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을사천(武乙射天): 은상(殷商)말기의 수수께끼같은 사건
글: 황수(黃帥)
<사기> 본기편의 전3장을 읽어보면, 사마천이 오제와 하상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상당히 간략하게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통치자에 대한 기록은 겨우 이름만 있고, 어떤 경우는 개략적인 재위기간만 있다. 더 많은 경우는 그저 한마디만 하고 지나간다. 누가 '세워졌고' 누가 '죽었고' 수십년의 풍우를 이렇게 한 마디로 언급하고 지나갔다. 사마천이 볼 수 있었던 상고의 자료는 아마도 아주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태사공의 기술은 엄격하게 고증하기로 유명하다. 글자 한자를 금 하나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후인들은 거기에서 여러하지 흔적들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후세의 고고학 발굴결과와 서로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은상말기의 "무을사천"의 이야기는 <사기>에 아주 기이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무을(武乙)에 대한 기록은 길지 않다: "제무을무도(帝武乙無道), 위우인(爲偶人), 위지천신(謂之天神). 여지박(與之博), 영인위행(令人爲行). 천신불승(天神不勝), 내륙욕지(乃僇辱之). 위혁낭(爲革囊), 성혈(盛血), 앙이사지(卬而射之), 명왈사천(命曰射天). 무을엽어하위지간(武乙獵於河渭之間), 폭뢰(爆雷), 무을진사(武乙震死)."(개략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무을은 무도한 왕이다. 그는 나무로 사람의 모양을 만든 다음에 그것을 천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와 장기(바둑)를 둔다. 신하를 시켜 천신 대신에 두게 한다. 천신이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그를 모욕했다.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가득 넣어서 매달고는 올려다보며 쏘았다. 그리고 이것을 '사천' 즉 천신을 쏜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에 무을은 황하와 위하의 사이로 사냥을 갔는데 벼락이 내리쳐서 무을이 맞아 죽고 만다)
이 간단한 문자기록에서 우리는 최소한 3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첫째, 무을은 현명한 상왕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도'했다. <사기>를 잘 아는 독자라면 이 두 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만일 태사공이 이 역사인물에 대하여 아주 미워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폄하하는 색깔이 이처럼 선명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에 제왕을 평가하면서 '무도'하다고 하는 것은 거의 그는 혼용무능하고 흉악잔폭하다고 하는 것이나 같다. 둘째, 무을은 소위 '사천'의 방식으로 '천신'(우상화된 천신)을 공격했다. 이런 행위는 중외고금의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다. 이경반도(離經叛道)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무을의 죽음이 아주 기이하다. 사냥때 벼락을 맞아 죽었다. 제왕중에서 보기 드물게 보는 죽음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료를 보면, 제왕의 '사천'은 무을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기>의 <귀책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걸위와실(桀爲瓦室), 주위상랑(紂爲象郞)....살인육축(殺人六畜), 이위위낭(以韋爲囊), 낭성기혈(囊盛其血), 여인현이사지(與人懸而射之), 여천제쟁강(與天帝爭疆)... " 사마천은 '사천'의 일을 걸,주와 같은 폭군에게도 적었다. 그 광경은 무을과 거의 같다. 그래서 이것은 걸,주의 무도한 행위를 과도하게 과장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 다른 저명한 '사천'의 일은 <사기.송미자세가>에 기록된 송강왕(宋康王)의 이야기이다: "군언십일년(君偃十一年), 자립위왕(自立爲王), 동패제(東敗齊), 취오성(取五城); 남패초(南敗楚), 취지삼백리(取地三百里); 서패위군(西敗魏軍), 내여제위위적국(乃與齊魏爲敵國). 성혈이위낭(盛血以韋囊), 현이사지(懸而射之), 명왈사천(命曰射天). 음어쇄부인(淫於灑婦人). 군신간자첩사지(群臣諫者輒射之)..."
