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부(許負): 한고조 유방이 19살의 그녀를 제후로 봉하다.
글: 효풍모우(曉風暮雨)
한나라5년(기원전202년), 유방이 황제를 칭한 후, 공신들에게 봉상을 내린다. 이때 나이 겨우19살의 여인이 명자정후(鳴雌亭侯)에 봉해진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왜 한나라의 개국공신들과 함께 제후로 봉해질 수 있었을까?
이 여자의 이름은 허부이다. 그녀는 관상을 잘 보았다. 진말한초의 많은 유명인물들의 관상을 봐주었고, 그녀의 예언은 모두 들어맞았다.
1. 위왕표(魏王豹)
위왕표는 항우가 분봉한 19로제후중 한 명이다. 초한전쟁이 발발한 후, 한(漢)군진영에 가담하고, 제후연합군과 함께 서초국의 수도인 팽성(彭城)을 공격한다. 연합군이 항우를 격패시킨 후, 위왕표는 비록 유방과 함게 형양(滎陽)으로 퇴각하였지만, 그는 항우가 이길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친의 병을 이유로 군대를 이끌고 서위로 돌아간다.
위왕표가 돌아가는 동안에 부인 박씨(薄氏)가 관상가를 불러서 관상을 봤다. 그녀가 바로 허부이다. 허부는 박씨에게 부귀상이 있다고 말하고, 앞으로 낳은 아들이 천자(天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위왕표는 한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제후이다. 후궁에 미녀가 많았다. 박씨는 그 중에서 그다지 출중하지 않았는데, 관상을 본 후에, 위왕표는 박씨를 전적으로 총애한다. 그녀와의 밤을 함께 하며 장래의 '천자'를 만들고자 했다.
기실 위왕표는 너무 일찍 좋아한 것이다. 허부의 예언은 박씨가 천자를 낳는다는 것이지, 천자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위왕표가 한군진영에서 떠나기로 선포한 후, 한신에 의해 멸망한다. 그는 포로로 되어, 형양으로 끌려간다. 유방은 그를 여전히 장수로 임명하고 형양을 방어하게 한다. 얼마 후, 형양이 초군의 맹공을 받게 되고, 한장(漢將) 주가(周苛)와 종공(樅公)은 위왕표가 배신할 것을 우려한다. "배신하는 신하와는 함게 성을 지킬 수 없다"며 그를 주살한다.
박씨등 미녀들도 포로로 잡혀 한나라의 임시수도였던 역양(櫟陽)으로 보내어진다. 박씨는 '직실(織室)'로 배치되는데, 나중에 유방과 하룻방을 지내게 된다. 그것은 유방과의 유일한 밤이다. 묘하게도 박씨는 회임하고 남자아이를 낳는다. 이름은 유항(劉恒)인데, 대왕(代王)에 봉해진다.
박씨는 도돵양회하며, 사람들과 잘 지냈고, 유항도 유약하고 무능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하여, 여후의 동정을 사서, 유방이 죽은 후에 독수에 당하지 않을 수 었었다. 그리고 봉지인 대국으로 가서 생활한다.
여후가 죽은 후, 주발, 진평은 여씨일족을 죽이고,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렇게 하여 봉건사회의 첫번째 태평성세 "문경지치(文景之治)"가 시작된다.
2. 등통(鄧通)
한문제에게는 총신이 있었는데, 이름이 등통이다. 그는 아부에 능하여 한문제의 환심을 산다.
한문제는 종기를 앓았는데, 등통은 자신의 입으로 고름과 피를 짜내기도 했다.이 일로 인하여 성어를 남기게 된다: "전용지치(吮癰舐痔)" 이는 비굴하게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렇게 등통을 평가했다: "그러나 등통에게 다른 재주는 없었다...스스로 조심하며 윗사람에제 잘 보일 뿐이었다."
한문제는 등통을 상대부로 임명하고, 그에게 돈과 재물을 내린다.
허부는 총신 등통의 관상을 봐주는데, 허부는 등통의 관상은 장래 굶어죽을 상이라고 말한다. 한문제는 그 일을 알고난 후에 이렇게 생각한다. 등통의 빈부는 짐에게 있는데, 어찌 굶어죽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촉군의 엄도에 있는 구리광산을 등통에게 내린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돈을 주조하도록 권한을 준다. 그리하여 등통이 주조한 돈이 천하에 유통되었고, 엄청난 부를 쌓는다. 그의 재산 규모는 마찬가지로 돈을 주조할 수 있었던 오왕(吳王) 유비(劉濞)에 바로 다음갈 정도였다.
