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진포뢰(陳布雷) 가족3대의 풍우인생

중은우시 2018. 7. 26. 16:52

글: 서민임풍(庶民臨風)





항용(杭甬)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꺽으면, 사명산을 등지고, 여요강이 허리를 감싸고 하르며, 하모도(河姆渡)유적지에 인접한 여요시(餘姚市) 삼칠시진(三七市鎭) 관교촌(官橋村)이 보인다(예전에는 자계현(慈溪縣)에 속했다)


관교에 도착하면 자연히 진씨조택(陳氏祖宅) "양칠방(良七房)을 참관하게 된다. 이곳은 원리 청나라때의 민가로 백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은 겨우 1채만 남았다. 그러나 전청(前廳), 후옥(後屋), 누방(樓房), 조옥(罩屋), 양상(兩廂)의 격국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유광(幽光)이 빛난다. 그뿐아니라, 이곳에서는 진포뢰와 그의 8형제, 7자매(적당형(嫡堂兄) 진기회(陳屺懷)포함)가 태어났다. 그리하여 이들 많은 자녀, 손자녀는 점차 "근분(勤奮), 구지(求知), 평범(平凡), 자립(自立)과 진충국족(盡忠國族)"의 '청백한 가풍'을 형성한다. 그리고 중국근현대사의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다 쓰지 못할 슬픔과 다 풀지 못할 정, 지울 수 없는 가슴속의 벽이 만들어진다. 애증이 교차하고, 기븜과 슬픔, 헤어짐과 만남이 일어난다


진포뢰(1890-1948)는 관교진가 3방(三房)의 큰형이고 장문인이다. 그에그는 한 명의 유일하게 그보다 18살이 많은 적당장방의 형이 있다. 바로 닝보 신해혁명의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진기회(이름은 훈정(訓正), 1872-1943)가 있다. 학식으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사업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진기회는 모두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이끌었다.


진기회는 1903년에 거인(擧人)이 된다. 신문이 관교촌 '양칠방'에 와서 기쁜 소식을 알릴 때, 그는 반청활동으로 일본에 도망쳐 있었다. 동경에서 닝보고향사람인 조가예(趙家藝, 士林)의 소개로 손중산을 알게 되고, 동맹회에 참가한다. 나중에 닝보에 동맹회지부를 설립한다. 조가예와 그는 각각 정부회장을 맡는다. 1911년 11월 6일, 그는 조가예(나중에 자녀끼리 혼인하여 사돈이 된다), 위형(魏炯), 범현방(范賢方)등 지사는 닝보 신해혁명을 일으킨다. 당시 청나라조정의 영소도대(寧紹道臺) 문부(文溥)는 도망을 갔고, 지방보안회의는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기회는 백마를 타고 백기를 높이 들고, 그가 만든 육덕소학당의 100여명의 '타민(墮民)'자제학생을 이끌고 팔에는 백포를 감고, '혁명군이 왔다"는 구호를 소리높여 외치며 호호탕탕하게 와서 전보국을 점령한다. 이 행동으로 혁명당원들이 장악하고 있던 민단, 상단은 신속히 행동하여 도서(道署)를 점령하고 당일로 닝보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군정부(軍政府)를 결성한다. 항주보다 단 하루가 늦었다. 진기회는 재정부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그는 금방 사직하고 계속 그의 현대교육계몽사업에 종사한다.


큰형은 닝보에서 혁명을 하느라 바빴다. 21세의 진포뢰는 상해에서 여론의 호응을 이끌었다. 그는 편집하는 <천탁보(天鐸報)>에 연이어 10편의 <담악(談鄂)>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신해무창의거를 선전한다. 혁명의 수단으로 청나라통치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호소한다. 상해의 신문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였다. 진포뢰(원래 이름은 訓恩)는 이때의 필명이다. 1907년 절강고등학교(절강대학의 전신)에서 공부할 때, 얼굴이 둥들둥글해서 친구들이 "면포아아(面包伢兒)"라고 놀렸다. 그래서 그는 면포(즉 빵)의 영어인 Bread의 중문음인 '포뢰(布雷)'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미진환불성(迷津喚不醒), 청작포뢰명(請作布雷鳴)"(미혹에 빠져서 불러도 깨어나지 않으면, 천둥번개소리를 내라.)는 의미이다. 진포뢰의 명성은 상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바로 이 때, 큰형이 그를 닝보로 부른다. 다음 해, 진포뢰는 큰형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계몽교육활동에 참여한다.


