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산진자투(散陣自鬪)의 진나라군대가 어떻게 육국을 이겼을까?

중은우시 2017. 10. 2. 00:41

글: 최강냉파중(最强冷吧衆)


진나라의 굴기에 관하여 그리고 최종적으로 육국을 병합한 것에 관하여 얘기하려면 모두 진나라군대의 전투력이라는 이슈를 피해갈 수가 없다. 어쨌든 전통적으로 누군가 나서서 진나라의 사당이 좋다고 떠들어도,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전쟁의 제일선에 나서서 진나라의 영토를 넓혀갈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변법, 군수, 종합실력이라는 말로 진나라군대 자체의 실력에 대하여 직접 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국시대의 저명한 군사가인 오기(吳起)는 일찌기 자신의 병법에서 진나라군대를 "산진자투" 즉 진법이 흐트러져있고, 병사들이 각자 싸우는 군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다른 어느 육국의 군대에 대하여도 다시 내려지지 않았다. 고대전쟁에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고인들의 전투에서 중요시한 것은 대형과 진법이다. 산진자투의 부대라면 그것은 오합지졸을 가리킨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천여년전의 진나라군대는 도대체 어떻게 산진자투하면서 전투력이 약하지 않았던 육국의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진시황 병마용은 이미 천개에 가까운 병용(兵俑)을 발굴하였다. 주로 중군보병부대를 위주로 하는 1호갱과 측익기병등 기동부대를 위주로 하는 2호갱에 분포되어 있다. 얼핏 보면 대열이 잘 짜여져있는 병용이 놓여져있으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대의 군대포진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각각의 병용을 살펴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 병용은 대량으로 사격에 쓰는 노(弩)를 장착한 것을 제외하면, 근접전무기 장비는 각양각색이다.


1호갱에서 앞의 3줄의 대부분 노만 사용하는 경장무갑노수(輕裝無甲弩手)를 빼고 보면, 진 안의 나머지 보병들은 모두 1량의 군관이 앉아있는 전차의 뒤에 배치되어 있다. 그들중 70%는 갑옷등 당시에 유행하던 보호용구를 착용하고 있다. 궁노 외에, 근접전 무기의 종류로는 검(劍), 모(矛), 과(戈)와 피()가 있다. 만일 검이 장교 혹은 궁노수의 방어무기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모, 과와 피는 근접전을 하는 사병의 장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이한 점이라면, 이들 무기는 통일적으로 진안의 특병 분대에 분배되어 있지 않고, 일종의 흩어진 형식으로 분배되고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나라군대의 보병은 실전에서 자주 소분대를 단위로 하여, 사병이 상호 협력하되 각자 싸웠다는 것이다. 오기가 말한 산진자투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매 편대에는 군관이 타는 전차가 존재한다. 이는 진나라군대가 수하인 호랑지사를 아무런 질서가 없이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을 그냥 놔두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 잔차는 부근의 보병전투를 지원하는 노를 장비하고 있을 뿐아니라, 객관적으로 편대작전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서로 다른 사병이 협조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만일 오기가 말한 산진자투라는 말이 진나라의 기율을 평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다만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습관된 편대에 있어서 진나라군대의 이런 혼합분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능이 완비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모두 해당무기에 정통하지 않게 된다. 동시대의 그리스 로마 군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실력부족이 드러난다.


아마도 누군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방역사상 진군처럼 산진자투하던 시기는 없었는지? 기실 정말 있었다. 멀리 서주가 설립되기 200여년전에, 유럽에서 온 군사이민이 일찌기 대거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바로 산진자투의 고수들이다.