다만, '무을사천"후에 발생한 뇌격사건은 이 사건을 더욱 범상치 않게 만든다. 이것은 고인의 '천도보응(天道報應)'의 설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태사공은 <사기>에서 '무을진사(武乙震死)'라는 말을 썼는데, 다른 상왕의 죽음에 대하여는 대부분 '붕(崩)'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을에 대하여 선명하게 폄하하는 평가와 서로 들어맞는다.
<사기.은본기>를 읽어보면, 역대 상왕의 죽음은 거의 무도 '붕'이라고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설사 태갑(太甲), 양갑(陽甲)과 같이 논쟁이 있는 상왕(예를 들어 그의 통치시기에 '은쇠(殷衰)'의 일이 일어난다)에 대하여도, 각박하게 '사(死)'라고 적지는 않았다. 당연히 주왕(紂王)에 대하여는 "주주입(紂走入), 등녹대(登鹿臺), 의기보옥의(衣其寶玉衣), 부화이사(赴火而死)"라고 하여 '사'로 적었는데 그건 이상할 것도 없다. 단지, 무을만 주왕과 같은 평가등급에 놓은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사료에, 무을이 황음무도한 상왕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와 반대로 무을이 '천신'에 도전한 것은 <사기>에 그저 이름만 남긴 다른 상왕들과 비교하여, 통상적인 규칙을 깨는 일을 더 많이 벌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학술계의 어떤 견해는 은상말기에 왕권과 신권의 투쟁이 격렬했고, '무을사천'과 같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행위는 바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제사이익집단에 도전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다만 아쉽게도 실패했고, 야외에 사냥을 나갔을 때 의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진사(震死)' "무도(無道)'의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이런 견해는 어느 정도 이치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해석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명한 고고학자 장광직(張光直) 선생이 <상문명>에서 말한 것처럼, "상나라때의 종교는 상나라의 국가기원 및 합법화와 불가피하게 서로 얽혀 있다....상왕의 모든 권력은 신권통치에서 나온다." 상왕 그 자체가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이 하나로 합쳐진 존재였던 것이다. 설사 '천신'에 도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살적일천(殺敵一千), 자손팔백(自損八百)"의 장사이다. 무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다만, 이런 사고의 배후에 도사린 문제는 바로, "천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신' 배후의 문제를 잘못 이해했다면, 그저 그것을 널리 신권의 역량으로 이해했다면, 혹시 개념을 잘못쓴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점에서 상나라 종교문화로 되돌아가서 볼 필요가 있다.
고적문헌에서 상나라종교 특히 제사문화에 대한 기술은 많지 않다. 다만 대량으로 출토된 갑골문은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자료를 보면, 상나라종교는 종류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토템숭배가 있다. 세상사람들은 "현조생상(玄鳥生商)"의 이야기를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다. 여기서 따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중의 조상숭배도 아마 토템숭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자주 주(周)나라 사람들은 조상숭배에 빠져있었다고 얘기하는데, 기실 상나라사람도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역대로 업적을 남긴 상왕은 후세의 풍조우순(風調雨順), 국부민강(國富民强)을 비는 정신적인 기탁이었다.
그리고 자연신숭배와 비자연신숭배가 있다. 일월성신, 풍우뇌전은 모두 고인들이 보기에 통신지물(通神之物)이다. 매번 하늘이 바뀌면, 그들은 이것을 신령이 그들에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세상에 신호를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갑골문에는 '출일입일(出日入日)'과 같은 류의 기록이 있다. 상나라사람의 눈에 태양의 운행과 궤적의 변화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자연규율의 현상이지만, 당시에는 군사정벌 내지 일상농업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갑골문에도 신령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정제급사월령우(貞帝及四月令雨)", "정생팔월제불기영다우(貞生八月帝不其令多雨)"같은 류의 복사(卜辭)가 있다.