1921년, '5.4'신문화운동이 일어날 때, 닝보에 근 10년간 머무르던 진포뢰는 다시 상해로 불려간다. 큰형이 총회계를 맡은 <상보(商報)>에서 편집주임을 맡는다. 그의 날카로운 글솜씨로 매주 5편의 평론을 쓰고 일요일에는 1쳔의 단평을 쓴다. 상해의 신문계에서 '돌연히 일어난 특이한 인물'이 된다. 1923년, 진포뢰는 '외루(畏壘)'라는 필명으로 시평을 쓴다. 기치선명하게 조곤의 뇌물선거를 반대하고, 북양군벌 손전방, 단기서를 반대하고, 광주의 국민혁명에 호응한다. 1924년 '5,30'참안으로 반제반군벌애국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진포뢰는 <상보>에 매일 평론을 발표하여, 노동자농민을 동정하고, 영국일본을 공격한다. 사태어 발전에 따라 원흉을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고, '배상'음모를 들춰낸다. 시평은 6월초부터 9월까지 이어진다. 진포뢰의 반제반봉건의 문장은 중공중앙의 기관지 <향도(嚮導)>의 주목을 끈다. 전재하고 주석을 달았을 뿐아니라, 소초녀(蕭楚女, 중국공산당의 이론가, 선전공작책임자)는 진포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혁명정신을 찬양하기도 했다.


북벌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부주임이 된 문호 곽말약(郭沫若)은 1927년 남창에서 진포뢰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루선생, 당신이 <상보>에 발표한 시평은 모두 읽어 보았다. 정말 역투지배(力透紙背), 횡소천군(橫掃千軍)이다. 북벌에 적극적인 추진작용을 했다."


그러나, 이때의 진포뢰는 이미 완전히 장개석(蔣介石)의 품에 들어가 있었다. 시종실 제2처 주임의 요직에 앉아서, 장개석의 정치, 경제, 당무, 인사, 정보등 업무를 주관했고, 장개석에게 충성을 다하는 '문담(文膽)', 막료장이 된다. 역사에 웃음거리를 남긴 <서안반월기(西安半月記)>는 바로 그의 '걸작'이다. 그렇긴 하지만, 장개석은 1937년 7월 17일의 <여산담화>에서 말한, "만일 전쟁이 시작되면 땅은 남북의 구분이 없이, 사람은 노소의 구분이 없이, 누구에게나 국토를 지키는 항전의 책임이 있다."는 말은 바로 진포뢰의 붓끝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항전건국주년기념고전국군민서>(1938년 7월 7일), <척근위황류성명>(1938년 12월 26일)등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항일기간동안 장개석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강연, 담화, 서고, 별록등 글은 모두 657편인데, 대부분은 진포뢰의 붓끝에서 나왔다.


공산당은 이 '붓'에 당연히 주목한다. 1941년, 주은래는 중경의 천관부 곽말약집에서 곽말약의 비서 옹택영(翁澤永, 진포뢰의 외조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포뢰 선생에게 말을 전해주어라. 그의 도덕문장에 대하여 우리 공산당원들도 탄복하고 있다; 다만 그의 붓이 한 사람만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고, 중국의 4억인민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란다고."


다만, 진포뢰는 이미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은 명확히 말한 바 있다: "나는 이미 시집간 여인과 같다. 그저 끝까지 한 사람을 따를 뿐이다."


진포뢰는 장개석이 자신에게 후하게 대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은 일찌기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포뢰선생, 나는 당신을 중앙으로 불러서 일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포뢰선생, 나는 당신께 신문계에 대한 담화를 초안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포뢰선생,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해주십시오." 중경에서는 물자가 부족해서 관리들도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송미령은 사람을 보내 매일 진포뢰에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해준다. 장개석이 부하들 중에서 이렇게 상빈(上賓)을 대하듯이 한 사람은 진포뢰가 유일했다.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진포뢰는 자연히 '받은 은혜가 깊고 커서, 어떤 고통이든 마땅히 감당하며,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다(장개석에게 보낸 유서)' 이런 상황이니 그의 모든 생명은 그저 "영수의 좌우에서 일을 하며, 평소에 일체의 접대를 거절하고, 일체의 집안일도 돌보지 않았다." "저는 모든 시간을 아침일찍부터 밤까지, 모조리 영수의 지배하에 있었던' '문사생애(文士生涯)'를 보내게 된다(장치중에게 보낸 서신의 문구)


그러나, 진포뢰가 양심에 없는 일을 했던가? 그가 둘째동생 진훈자(陳訓慈)에게 이렇게 불평한 적이 있다: "글을 모르고 자신의 고집만 있는 사람을 위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고통이다. 이런 '생활'은 사람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딸인 진련(陳璉)의 앞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칼을 든다는게 얼마나 고뇌스러운 일이냐."


