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상관황후(上官皇后): 중국역사상 유일한 민며느리 황후

중은우시 2018. 7. 19. 21:51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민며느리(童養媳)는 가난한 집안의 계집아이를 어린나이로 장래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장래의 시집에서 일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나라황실에 민며느리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한소제(漢昭帝) 유불릉(劉弗陵)의 황후 상관씨이다. 그녀가 민며느리가 된 것은 친정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녀의 친정은 부귀한 집안이다. 그녀의 부친인 상관안(上官安)과 한소제의 누나인 개장공주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혼사를 추진한다. 그래서 성격이 민간의 민며느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혼인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일이다. 그녀는 비록 황후라는 귀한 몸이었지만, 생활은 불행했다. 그런 점에서는 민간과 비슷한 점이 있다.


상관씨의 조부는 좌장군(左將軍) 상관걸(上官桀)이다. 부친은 상관안이다. 외조부는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곽광(霍光)이다. 한무제가 죽을 때, 8살짜리 아들 한소제에게 황위를 넘긴다. 그리고 곽광, 상관걸, 거기장군(車騎將軍) 김일제(金日磾)에게 보정(輔政)을 맡긴다. 곽광과 상관걸은 자녀가 서로 결혼한 사돈간이고, 김일제와도 그런 관계에 있었다. 그리하여 곽광이 실제로 정권을 장악한다. 한소제는 나이가 어려서 모친을 잃고, 큰누나인 악읍개장공주가 궁중에 살면서 키워 주었다. 이때 상관씨의 나이는 겨우 몇 살이었다. 부친 상관안은 그녀를 궁중으로 보내 황후를 삼으려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한 것이다. 다만 곽광은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동의하지 않았다. 개장공주에게는 정부(情夫)가 있었다. 이름은 정외인(丁外人)인다. 그녀는 정부인 정외인을 공주의 정식 남편처럼 후에 봉해지기를 바랬다. 상관안은 장인, 부친을 통해서 개장공주와 정외인이 원하는대로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이익교환으로 개장공주는 상관안의 딸이 궁으로 들어가 나중에 황후가 되는데 동의한다. 이는 시원4년(기원전83년)의 일이다. 당시 한소제 유불릉은 11살이고, 상관씨는 6살이다. 둘 다 결혼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상관씨는 궁안에서 길러진다. 성년이 된 후에 진짜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황후로 책봉된 후, 조정에서는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녀는 고조묘에 배알하고, 종친, 귀족과 고위관료들에게 돈과 비단을 상으로 하사한다. 상관안은 표기장군(驃騎將軍), 상락후(桑樂侯)에 봉해진다. 이렇게 그의 권세욕은 만족된다.


원풍원년(기원전80년), 상관걸, 상관안 부자는 모반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 하다가 실패하여 피살당한다. 이때 상관씨는 겨우 9살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모반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좌되지는 않고, 계속 황후로 지낸다. 개략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곽광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해준 덕분일 것이다. 상관안의 모반때, 그의 일당중 누군가 반란을 일으키면 황후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말하지만, 상관안은 그런 것까지 신경쓸 수 없다고 말한다. 사건이 터진 후에도 상관씨는 조부, 부친의 무덤을 만들고, 개인의 노비로 묘를 지키게 했다. 한소제가 17세때 가면례(加冕禮)를 하고 정식으로 성인이 된다. 이때 상관씨는 12살이다. 아마도 그녀는 이때부터 궁중사무를 관리하기 시작한 것같다. 곽광은 한소제와 상관씨 사이에 아들이 생기길 바랐다. 그래서 한소제가 다른 궁녀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오직 황후와만 부부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


원평원년(기원전74년), 21살의 한소제가 죽는다. 15살의 상관씨는 과부가 된다. 곽광등은 상관씨의 명의로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모셔온다. 유하는 숙모인 상관씨를 황태후로 모신다. 유하는 음란하고 무도하여, 곽광등이 상의해서 그를 폐위시키기로 하고 상관씨에게 말한다. 상관씨는 미앙궁(未央宮) 승명전(承明殿)으로 가서, 몸에 주옥으로 장식한 단요(短袄)를 입고 가운데 단정하게 앉아 있고, 어시 수백명이 무기를 들고 있었다. 유하를 조견할 때 상서령이 신하들을 대표하여 유하의 죄상을 읽는 것을 듣고, 상관씨는 유하를 질책한다. 이렇게 그를 폐출시킨다. 곽광등의 안배하에 상관씨는 한무제의 증손자인 유순(劉詢)을 황제로 앉히는데 동의한다.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이다. 한선제는 숙조모 상관씨를 태황태후로 모신다. 한선제가 정무를 친히 처리하게 되면서, 상관씨는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궁중에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진다. 곽광의 처인 동려현(東閭顯)이 작은 딸 곽성군(霍成君)을 예뻐해서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 한다. 한선제는 입궁전에 이미 허씨(許氏)를 취해서, 아들이있었다. 나중의 한원제(漢元帝)이다. 한선제는 즉위후에 허씨를 황후에 앉힌다. 곽광의 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마침 허황후가 회임하여 병석에 눕자, 이 기회를 틈타 여의(女醫)를 매수하여 황후를 독살한다. 그리고 곽성군을 궁으로 들여보내 황후에 앉힌다. 이 곽황후는 친정에서는 상관씨의 이모가 된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조카손자며느리가 된다. 


허황후가 살아 있을 때, 오일에 한번 장락궁에 들어가서 상관씨를 조견하고 친히 음식을 가져다 준다.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곽성군이 황후가 된 후에도, 역시 허황후의 예에 따라, 때가 되면 할머니뻘인 조카 상관씨를 모신다. 상관씨는 이중관계때문에, 곽황후에 대하여 역시 해야할 예를 다했다.


건소2년(기원전37년), 상관씨가 사망하니, 향년 52세이다. 그녀는 궁중에서 47년간 생활했고, 과부로 32년간 있었다.


상관씨는 15살에 과부가 되고, 비록 황태후, 태황태후로 모셔졌지만, 생활에서는 즐거움이 없었다. 여인으로서 47년이 궁중생애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다. 그저 물질생활이 죄수보다 나을 뿐이다. 그녀와 한소제의 결합은 일종의 정략결혼이다. 이를 보면 사회의 최고층에서의 혼인에서 정략결혼은 당사자들에게 일종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