고고학적 발견에따르면 고대이집트의 기록에서 이들 '해상민족'이라 불리는 오랑캐는 장모를 사용하는 사병과 검을 잘 쓰는 무사들이다. 5인을 1조로 하여 작은 작전단위를 구성한다. 비록 산진자투의 풍격이지만, 이들 지중해의 호랑지사는 아시아 아프리카 연해지방에 여러해동안 해를 끼친다. 파라오시대의 이집트인과 성경시대의 유태인들에게도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더욱 일찌기, 그리스반도의 미케네문명도 중갑옷과 큰 방패를 든 정예무사들과 장비가 비교적 떨어지는 평민보병이 협력하는데 익숙했다. 그리하여 소규모의 혼합편대를 구성했다. 전군의 최고지휘관과 귀족무사는 모두 전쟁터에서 전차를 몰았다. 대형의 앞에서 돌진하면서 휘하군대가 적진을 돌파하도록 이끌었다. 군대의 사병의 무기는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전군이 돌진하면서 대오를 이탈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차는 속도를 늦추어야 했고,전군은 빠른 걸음 혹은 가볍게 달리기의 속도로 공격을 감행했다.


미케네 그리스인은 바로 이런 군대로 계속 바다를 건너아시아지역으로 왔고, 서아시아를 쟁패하고 있던 히타이트와 전쟁을 절인다. 오랫동안 지속된 이 혼전에서 나중에 호에로스 사시의 트로이전쟁의 원형이 이루어진다. 2004년, 사실적 장면을 추구하는 서방의 영화인은 이를 배경으로 신판 <트로이>를 제작하여 대형스크린에 담는다. 우리는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고대의 전차와 혼재편성된 보병들이 어떻게 전투를 벌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계속 언급하는 당시의 서양인의 전투때, 엄격하게 대형을 따르지 않았고, 신분에 따라 무사대 무사, 평민대 평민의 산진자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일찌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가장 오래된 문명의 훈도를 받은 하타이트제국의 군대는 상대방의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군대는 고대 수메르인과 당시 이집트인의 영향을 받아, 같은 무기를 장비한 사병으로 당배한 편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두께가 100인 종심의 대방진을 만든다. 바로 당시 가장 선진적인 보병의 모습이다. 산진자투를 벌이면서 약간의 전차로 돌진하는 적군은 이런 진법이 엄격한 부대를 만나게 되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히타이트인은 더둑 치명적인 전차대군으로 양날개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케네인들은 결국 히타이트인들에 의하여 소아시아반도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중에 서방의 고전시대에 저명한 그리스와 로마군대는 같은 유형의 사병으로 편대를 구성하여 전투하기 시작한다. 마라톤평원에서 페르시아제국의을 물리친 아테네중보병이든 아시아의 중심에 들어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의 원정군이던 혹은 나중에 여러번 파르티아제국의 수도를 공격하고 불태웠던 로마이건 그들은 모두 군대내에 근접전과 원거리사격을 담당하는 사병을 단독으로 편제하고 전쟁터에서는 편제를 가지고 병력자원을 배치했지 개인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아주 신축성이 없을 것같은 방식이 실은 대규모 교전에서는 더욱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빠르게 임기응변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준다. 연속하여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아시아민족군대는 왕왕 사병이 동시에 여러가지 무기를 장비하고 현성편제되어 있었다. 그 결과 여러번의 싸움에서 관건적인 순간에 배치가 불합리하거나, 반응역량이 약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읽고나면,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진나라군대의 전술이 동시대의 세계주류로부터 그렇게 낙후되어 있다면, 왜 전쟁터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육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을까? 오기가 비록 진군은 산진자투한다고 말하고, 다른 열국의 군대에 대하여는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진시대의 군대가 기본적으로는 과거 서주군대의 기초 위에서 변화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자연히 육국의 군대를 그다지 높이 평가할 필요는 없다.


서주는 중원지구의 서부변방에 위치한 부락국가였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전차등 기술을 얻은 후 성공적으로 원래 은,상이 주도하던 중원대지로 진출할 수 있었다. 주의 군사이념은 귀죽무사의 전차를 핵심으로 하고, 정치와 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은 백성을 보조로 하여, 전차를 따라 전투하는 것이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착야인은 군대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수벽년동안 중원지구가 전차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이다. 심지어 열국쟁패가 시작된 춘추시대에도 이런 국면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는 보병의 역할과 전술적인 지위가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군사배치와 전략은 이상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게 된다.