그러나, 진포뢰는 그의 그 "나의 주공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외에 아무런 다른 사심이 없는'생활을 지탱한다(장개석에게 남긴 유서). 내전에서 연전연패하며 장씨왕조가 곧 붕괴될 상황에서도, 이 독재자의 뜻에 따라 '선전작전참모총장'이라는 무형의 신분으로 '선전팀'을 주재한다. 장개석 '관저회보'의 비서실(즉 집행기구)로서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공산당과의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낙화유수, 봄이 간다. "나의 뇌는 이미 유진등고(油盡燈枯)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인 왕윤묵(王允默)을 상해로 보내어 외조카의 혼례에 참석하게 하고, 남경에서 일하는 아끼는 사위 원영희(袁永熙)를 부른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잘못은 정치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후에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절대로 말려들어가지 말라. 절대, 절대." 진포뢰의 이 말은 폐부의 말일 것이다. 슬픈 인생이 마침내 끝을 보인다. 그날 밤늦게(1948년 11월 12일) 그는 침실문을 걸어잠그고, 장개석, 송미령에게, 동료에게, 부하에게, 가족에게, 유서를 쓴 후, 근 200알이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누워서 이 세상을 떠난다. 절강성정부 비서장, 절강성 교육청장,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부장, 국민정부 교육부 차장, 국민군사정부 군사위원회 위윈장 시종실 제2처 주임, 국방최고위원회 부비서장, 국부위원, 총통부 국책고문,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을 역임하고, 장개석을 22년간 따르던 진포뢰는 이렇게 인생을 끝낸다. 그의 일생은 진포뢰가 항상 친근하게 '형'이라고 부르던 동료인 시종실 제1처 주임 장치중(張治中)이 말한대로 '비극적 인생'이다.


진포뢰의 6명의 동생은 큰동생이 요절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5명이다. 그와 적당형의 도움과 지지하에, 모두 고등교육을 마친다(국내 혹은 유학), 모두 업적을 남기고 애국애향했으나, 형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진훈자(자는 숙량(叔諒), 1901-1991), 진포뢰의 둘째동생, 동남대학졸업, 절강대학 교수, 절강도서관 관장을 역임. 항일전쟁기간동안, 국보인 항주문란각(文瀾閣)의 <사고전서>를 일본의 유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돌보지 않는데도, 그가 자신의 전답을 팔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8.13'송호전투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140개상자에 담아서 부양(富陽)으로 옮긴다. 그리고 영파 천일각(天一閣)의 진본, 선본서적을 상자에 담아 운송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동려, 건덕, 영강을 지나 선하산맥의 깊은 곳에 있는 용천(龍泉)의 한 소산손(진훈자는 이때 절강대학 용천분교의 주임을 맡고 있었다)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절강남부도 안전하지 않아서, 그는 다시 옮겨가며 호소한다. 절강대학 총장 축가정(竺可楨)이 도움을 주어 6대의 트럭을 빌려오고, <사고전서> <영락대전>, <고금도서집성>등 3만6천책의 진귀한 전적을 서쪽으로 운반해간다. 1939년 5월 귀양(貴陽)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시교외의 장가사당(張家祠堂)에 보관하다가 나중에는 성북쪽의 지모동(地母洞)에 보관한다. 매년 여름이면 사람을 모아서 모든 서적을 햇볕에 내놓는다. 1944년 귀죽독산의 전투가 심해지자, 그는 진포뢰의 도움을 받아, 차를 구해 서적을 중경으로 옮긴다. 항전승리후, 국민당의 사람들은 황급히 복직하여 횡재를 얻는데 바빴으나, 이때 그는 이미 절강도서관장의 직위를 사임하고 여전히 주인의식을 가지고 국민정부와 다퉈서 마침내 1946년 7월 수로와 육로를 통해 <사고전서>를 서호의 가에 있는 문란각의 옛집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지금도 절강도서관의 직원들은 여전히 진훈자의 공덕을 칭송한다: 노관장의 이 생사를 도외시한 애국적인 거동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어찌 완전한 문란각<사고전서>를 볼 수 있겠습니까?"


