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장평지전(長平之戰)에 대한 7가지 의문

중은우시 2018. 8. 29. 10:34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기원전262년, 진나라의 백기(白起)는 한(韓)을 공격하여, 야왕(野王, 지금의 하남성 심양시)을 함락시키고, 상당(上黨)의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차단한다. 상당군장(上黨郡長) 풍정(馮亭)은 진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원치 않아, 상당지구 17개 성을 모조리 조(趙)나라에 바친다. 진나라는 이미 손에 넣은 고기를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고, 이렇게 하여 장평지전이 시작된다.


1. 조나라는 왜 상당을 받았을까?


상당은 역대이래로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이다. 북으로 올라가면 조나라의 옛수도 진양(晋陽,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서남쪽)을 취할 수 있고, 동쪽으로 나가면 태행산을 넘어 직접 조나라의 도성 한단(邯鄲)을 위협할 수 있다. 상당은 조나라의 병풍과 같은 곳이다. 상당을 넘어서면 바로 평원지구이고, 조나라의 도성은 더 이상 막을 험준한 지형이 없어지게 된다.


나중에 진시황이 육국을 멸할 때, 진나라는 바로 상당을 지나 한단으로 진격한다. 상당지구는 조나라에 있어서 지켜내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2. 이 전쟁은 얼마나 오랫동안 싸웠는가?


<사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장평지전은 5개월 내지 6개월이 소요되었다. <여씨춘추>에는 3년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불위는 조나라에서 장사를 했고 나중에 진나라의 재상을 십여년 지냈으므로,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여씨춘추>의 기록이 더 믿을만 하다고 본다.


전국시대 후기에 진나라의 영토는 아주 넓었다. 3년의 전쟁도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외에, 조나라는 북방의 흉노와 연나라를 막아야 했다. 서쪽에서도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그 외에 상당은 산지(山地)여서 군량운송이 어려웠다. 이것들도 조나라가 버텨내기 어렵게 만든 근본원인일 것이다.


3. 다른 나라들은 왜 조나라를 도우지 않았을까?


5국이 조나라를 도우지 않은 것은 각자 이유가 있다: 한나라는 거의 멸망직전이어서 상당도 포기할 지경이었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위나라에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초나라와 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구원해주기 어려웠다; 연나라의 멍청한 국왕 희희(姬喜)는 진나라에 매수되어 후방을 교란했다(연나라는 진나라와 결탁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의 맛을 보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상당지역은 산지여서 위,제,초가 쉽게 구원병을 보낼 수도 없었다.


4. 염파(廉頗)의 전적은 어떠했는가?


장평지전을 2년여간 이끌면서 염파가 지휘하던 기간동안 조나라는 여섯 위(尉)를 잃는다. 그리하여 수세로 전환한다. 진간(秦簡)과 다른 고고발굴증거에 따르면 6위가 이끄는 병력은 개략 만명가까이 된다.


전국시대에 조나라는 야전(野戰)으로 유명했다. 염파는 적극적인 공격으로 유명했다. 조나라군대가 1만명이나 잃으면서 왜 방어로 전환했을까? 아마도 전장에서의 진나라병력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염파는 할 수 없이 장평을 수비하게 되고, 수비전략으로 진나라에 대항한 것이다.


5. 조괄(趙括)의 능력은 어떠한가?


기원전280년, 조혜문왕 조하(趙何)는 조사(趙奢)를 장수로 임명하여 제나라의 맥구(麥丘, 지금의 산동성 상하 서북쪽)를 공격하게 한다. 조괄은 이 전투에 참전하여 계책으로 맥구를 차지한다. 그후 조사가 마복군(馬服君)으로 봉해지는 알여지전(閼與之戰)에서도 조괄은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20년후의 장평지전에서 조괄은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해 포위에 빠지게 된다. 이를 보면 그는 그저 참모형의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6. 40만조군은 왜 포위되었는가?


조괄은 조군을 이끌고 진군을 공격한다. 백기는 패전하는 것처럼 퇴각하고, 조군은 진군의 군영까지 돌진한다. 이때, 진군의 2만5천명의 기병(奇兵)이 나타나서 조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또 다른 5천명의 기병(騎兵)이 조군의 군영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막는다. 조군은 둘로 나뉘고, 군량을 받을 길도 막혀 버린다.


장평지전의 전장터는 무흘령(武訖嶺), 진관(秦關), 대량산(大糧山)으로 둘러싸인 삼각지이다. 지형은 완만하고, 주변은 구릉같은 산이다. 중간은 평지이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은 아니다. 조괄은 40만대군을 이끌고 왜 3만명의 포위를 돌파하지 못했을까?


7. 쌍방의 병력은 얼마였을까?


고전장터의 지형을 보면, 조군은 산골짜기로 진격하고, 진군은 지형을 이용해서 막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군이 겨우 3만의 복병으로 조군 40만을 포위하고 조군은 포위망을 뚫지 못했을까?


1995년, 고평시 장평지전유적지에서 대량의 시신과 도폐(刀幣), 포폐(布幣), 반량(半兩), 전두(箭頭), 대구(帶鉤)등 문물이 출도된다. 1호갱에서 겹쳐서 쌓여있는 유골이 있는데, 어떤 시신은 팔과 다리가 부러진 흔적이 명확히 있었다. 분명히 칼을 맞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흉강내에 화살촉이 있고, 어떤 사람은 몸만 있고 머리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 묻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1호갱과 부근의 2호갱은 모두 심갱(深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연적인 골짜기처럼 느껴지고, 진군이 전쟁포포의 시신을 묻기 위하여 일부러 판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 보면, 유적지의 갱에 남아있는 유골은 살해된 후에 천연적인 골짜기에 던져넣은 후에 묻은 것이다. 이것은 전쟁중의 사망이지, 그후에 산채로 묻힌 것은 아니다. 유골의 숫자로 보면 40만에는 훨씬 못미친다


염파가 지휘할 때 1만의 병력을 잃고서 면직당한 것을 보면, 조군의 수량은 40만에 훨씬 못미칠 것이다. 당시 조나라의 인구는 고증에 따르면 400만가량이다. 1호는 5명이고, 5호에 1명의 병사가 징집되는 정상적인 동원상황을 보면, 조나라에는 모두 15만의 병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조나라는 일부 군대로 흉노를 막아야 했고, 연나라의 기습도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장평지전의 병력은 10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초기 양로대군의 병력은 15만가량이다. 염파가 수비만 했기 때문에, 후기에는 다시 3만가량의 병력을 추가로 출격시킨다. 기본적으로 모든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백기는 적을 깊이 유인하는 계책을 쓰고, 새로 투입된 3만의 군대로 조나라군대를 포위한다.


조괄은 남은 조군으로 4개의 포위망돌파부대를 만들어, 돌아가며 4,5번 시도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괄은 친히 정예부대를 이끌고 포위망돌파를 강행한다. 그러다가 진군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조군은 전멸한다. 진군은 상당지구를 조나라에 바친 것에 보복하기 위하여 현지백성을 도살한다. 장평지전은 진나라에 의하여 40만조군을 갱살한 초대형대첩이라고 떠벌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