비자연신숭배로는 일종의 자연과 범진(凡塵)을 초월한 역량에 대한 숭배가 있다. 학술계는 이를 왕왕 '상제숭배(上帝崇拜)'라고 부른다. 갑골문에는 '정제(貞帝)'류의 복사는 바로 유사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상나라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과 지표면을 흐르는 강물 그리고 자신의 인생운명은 모두 '제'의 신비한 역량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다만, 갑골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제(帝)'와 무을이 도전한 '천신(天神)'이 같은 것일까? 태사공은 갑골문을 본 적이 없다. <은본기>에서 쓴 '천신'은 명확하게 가리키는 것이 있을까? 혹은 아마도 복사에서 대응하는 답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저 <사기>등 문헌에서 단서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자료를 찾다보니 <상서>의 <상서.탕고(湯誥)>에서 의외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상탕(商湯)이 "기출하명(旣黜夏命), 복귀어박(復歸於亳)"할 때 한 말이다: "하왕멸덕작위(夏王滅德作威), 이부학어이만방백성(以敷虐於爾萬方百姓), 이만방백성(爾萬方百姓), 이기흉해(罹其凶害), 불인도독(弗忍荼毒), 병고무고어상하신저(幷告無辜於上下神袛). 천도복선화음(天道福善禍淫), 강재어하(降灾於夏), 이창궐죄(以彰厥罪). 사대소자(肆臺小子), 장천명명위(將天命明威), 불감사(不敢赦). 감용현모(敢用玄牡), 감소고어상천신후(敢昭告於上天神后), 청죄유하(請罪有夏)...이유선(爾有善), 짐불감폐(朕弗敢蔽), 죄당짐궁(罪當朕躬), 불감자사(弗敢自赦), 유간재상제지심(惟簡在上帝之心)...." 여기에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상제', '천신', '천도'의 개념을. 이 말을 하는 역사현장을 돌이켜 보면, 후인들은 상탕이 하를 멸망시킬 때의 의기풍발하고, 천도가 교체되고, 천신이 위력을 발하는 신앙을 상상해볼 수 있다.
무을이 도전한 '천신'이 혹시 조상 성탕이 말한 '천신'과 같은 개념일까? 태사공이 <사기>를 쓸 때, 분명히 관련 자료도 참고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자료를 보고나서 '천신'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로 결정했는지는 후인들이 알 수가 없다. 다만, 여기의 단서에서 '천신'과 '상제'간의 관계는 점점 더 명확해진다고 볼 수 있다.
기실, 선진(先秦)이 문헌에서, '천신'은 여러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주례>에는 이런 말이 있다: "대종백지직(大宗伯之職), 장건방지천신인귀,지시지례(掌建邦之天神人鬼地示之禮), 이좌왕건보방국(以佐王建保邦國)" "이동일지치천신인귀(以冬日至致天神人鬼), 이하일지치지시물매(以夏日至致地示物鬽), 이회국지흉황(以禬國之凶荒), 민지예상(民之禮喪)."등등. 이를 보면, '천신'의 의미는 풍부하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자연과 귀신등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자연신숭배'이다. 무을은 '은도쇠미(殷道衰微)'의 위험을 보았고, 더더욱 그는 '비자연신숭배(천신숭배, 조상숭배등)'에 잠재된 문제를 느꼈을 것이다. 무을은 실패한 '사천'자이다. 만일 성공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그 신비한 고대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톤처럼 종교개혁과 정치변혁을 통해 국가를 장악했을 것이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무을의 행위는 확실히 정도를 벗어났다. 그는 아마도 실패한 이상주의자이거나 혹은 그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많은 일반사람들은 역사무대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왕이 어찌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은상말기에서 무왕벌주(武王伐紂)까지의 시기에 은상의 쇠퇴는 이미 막을 수 없었다. 통치집단내부에서도 분열과 상호투쟁의 국면이 나타났다. 무을이 '사천'을 선택한 진정한 의도는 아마도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 천신과의 경쟁을 통하여 새로운 왕권을 만들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그가 역사에 남긴 것은 느낌표가 아니라 줄임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