신중국이 건립된 후, 진훈자는 절강성 정협의 1기에서 6기까지 위원을 지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제안을 내면서 문구를 퇴고하느라 심신이 고갈되어 사망한다.


진포뢰의 세명의 동부이모의 동생인 진훈0(叔兌), 진훈혜(陳訓惠, 叔時), 진훈원(陳訓願, 叔同)은 모두 일본유학을 하고, 신문업계에 종사한다. 그중 숙시는 항전기간동안 외교부 아동사의 전원(專員)으로 일한다. 나중에 주칠레영사로 있다가 신중국이 성립된 것을 듣는다. 그리고는 즉시 대만국민당을 벗어나 대륙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는 국제관계연구소에서 일한다. 숙동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건재한 동생인데, 미국에 살고 있다. 미국, 독일, 일본 및 대만의 자녀와 손자녀 모두 15명을 이끌고 고향을 찾아가서 조상에 제사를 지내며 탄식한다: "벌써 1세기가 지났다. 정말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고향의 호광산색의 아름다움은 옛날보다 더 나은 것같다."


진포뢰의 다섯째 여동생 진약희(陳若稀)는 하모도촌의 옹조망(翁祖望)에게 시집간다. 그들의 장남이 옹택영이다. 항전시기 중경에서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청장인 곽말약의 비서를 지낸다. '홍암촌'과 '미전가(시종실 제2처)'를 연락하며 주은래와 진포뢰의 대화를 전달하는데 특수한 파이프역할을 한다. 어린 딸 옹욱문(翁郁文)은 11살때 항일구국대열에 나선다. 18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사군 절강종대에 참가하고 공산당에 가입한다. 항전슬이후 상해에서 학생운동에 조사하고, 중공지하조직이 영도하는 <연합만보> 기자를 지낸다. 일찌기 사촌언니 진련이 장강을 건너 해방구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는 1952년 교석(喬石)과 혁명반려를 이룬다. 


진포뢰와 첫째 부인 양굉농(楊宏農)은 1909년에 결혼한다. 1914년부터 양씨는 매년 아들 1명씩을 낳는다. 진지(陳遲), 진과(陳過), 진적(陳適). 그리고 2년이 지나 딸을 낳는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1919년 다시 큰딸 진수(陳琇)을 낳는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기혈이 모자라서 비록 응급조치로 깨어나기는 했지만, 결국 산욕열로 영아가 한달도 되기 전에 죽어버린다.


진포뢰는 처의 침대 앞에서 비통해 하다가, 딸의 울음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모두 이 녀석 때문에...." 그는 딸을 안아서 담우(痰盂)속으로 밀어넣는다. 영아가 우는 소리에 장모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리친다. "훈은!" 진포뢰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딸을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진포뢰의 둘째딸은 명이 질겼다. 강보에 쌓인채로 기와를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지붕아래에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끌어내리고 외할머니가 얼른 빼앗아서 품에 안는다. 무릎을 꿇고 통곡하는 진포뢰에게 이렇게 말한다: "두 목숨 중에서 하나는 건졌으니, 가련한 이 아이는 내가 기르겠다!" 


진포뢰는 자신의 미친 짓을 깊이 후회하고, 고향을 떠나 상해로 가서 상무인서관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둘째딸에가 아명을 붙여 준다: 련아(憐兒). 나중에 정식 이름은 진련(陳璉)이 되는데, 발음이 같은 글자이다.


이십년 후, 진련은 중경의 미전가 1-4호 진포뢰공관을 찾아간다. 이때의 진련은 아름답게 자랐을 뿐아니라, 애국열정이 가득한 애국청년이었다. 그녀는 이미 국립2중에서 고등학교과정에 있을 때 비밀리에 공산당에 참가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녀의 입당소개인이 등영초이다)


"아빠, 중국은 이미 망국의 지경인데, 국군은 왜 옮겨가고 우회하며 계속 패퇴합니까. 설마 히말라야까지 물러나서 라마가 될 때까지 물러나려는 겁니까?"


