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하왕조(夏王朝)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은우시 2018. 8. 5. 00:56

글: 고파화사(古巴話史)


하왕조가 존재했다고 믿는 이유는 바로 중국의 <상서> <사기>에 명확히 적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상서>에 기록된 하(夏) 그리고 요순우(堯舜禹)의 기록은 날조되었다는 것을 청나라사람들이 이미 고증한 바 있다. 날조연대는 분명 전국시대보다는 이후일 것이다. 하왕조로부터 이미 1천년이 지난 후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하왕조가 멸망한 때로부터 이미 1500년이 넘었다. 현재로 말하자면, 지금 남북조시대의 역사를 쓰는 셈인데, 얼마나 신뢰도가 있겠는가?


그리고,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중국의 사서는 진왕조의 것 이외에는 모조리 불태워졌고, 많은 책들은 서한때 다시 방법을 강구하여 찾아낸 것이다.


정부에서 큰 상을 내리게 되자 위조한 가짜사서가 연이어 나왔다. 한나라때부터 지금까지 싸워왔다. 그래서 현재 진나라이전의 서적을 보게 되면 첫번째 문제는 바로 이 책이 후인의 위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정말 진나라이전의 서적이라면 계속 묻게 된다. 전국시대 사람이 위조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참고할 수 있는 사서는 기실 그 몇 개의 신뢰도가 아주 낮은 위조사서들이었던 것이다.


최근의 가장 큰 뉴스는 청화대학이 최근의 전국고간(古簡)에서 2000여년간 논쟁이 있었던 고문서 <상서>가 확실히 위조되었다고 증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나라때는 진정한 역사로 봤었다.


어떤 사람은 서방학자가 '상(商)'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서, 이후 은허가 발굴되면서 상의 존재가 증명된 것을 예로 들어, 하왕조의 존재를 추론하기도 한다. 사실상 바로 은허의 발견이 대량으로 하왕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거꾸로 증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국제학자들은 하왕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상왕조의 출토된 십여만편의 갑골문과 모든 청동기에 쓴 글자중에 하왕조에 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갑골문은 점을 치는 것이지 역사가 아니므로, 이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갑골문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갑골문에는 대량의 상탕의 공적을 자랑하는 내용이 있고, 동이를 친 것도 있는데, 굳이 하왕조를 전복시킨 가장 중요한 성과는 적혀있지 않다. 정말 하왕조가 존재했는지는 완전히 수수께끼이다.


비유하자면 만일 수천년후의 고고학자가 대량의 모택동을 칭송하는 문건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모택동이 국민당을 무너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한 최대의 공로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면, 중화민국을 언급한 글이 한 자도 없다면, 장개석을 포악한 자라고 욕하는 글 조차 없다면, 상상이 가는 일인가?


둘째,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상왕조떄는 '하(夏)'라는 글자조차 발명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서주초기에까지도 발명되지 않았고, 서주 말기와 춘추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한다. 어떻게 하나의 국가가 자신이 발명한 적도 없는 글자로 자신의 국가명칭을 삼는단 말인가?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상나라때 사람들은 여름(夏)을 어떻게 불렀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상나라 사람들은 계절을 춘(春)과 추(秋)의 두 계절로 나누었다. 아예 하(夏)와 동(冬)은 없었다. 이것은 바로 노(魯)나라의 사서를 '춘추'라 부르고 '춘하추동'이라 부르지 않은 원인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상인의 하에 대한 칭호가 달랐을지 모른다고. 이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갑골문에서는 여하한 하에 비견할만한 글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갑골문에서 묘사한 상왕조는 전통사서에 나오는 상왕조와 많이 다르다. 사마천이 쓴 상인은 원래 하왕조의 신하이다. 상탕에 이르러 비로소 하걸을 무너뜨리고 상왕조를 건립한다. 갑골문에는 상이 하의 신하였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상왕은 일찌감치 칭제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왕해(王亥)의 경우, 앞의 왕은 국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계속하여 상왕조의 왕이었다. <사기>에 쓰여있는 것처럼 하 소강(少康)의 신하가 아니었다. 상탕은 갑골문에서 중흥의 영주처럼 보이고, 개국의 군주로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상나라이전에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상 하왕조시기의 유적지를 적지 않게 발굴했고, 가장 유명한 것은 이리두이다. 이리두는 4기로 나뉘는데, 앞의 2기는 하왕조시기이다. 그런데,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고, 황동도 발견되지 않는다. 명확하게 신석기말기의 유적지이다. 아직 부락시기이다. 아예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로 소위 하왕조일 수 없다. 그리고 뒤의 2기는 명확히 상문화이다. 직접 신석기말기에서 상왕조로 넘어간다. 원래 중간에 끼어있어야할 하왕조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중국정부에서 벌인 하상주단대공정은 자신이 파낸 물건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연속한 고고유적지를 둘로 잘라서, 앞의 2기와 아주 먼 곳의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유적지를 연결시켜 억지로 하왕조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세계 한학계로부터 심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그래서 이리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왕조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강렬한 반증이다.


하왕조를 주(周)나라사람들이 날조해냈다는 것은 국제학계에서 공인되었다. 왜 주왕조가 하왕조를 날조해 냈을까? <상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로 <상서>의 <주서>에 하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은 <태서제2>이다.


"유하걸불극약천(有夏桀弗克若天), 유독하국(流毒下國), 천내우명성탕(天乃佑命成湯), 항졸하명(降黜夏命)"


즉 주나라가 상을 무너뜨린 이유는 너희 상나라도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만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나라도 마찬가지로 했다는 것이다. 주나라사람들이 기록한 하는 독립인격이 없다. 모두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것을 설명할 때의 사례로서만 나타난다. 하나라는 초기 사서에서 간단한 몇 마디로 언급되고 지나갔다. 그런데 반대로 뒤로갈수록 하왕조의 역사는 완전해지고, 전국시대 사람이 위조한 우공(禹貢)에 이르러 비로소 비교적 완벽한 서술이 나타난다. 즉 고힐강이 말한 '층층이 축적되어 조성된  것'이다.


<사기>도 마찬가지이다. 하본기의 하왕조는 단지 5가지 일만 했다. 첫째, 우의 사적, 둘째, 우가 아들 계에게 전한 후 유호씨가 불복하고, 계가 유호씨를 정벌한 것. 셋째, 태강이 나라를 잃은 것, 넷째, 중강이 술에 빠진 희화를 정벌한 것, 5. 하걸이 무도한 것.


기타는 없다.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개국왕조로서, 500년간이나 존속했던 하왕조가 겨우 이 5가지 일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이 5가지 일의 정치적 상징은 아주 분명하다.


1. 덕이 있어야 왕조를 개창할 수 있다. 2. 정권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3. 무도하면 나라를 잃을 수 있다. 4. 신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할 수 있다. 5. 하걸은 바로 주가 상을 친 모법사례이다.


완전히 주나라의 통치에 합법적인 이유를 대는 것뿐이다. 원래는 상의 신하이다가 상왕조가 출정하여 도성 조가(朝歌)가 빈 틈을 타서 조가를 습격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아마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주인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주나라사람들은 하왕조를 날조하여 너희 상왕조도 마찬가지로 했었다고 말하며, 주왕조의 정통성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