기원전6세기에 이르러, 진(晋)나라의 장수인 위서(魏舒)가 비로소 보병을 위주로한 적인(狄人)과 전투할 때 전차전의 주도적 지위를 포기한다. 강제로 갑옷을 입은 무사들을 전차에서 내려서 보병을 이끌고 소부대전투를 벌이게 한다. 보병의 지위가 마침내 중요하게 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전의 보병들은 기본적으로 72:1틔 형식으로 1-2대의 전차를 따라 전투했다. 전차위의 무사는 바로 이 보병분대의 지휘관이다. 이점은 20세기의 고고학자들이 진시황병마용에서 보는 광경과 완전히 일치한다.


두 가지 다른 점은 진나라군대가 존재했던 전국시대말기에 보병은 이미 군대네에서 중요한 주력이 되었다. 장교의 전차는 오히려 보병대오를 통제하거나 보조하는 것을 위주로 하믄 비공격성 역량으로 바뀐다. 서주에서 춘추까지, 중원과 주변지구의 군대에서 전차는 모두 전쟁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플랫폼이었다.


강대한 진(晋)나라가 위, 조, 한으로 삼가분진된 후, 전국시대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열국은 속속 자신의 변법도강과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가장 앞선 위나라는 경전으로 정예 위무졸부대를 양성한다. 이는 당시 중원지구에서 가장 강한 보병으로 갑옷을 입었다. 동시에 노와 과를 장비했다. 최초로 대규모로 동일무기를 장착한 사병으로 조직된 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의 원거리무기속성은 이들 정예부대가 포진에서 비교적 느슨한 사격대형을 취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양군이 육박전을 벌일 때, 과를 사용하는 위무졸들은 흩어져서 각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와 같이 진에서 갈라져 아온 조나라와 한나라도 자연히 비슷했다. 그중 한나라는 더더욱 강한 노와 검을 잘쓰는 병사로 유명했다. 그러나 확실히 근접전위주로 짜여진 것은 아니다.


이는 산진자투하면서 사기가 왕성한 진나라군대로 하여금 실력을 발휘할 여지를 많게 해주었다. 하물며 진나라는 변법을 전후하여, 대량으로 위나라등지에서의 중원인을 받아들이는데, 그들은 각자 국가의 경험을 가지과 관중으로 온다. 그리하여 진군은 상대방의 전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국력이 빈약한 연(燕)나라와 군대의 질이 게속 낮았던 제(齊)나라는 마찬가지로 궁노와 혼편방식으로 자신의 군대를 주도했다. 남방의 초(楚)나라는 산이 많은 숲이라는 환경에 익숙해서 더더욱 보병의 기습과 돌파를 중시한다. 장비에서는 각종 무기를 혼용해서 썼다. 중원에서 산전수전을 다껵은 진나라는 자연히 여러 전투에서 경험을 축적한다.


전국시대의 특수한 상황하에서의 산물로 진나라군대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역사에서 잔혹무도한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21세기초의 일련의 영화드라마에서 띄워준 것때문에 별로 뛰어나지도 않은 진나라군대는 완전히 변신하여 그 시대의 모범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앞에는 다큐멘터리 <부활의 군단>이 있다. 고고학적인 성과를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깃대유적을 가지고 7미터 장창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진나라군대에 기세가 대단한 장창방진이 있었다고 말한다. 뒤에는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빛나는 낭만주의 환타지드라마 <영웅>이 있다. 진군의 보통궁노를 마치 전략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있는 고대의 미사일부대처럼 만들었다.


지금 3부작 <대진제국>에 나왔는데, 더더욱 전술이 낙후하고 살벌무도했던 진군을 무슨 인의의 군대인 것처럼 그렸다. 예술가들의 계속된 노력으로 무수한 맹목적인 팬들이 나타났고, 미친듯이 좋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마치 고대의 그 양식있는 사상가들을 조롱하는 것이고, 더더구나 수십년동안 머리박고 열심히 연구하며 정익구정(精益求精)하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을 잔혹하게 짓밟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