"항일, 당연히 모든 것은 항일을 위함이다. 나는 항일을 적극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련아야 너는 절대 반정부활동에 참가하지 말라."


"아빠, 이 국민정부는 도대체 항일을 하는 겁니까 아닙니까. 공상희같은 관료들은 국난에 돈을 벌고 있는데, 모르고 계세요?"


진포뢰는 처량하게 태어나서 힘들게 자란 이 딸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녀는 이해 여름 서남연합대학의 지질학과에 입학하고, 부친을 떠나 곤명으로 간다.


그녀는 이곳에서 북경출신의 경제학과 학생 원영희를 만난다. 원영희는 그녀보다 2살이 많았고,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일지기 남방국(주은래가 서기임)에서 개설한 서남팔고교당지부서기교육훈련반에서 공부한다. 그들 둘은 당의 조직생활과 항일민주투쟁에서 만나 서로 알게 된다. 이때 원영희는 이미 서남연합대학 당총지부서기였고, 진련은 선전위원이었다. 직속상사는 남방국 서남공위서기 전영(錢瑛)인데, 이들 혁명남녀의 사랑을 목도하고 지지한다.


풍운이 다시 일었다. 환남사변이 1941년 1월 발생한다. 군통은 이 기회를 틈타 학생운동을 진압한다. 서남공위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원영희와 진련을 각각 운남남부의 개구와 석병으로 보내어 숨긴다. 나중에 투쟁의 필요에 따라, 원영희는 사천의 강진으로 보낸다. 떠나기 전에, 그는 석병으로 가서 진련을 만나고, 그녀에게 생활비를 건넨다. "련, 네가 비록 잠시 가족과 연락을 끊었지만, 조직과 동지들은 너와 연결되어 있다!" 진련은 그에게 감동한다.


진련은 확실히 '중단"계획을 실행했다. 그녀는 언니에게 서신을 쓴다. 그 내용은 부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것이다. 서신에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길과 신념과 목적을 적고, 언니에게는 '부친은 특히 언니의 안위가 필요하다'고 적는다. 진포뢰가 그 서신을 읽는데, "시대는 나와 가족간에 비극이 연출되도옥 결정했다. 나는 거절할 수가 없다." "안녕, 내가 가는 곳은 아주 멀다. 우리는 아마 영원히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구절을 읽을 때는 진포뢰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떨며 눈물을 흘린다. 진포뢰는 큰 딸과 상의한다: 옹택영을 통하여 주은래를 찾자.


주은래는 아주 성실하게 진련의 행방을 찾아준다. 두번이나 옹택영을 통하여 진포뢰에게 그의 말을 전한다: "내가 상황은 들었다. 네가 포뢰선생에게 전해도 된다. 급할 것없다. 만일 진련이 팔로군 혹은 신사군의 주둔지에 들어갔으면, 우리가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팔로군, 신사군에 전보를 보내어 물어봤다. 진련은 거기로 가지 않았다.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 진련은 아마도 숨어 있을 것이다. 모두 방법을 강구해서 찾아보자" 진포뢰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연이어 말했다: "주선생에게 너무 감사하다. 너무 감사하다." 그러나 진련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초초하고 불안해 했다.


원영희가 강진에서 중경으로 가고, 전영이 상청사 주공관으로 가서 남방국 등영초의 업무보고를 할 때, 비로소 운남남부에 숨어있는 당원상황을 알게 된다. 그 중에 "진련은 이미 석병에서 의량의 구자가로 옮겼다. 직업이 없다"는 소식이 있었다. 등영초는 말했다: '그녀를 불러옵시다. 부친의 곁에 남겨두는 것이 믿을만 할 겁니다." 이렇게 하여, 진련은 중경으로 불려가고 주은래공관으로 간다. 그녀는 즉시 연안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은래는 말한다: "진련 동지. 네가 만일 연안으로 가면, 포뢰선생은 우리에게 너를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너의 상황은 다른 동지들과는 다르다." 등영초는 진련의 손을 끌어잡고, 그녀를 설득한다: 네가 중경에 남아서 부친의 겉에 있으면서도 일을 할 수가 있다. 네가 그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가 항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면 된다. 그것도 당의 업무이다. 그리고 이 일은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련은 이것이 조직의 안배라는 것을 알고는 기꺼이 중경에 남기로 한다.


큰딸 진수는 이미 이때 신문에 '동생을 찾는 광고'까지 냈었다. 진련이 운남에서 중경으로 돌아오고 미전가 진공관으로 돌아갔다.


