군사실력이 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데 있었다. 조왕의 전략적 지시나 이전의 염파의 연전연패나, 진나라의 반간계나 조괄의 잘못된 작전계획이나, 그 배후에는 모두 종합국력의 강약대비와 군사역량의 우열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는 상앙변법후, 능력있는 군주가 장기간 나라를 다스리며 악전고투를 벌여왔다. 통일천하의 국가의지가 반석처럼 굳었다. 거국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체제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 조나라를 비롯한 다른 육국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역사운행의 최종귀결점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시사한다: 강대한 종합국력 위에 국가의지가 굳건하면, 백전백승이다.
사실상, 유가문화의 계승자이자 전파자인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법치'를 입국정신으로 한 진나라에 대하여 강렬한 '문화대립'의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역사서를 저술할 때, 의식적으로 장평지전을 과장함으로써 후세에 진나라의 잔폭과 악정의 인상을 주려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한나라와 대비시키려 했다. 고증에 따르면, 사마천의 6대조 사마근(司馬靳)은 백기의 부장(副將)으로 장평지전에 참가했다. 나중에 진왕이 백기를 의심하여 백기와 함게 사사된다. 그러다보니 사마천으로서는 국가의 원한과 집안의 원한이 모두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진군의 '잔혹'함을 과장되게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장평지전처럼 역사의 구름에 가려져 있는 저명한 전투사례들의 원래 모습을 찾아냄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고인의 지혜를 취하며, 미래에 승리를 거둘 방법을 탐핵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