한문제가 죽은 후, 한경제가 즉위하고, 등통은 면직된다. 구리광산은 몰수당하고, 가산도 몰수당한다. 결국, 등통은 길거리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에는 굶어서 죽는다.
3. 주아부(周亞夫)
주아부는 서한의 개국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일찌기 허부에게 자신의 관상을 봐달라고 한 적이 있다. 허부는 그의 관상이 장래 굶어죽을 상이라고 말한다. 주아부는 가가대소하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규모가 엄청난 "칠국의 난"이 발발한 후, 주아부는 군대를 이끌고 삼개월간 싸워서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나 전략배치문제로, 한경제의 친동생 양왕(梁王) 유무(劉武)에게 밉보인다. 유무는 계속하여 두태후(竇太后)와 한경제에게 주아부를 비방하는 말을 한다. 주아부는 전공이 혁혁하여 승상에 임명되었느나, 나중에 태자 유영(劉榮)의 폐위에 반대하여 한경제의 불만을 산다.
얼마 후, 주아부는 현경제가 왕황후의 오빠인 왕신(王信)과 흉토의 항장(降將)을 제후로 봉하는 것에 반대하여, 한경제와의 관계가 완전히 결렬되고 그는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한번은 한경제가 주아부를 불러서 연회를 베푼다. 그러나 젓가락을 놓아두지 않았다. 그러자, 주아부가 바로 환관을 불러서 가져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한경제는 한 마디 한다: "이것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는가?" 주아부는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엿지만,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를 청한다. 한경제가 '일어나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주아부는 바로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한경제는 "이 자는 어린 황제의 신하로 남아있을 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한경제는 이미 어린 유철을 태자로 앉혔다. 그러나 태자가 성년에 이르지 못하여, 일단 한경제가 죽고 나면, 그가 공로를 내세워 오만하며, 성격이 날카로운 주아부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신강주약(臣强主弱)'의 상황이 초래될 것을 우려한다. 그렇게 되면 유씨강산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경제는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수십년후, 한무제가 유불릉을 태자오 앉히면서 태자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엿는데, 목적은 한경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주아부의 아들은 갑옷을 사서 주아부가 죽은 후에 부장품으로 쓰려고 했는데, 누군가 이를 고발한다. 한경제는 이 사건을 추궁하며, 주아부를 정위(廷尉)에게 보내어 심리하게 한다. 주아부는 갑옷이 부장품이라고 변명하지만, 정위는 한경제의 뜻을 헤아려셔 주아부가 죽어서까지 모반하려고 기도했다고 모욕한다. 주아부는 대노하여, 곡기를 끊고, 5일후 피를 토하며 죽는다. 1년후, 한경제는 주아부의 동생 주견(周堅)을 평곡후{平曲侯)로 고쳐 봉한다.
허부의 주아부에 대한 예언도 그대로 적중했다.
허부는 나중에 깊은 산에 은거하는데, 그 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허부는 나중에 관상가업계의 조사로 받들어진다. 후인들은 허부의 이름을 빌어 많은 책을 지었다.
허부의 후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한무제 시기의 호협 곽해(郭解)이다. 곽해는 허부의 외손이며, 한무제는 관동의 부호들을 무릉으로 옮겨와서 살게 하는데, 곽해도 이사한 사람중 하나이다. 당시 대장군 위청이 그를 빼달라고 부탁까지 하는데, 이를 보면 곽해의 명성이 아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한 서생이 곽해를 비판한다. 그러다가 곽해의 문객에 의하여 혀를 뽑히고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은 조정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곽해도 한무제에 의해 멸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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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부가 박희, 등통, 주아부의 관상을 봐준 일은 기실 후인들이 3자의 실제 운명과 엮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사후제갈량이라 할 수 있고, 믿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를 그저 밥상머리의 얘깃거리 정도로 여겨야 할 것이다. 사람의 관상과 운명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허부의 관상보는 능력은 나중의 관상가들이 일부러 치켜세웠다. 자신의 조사를 치켜세우지 않으면 누가 그들에게 관상을 보러 올 것인가?
허부가 정말 신통력이 있다면, 왜 자신의 사위(곽해의 부친, 한문제에게 처형을 당한다)를 위해 살신지화를 없애주지 못했겠는가? 왜 외손자 곽해의 멸족지화를 막아주지 못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