"련아...얼굴이 많이 탔구나"


"아빠, 머리 아픈 것은 괜찮으세요. 저녁에 잠을 잘 주무세요?"


진련은 중경 중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한다. 매주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서 부친과 얘기를 나누었다. 사회에서의 반응, 대학생의 정서, 백성의 원성등등을 진포뢰에게 전달한다. 한번은 그녀가 소책자 <신민주주의론>를 부친의 침실머리맡에 놔둔다. 며칠이 지난 후 진포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련아. 네 책을 내 방에 놔뒀더구나." 그에게는 자신의 원칙이 있었다. 그가 둘째동생에게 항상 한 말이다: "사상문제는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 한번 부딛쳐 본 후에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딸이 정치와 관련된 얘기를 꺼내면 그는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너희가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더더구나 너희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관료가 되려고 하지 말라! 집안에서는 정치 얘기를 하지 말라"


항일전쟁의 승리로 진련과 원영희의 애정은 더욱 깊어갔다. 그들의 지도자인 전영은 이들을 부부로 맺어주려고 하다. 1946년 5월, 진련은 곤명 '12.1'학생운동에 참가한 후 중경으로 와서 남방국에 업무보고를 하는 원영희와 가릉강가에서 만난다. 그리고 서로 애정을 표시하고 북경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원영희는 서남연합대학이 북평(북경), 천진으로 돌아간 후, 북평에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중앙신탁국 북평금성은행 적산접수원이 된다. 왕한빈과 함께 북평학생운동을 지도한다. 당시 북평의 지하당학생위원조직에는 두 개의 계통이 있었다: 북계, 즉 진찰기중앙국성공부이고, 남계 즉 남방국(후의 상해국)의 원,왕이다. 공위서기 전영의 직접 영도를 받는다. 두 계파는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서로간에 횡적관계는 맺지 않는다. 진련이 북평으로 간 후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패만여중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지하공작은 북평직업청년지부를 책임지며 원영희의 영도를 받는 것이다.


1947년, 그들 둘은 결혼한다. 전영은 국민당요인 진포뢰의 딸이므로 혼례규모도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회적 영향도 넓히고 그들의 정치적인 면목을 감추는데도 도움이 된다. 진포뢰는 '물이류취(物以類聚), 인이군분(人以群分)'의 직감으로 사위의 정치적배경을 우려한다. 그래서, 친구인 북평시 부시장 장백근(張伯瑾)에게 알아봐달라고 서신을 보낸다. 장백근은 청화대학 교수인 장해약(張奚若), 주자청(朱自淸), 오함(吳唅)등에게 묻는다. 그들은 원영희와 사제의 정이 있을 뿐아니라, '12.1'학생운동때 같은 전선에 섰던 동지들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회신을 받게 된다: "원영희는 귀주 영수의 관료집안 출신이며, 고모 한명은 '성경장군' 조이손의 집안에 시집갔고, 고모 한 명은 서세창의 며느리이다. 원영희의 누나는 외교부차장 섭공초에게 시집갔다...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좋은 청년이지만, 사상은 약간 좌경이다." 진포뢰는 받아들이고 그의 <중앙일보> 총편집으로 있는 넷째동생을 북평으로 보내어 혼례를 주관하게 한다. 혼례는 육국반점에서 거행되었고, 대단했다. 증혼인은 북평시장 하사원(何思源)이다. 여러 하객들 중에는 전중엄(田仲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영희와 명함을 교환한다. 그리고 원영희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어둔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터진다. 보밀국(保密局)은 중공의 한 지하전대(地下電臺)의 보무원인 이정선(李政宣)을 체포하는데, 그는 배신하여, 그 전대의 모든 인원을 누설한다. 거기에 전중엄도 들어 있었다. 특무들은 전중엄의 양복주머니에서 원영희의 명함을 찾아낸다. 그래서 신혼 1달도 되지 않은 원영희, 진련 부부는 감옥에 갇힌다. 그들 둘에 대한 강경,회유책에도 공산당원의 신분은 밝히지 않는다. 1947년 11월, 북평의 군경은 '민주청년동맹'의 혐의만 겨우 적용해서 남경보밀국본부로 압송한다. 장개석과 진포뢰에게 직접 처리하도록 보낸 것이다.


