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나라 멸망후 천하를 상징하는 구정(九鼎)은 어디로 갔을까?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주나라때 천하의 구주(九州)를 대표하던 구정이 진나라의 통일후에는 왜 보이지 않게 되었을까?
전해지는 바로는 하(夏)나라초기, 하왕(夏王) 대우(大禹)는 천하를 구주로 나누었고, 구정을 주조하여, 구주를 상징했다. 전국 구주의 명산대천, 기이지물을 구정에 새겨 놓았다. 하나의 정은 하나의 주를 상징하고, 구정을 하왕조의 도성에 모아놓았다.
상탕(商湯)이 하걸(夏桀)을 몰아낸 후, 구정을 상나라의 도성으로 옮긴다.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구정을 그 곳으로 옮겨갔다.
주무왕(周武王)이 상을 멸망시킨 후, 일찌기 상나라의 도성인 조가(朝歌)에 구정을 전시한다. 주성왕(周成王)이 즉위한 후, 주공단(周公旦)이 낙읍(洛邑)을 만들고, 구정을 이곳으로 옮긴다. 그리고 주성왕은 친히 제례를 주재하면서 구정을 명당(明堂)에 모셔둔다.
낙양시 주공묘(周公廟)에는 정정당(定鼎堂)이 있고, 묘의 밖에 있는 도로른 정정로(定鼎路)라고 부른다.
동주(東周)가 개시된 후, 주왕실은 쇠락하며, 각 제후들이 왕권을 노리기 시작한다. 주정왕(周定王)때 초장왕(楚莊王)이 처음으로 낙읍에서 "문정지경중(問鼎之輕重)"(정의 경중을 묻다)하나, 주나라 대부인 왕손만(王孫滿)에게 거절당한다. 나중에 초령왕(楚靈王)도 한때 문정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국내에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진혜왕(秦惠王)때, 장의(張儀)는 책략을 세워서 구정을 빼앗아와서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을 한다. 초경양왕(楚頃襄王), 제나라 국왕도 보정다툼에 끼어든다. 주난왕(周赧王)은 두 나라 및 위, 한나라간을 주선하며 상호 제약하게 하여 구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진무왕(秦武王) 3년, 진무왕은 낙양으로 들어가 정위에 길상의 도안과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중원문화를 선망한다. 그래서 이 정을 가지고 돌아가고자 한다. 진무왕은 전력을 다하여 정을 반척(半尺) 들어올렸는데, 나무 힘을 과하게 쓰는 바람에 정을 떨어뜨려 그의 정강이뼈(脛骨)가 절단되고, 기절한다. 그리고 그날 밤에 피를 너무 맣이 흘려 사망하고 만다.
하왕조의 대우가 만든 구정은 천하의 구주를 상징하고, 황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상나라는 하를 멸망시킨 후 구정을 가져갔고, 주나라도 상을 멸망시킨 후 구정을 가져간다. 동주의 후기에 진나라가 주를 멸망시키는데, 구정을 가지고 갔을까?
그러나, 진나라가 천하통일한 후, 구정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사마천의 <사기.봉선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주나라의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망하면서 정(鼎)은 윤몰(淪沒)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다."
이상의 구정에 관한 문헌기록을 보면 최소한 주나라 말기까지는 구정이 낙양성에 남아 있었다. 전히지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가 주나라를 멸망시킨 후, 다음 해에 주왕실의 구정을 함양(咸陽)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시황이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을 때, 구정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당시의 사서기록에 따르면, 구정의 행방에 대하여는 4가지 설이 있다ㅣ
첫째, 구정은 낙양에 남아 있었고, 주왕은 구정을 배장하거나 혹은 구정을 훼손하여 돈을 주조했다.
왕선겸(王先謙)은 <한서보주.교파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동주의 왕실이 쇠락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어진다. 전국시대 실력이 강했던 제후국은 호시탐탐 중원통일을 노리고, 주나라의 지위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왕권과 "천명소귀(天命所歸)"를 상징하는 구정은 자연히 각 제후국들이 반드시 빼앗고자 하는 희세국보가 된다; 게다가 이때의 주왕실은 재정이 곤란해서, 수입이 지출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구정을 훼손하여 동전을 주조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구정의 행방을 모른다고 말한다.
근대에 출토된 동주정(東周鼎)과 서주정(西周鼎)을 비교하면, 벽(壁)이 아주 얊다. 이는 동주의 재정이 이미 곤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주후기, 주왕을 배장할 때 구정을 묘안에 넣어, 구정을 제조하는 비용(천자구정)을 절약하기도 하고, 구정이 약탈되어 빼앗기는 것을 막기도 했다.
2. 진나라가 주를 멸망시킨 후 함양으로 옮겨오고, 나중에 구정을 녹여버린다.
사마천은 <사기>의 주, 진 두 본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진소양왕52년(기원전255년), 주난왕이 죽고, 진나라는 낙읍에서 구정을 빼앗아 진으로 가져간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녹이고 12금인(金人)을 만든다. 그대 이 구정도 같이 녹여버렸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봉선서>에는 이렇게 적였다: "주나라의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망하면서 정(鼎)은 윤몰(淪沒)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다." 그 본인의 기록이 이렇게 모순된다.
진나라가 주를 멸하고 구정을 함양으로 가져갔다면, 그것은 분명히 큰 일이다. 진나라는 이것을 분명히 기록했을 것이다. 심지어 건축물을 지어서 그것을 놓아두었을 것이고, 대거 선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3. 구정은 팽성(彭城, 강소성 소주)의 사수(泗水) 아래에 침몰했다.
동한의 저명한 사학가인 반고(班固)는 그가 쓴 <한서>에서 구정의 행방에 대하여 사료 하나를 보충해 놓았다. 주현왕(周顯王)42년(기원전327년) 구정은 팽성의 사수 아래에 침몰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시황이 남순할 때, 수천명을 보내어 사수에서 건져내려고 했는데, 강물이 너무 세서,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문점은 구정이 어떻게 수천리 떨어진 사수까지 옮겨갔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의문점은 사수에서 정장 유방(劉邦)이 나와서 한왕조를 건립했는데, 이는 유방의 출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이야기로 보인다.
4. 왕방이 신(新)왕조를 건립하였을 때, 국고가 비어서 이 구정을 녹인 후 동전으로 만들었다.
이 주장은 하주 황당하다. 사마천은 서한 때의 인물인데 이미 구정이 소실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주난왕 희연(姬延, 약기원전336년-기원전256년)은 동주의 마지막 군주이다. 기원전315년-기원전256년까지 59년간 재위했다. 기원전256년, 주난왕이 사망하고, 주나라백성들을 동으로 도망친다. 칠년후 진장양왕이 동주국을 멸망시킨다.
진무왕이 정을 든 사건은 주난왕 시기에 발생했다. 이를 보면 이때의 주왕세력은 아주 약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주나라의 멸망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주난왕은 가난하여 경내의 부자들에게 돈을 빌려 전쟁을 수행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채무를 갚을 능력이 안되어 빚을 피해 숨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주난왕이 죽었ㅇ르 때는 이미 정을 주조하여 배장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리서 망국후에 구정이 약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구정을 배장했을 것이다. 그후에 구정은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