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조가 천하통일후 15년만에 멸망한 원인은 폭정이 아니다.
글: 천천천(天天天)
진시황은 겨우 10년의 시간을 들여 일거에 6국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중앙집권제국가를 건립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겨우 15년간 존속하고는 운명한다. "합구(合久)"되기도 전에 다시 "분(分)"한 것이다. 원래 진시황은 만대를 내려가는 진왕조를 원했으나, 2세만에 멸망하고 만다.
진나라가 단명한 원인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폭정", 무거운 요역, 장정을 잡아서 장성을 짓도록 한 것, 능묘를 만들도록 한 것, 호화스러운 궁궐인 아방궁을 짓게 한 것, 그리고 분서갱유등으로 백성들이 살기 힘들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조금만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되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한번 싸워보자고 일어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혹시 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무도(伐無道), 주폭진(誅暴秦)" 그리하여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을 빠트렸다. 진왕조의 원래 영토내에서는 농민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같은 제도이고, 모두 같이 무거운 요역을 지는데, 어찌하여 진나라 원래 영토냉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확실히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위에서 든 것들만이 이유는 아니다.
먼저,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한 것은 단지 무력상의 진압이었고, 마음으로부터 복속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6국은 심리적으로 진나라에 기꺼에 굴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진나라와 초나라의 전쟁후에 초나라가 비록 망했지만, 여전히 이를 갈고 있었다: "초나라에 3호만 남더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사람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
결과는 너무나도 들어맞았다. 놀랄 정도이다. 처음 반람을 일으킨, 진승, 오광, 나중의 항량, 항우, 그리고 마지막에 한왕조를 건립한 유방은 모두 초인(楚人)이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그저 초남공은 초나라사람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설사 인구가 얼마 남지 않더라도 진나라에 반항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진나라는 그저 육국을 정복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육국을 통치한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한 후, 진시황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승상 이사의 편에 서서, 군현제로 분봉제를 대체한다. 이 결정은 직접적으로 진나라의 6국 옛 영토내에서의 역량을 아주 약화시키게 된다. 진문화는 육국에 삼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6국은 진나라의 법률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상앙변법부터, 진나라의 옛영토에서는 일찌감치 법가의 정책과 법률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도가 높은 요역도 잘 견뎠다. 그러나 6국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법가관념이 별로 없었다. 다만 군현제는 각국을 차별없이 대우하도록 만든다. 확실히 원래의 6국 사람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급진적이고 기형적인 생각은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한무제는 훨씬 잘했다. 그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제창하고 한학을 설립하여, 백성들을 사상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이런 상대적으로 비교적 '온유'한 사상을 백성들로 하여금 점차 받아들이게 하여 최종적으로 통일의 국면을 실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나라는 원래 6국의 문벌귀족을 무시했다. 그는 원래 6국의 옛 신하들의 이익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히 불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 복국(復國)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진왕조가 15년만에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그가 무력으로 너무 빨리 6국을 무너뜨리고, 너무 지나치게 성급하게 서둘렀다가 결국 6국에 역으로 당한 것이다. 만일 그가 과정을 조금 더 느리게 진행하여, 급진적인 방식을 온건한 방식으로 바꾸었더라면, 그리하여 다른 6국이 점점 진나라에 동화되고 흡수되며, 진문화를 받아들이게 했더라면, 아마도 진나라는 그렇게 빨리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