장개석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보밀국의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 사건은 그저 명함 한장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보에 따르면, 진포뢰는 기밀을 딸에게 누설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진포뢰의 "딸은 저의 친딸이고, 당과 국가는 제가 평생 보답해야할..."리라는 말이 끝나기ㅗ 전에 바로 말한다: "당신이 당과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딸을 데려와라. 집으로 데려가서 잘 단속하라." 이어서 행정원 비서장 이유과(李惟果, 원래 진포뢰의 부하로 시종실 제2처 제5조 조장이었다)가 보증을 서서 진련은 석방된다. ㅎ남로508호 진포뢰의 집으로 돌아와서 부친과 함께 마지막 한 해를 보낸다. 원영희도 섭공초가 보증을 서서 다음 해 1948년 4월에 석방된다. 그리고 중앙신탁국으로 돌아가서 근무한다. 장인과 사위가 처음 만났는데, 진포뢰는 사위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원영희의 출옥은 그의 인생전도에 지뢰를 심은 격이 된다. 당시 처인 진련은 모르고 있었다. 영해로10호 보밀국 간수소에서 특무들은 그에게 '반성문'을 한 장 건네고 그에게 서명하게 한다. 원영희는 받아들고 읽어보니, "나는 공산당의 선동에 혹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가, 간당을 위하여 일했고, 민국에 위해를 끼쳤으니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원영희는 결연히 거절한다. 이때 양(梁)씨성의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매 문구마다 '병비(幷非)'라는 두 글자씩을 추가하면, 전체 구절의 성격이 바뀌지 않느냐고 말해준다. 원영희는 이런 방식으로 양피항 군법국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48년 10월말, 진포뢰는 딸과 사위에게 중산릉에 가자고 한다. 진련, 원영희는 좌우에서 58세의 부친을 부축했다. 몸이 가볍고 약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늙었다. 그 독재자를 위하여 고혈을 다 짜낸 것이다. 그러나 진포뢰는 계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그리고 손중산선생의 와상에 세번 국궁하면서도 시종 한마디를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처량한 분위기에 그들은 감히 부친을 위로하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진포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사위의 눈을 자세히 쳐다보며 말했다: "련아는 선천적으로 부족했고,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네가 많이 보살펴 주어라."


원영희는 떠날 때 "아버민, 머리카락과 수염이 너무 깁니다. 정리하셔야할 것같습니다."

진포뢰는 사위의 말에 따라 이발사를 불러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정리한다. 그리고는 '청백'하게 세상을 떠난다.


부친의 죽음에 대하여, 진련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부친이 고집스럽게 장개석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이 미웠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친이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제1차정협회의에서 주은래총리의 요청을 받아 진련이 발언을 한다. 이렇게 애증이 교차하는 심정을 얘기한다.


다만, 당연히 원영희, 진련은 계속 정치에 참여했다. 그들은 진포뢰의 영구를 항주로 모셔서 매장한 후, 지하당이 보낸 옹욱문과 함께 장강을 건너 해방구로 돌아간다. 건국후 원영희는 "반성문"의 그 '병비(幷非)'문제로 유소기의 지시에 따라, 당적을 박탈당하고 다시 입당한다. 공청단중앙 학생부 비서주임, 부부장, 청화대학 당위서기, 교장조리를 역임한다; 진련은 공청단중앙 소아공작부 부장으로 <중국소년선봉대대가>를 창작하는 것을 기획, 조직한다.  그러나 1957년 반우파운동때, 이 고난의 세월 속에 만들어진 가정은 철저히 무너진다.


원영희는 '우파'로 몰려 북경교외 장성각에서 양을 기른다. 진련은 세 아들(2남1녀)를 데리고 상해로 간다. 그리고 선전부 문교처 처장이 된다. '혈홍(血紅)'의 1967년, 진련은 가정과 연금이라는 두 개의 그림자에 정신과 육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1월 20일 남경동로 태흥대루에서 투신자살한다. 향년48세이다. 진련은 1979년 명예회복되고, 등영초는 "당의 충성스러운 여아"라고 만련을 쓰고, 호요방도 친필로 "가정반역, 여중영호"라는 만련을 보낸다.


원영희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1962년 우파의 모자를 벗은 후, 하북 남궁현의 한 중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한다. 원영희는 1999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난다. 향년 82세이다. 그의 마지막 직위는 북경경제학원 원장이었고, <인구총서>의 편찬을 주재했다. 진련, 원영희의 딸은 상해에 있고, 차남은 북경에 있다. 장남 진필대(陳必大)는 운남 삽대경력을 겨처 대학에 합격하고, 그 후에 미국으로 간다.


진포뢰는 두 부인과의 사이에 모두 6남2녀를 낳는다. 모두 대학을 마쳤고, 어떤 사람은 해외유학까지 한다. 제3대는 '문혁'을 맞이했다. 시골로 내려가서 농민이 되고, 공부의 길을 막혀버렸다. 그들은 '근분구지' '자립사회'의 가풍을 이어받아 성실한 태도로 과학지식을 공부하고, 사회를 공부하여, 어떤 사람은 '적각의생에서 부시장의 직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1997년 6월 <인민일포> 해외판, <중국신문>, <단결보> 밍 해외의 여러 매채에서는 진포뢰 선생의 손녀 진중화(陳重華)가 절강성 항주시 부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진중화는 진포뢰의 둘째아들 진과의 딸이다. 진과는 일찌기 절강의전을 졸업하여 의사로 10년간 일한다. 내과부주임이 된 후에 1948년 천진중앙의원에서 WHO의 자금으로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는 디트로이트의 한병원에서 1년이 못되는 기간동안 일하다가, 신중국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1일전에 귀국한다. 진과는 절강의학원 교수, 절강의과대학 부속제1의원 원장, 절강성 위생청 부청장, 청장을 지낸 심혈관병의 전문가이다.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진중화는 60년대말 삽대로 부춘강의 지류인 분수강 상류의 동려현 영원향에서 일했다. 얼마 후 산민들에 의해 '적각의생'(무면허의사)이 된다. 반농반의로 중초약(中草藥)과 침구(鍼灸)로 시골사람들을 치료했다. 1971년, 그녀는 제약공장을 건립하는 일을 맡고, 2달여만에 합격제품을 만들어 낸다.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그녀느 1974년 간부편제에 들어가고 현위생국 약정책임자, 현계획생육위원회 부주임등의 직위를 맡는다. 그녀는 두 번이나 대학입학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일하면서 한편으로 공부하여, 3년의 시간만에 전문대학졸업자격을 받는다. 그중 '대학어문'은 성에서 1위로 합격한다. 역시 진포뢰 선생의 후손답다. 이를 전후하여, 그녀는 약제사, 위생선교주관기사등 기술자격증도 딴다. 1988년, 그녀는 항주시 계획생육위원회 판공실 주임, 지도참 참장, 시계획생육위원회 부주임, 민혁항주시위원회 부주임 겸 비서장, 주임위원등을 지낸다. 1997년 4월,항주시 제9기인대 1차회의에서, 그녀는 항주시 부시장에 당선된다. 문화, 위생, 체육, 광전, 신문출판, 계획생육등 분야를 책임졌다. 5년후 정부가 바뀌면서 그녀는 항주시 부시장을 연임한다.


거의 이와 동시에, 진중화의 적당형 진사맹(陳師孟)은 타이페이시 부시장이 된다. 그는 민진당원으로 대만독립을 주장한다.


진사맹은 진포뢰의 장남 진지의 아들이다. 진지는 1936년 절강대학 농학원을 졸업한다. 항전기간 감숙에서 제당연구등에서 성과를 내어 감숙성이 추천으로 국비미국유학을 간다. 코넬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만당업공사, UN양농조직, 아사이개발은행에서 근무한다. 말년에는 미국에서 살았다. 그는 저명한 농학전문가이다. 진사맹은 바로 부친이 미국에 있을 때 태어났고, 이렇게 말한다: "1살때 대만에 왔고, 중국에 대하여는 인상이 없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100% 대만사람이다." 


진사맹은 원래 진씨가족의 공부를 좋아하고, 일을 열심히 하고, 효제하는 가풍을 이어받았다. 그는 경제학전문가이고, 대만대학 교수이다. 다만 그는 국민당을 나간 후, 민진당에 가입한다. 민진당 비서장, 타이페이시 부시장을 역임한다. 당시 그의 '대만독립'언행은 진씨의 국내외 장배(長輩)와 동배(同輩)의 불만을 산다. 한때 교단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다시 대만 '중앙은행 부총재'를 맡는다. 최근 그는 다시 대만독립의 무대로 올라가서 천수이볜의 '총통부비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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