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멸연(秦滅燕): 태자단(太子丹)의 종착점
글: 왕욱기(王昱祺)
기원전228년, 진나라군대는 한단을 공격하려 함락시키고, 나아가 조나라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다. 그후 진나라는 조나라의 성읍을 접수하느라 바빴고,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 후에 몇 가지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먼저 한나라 신정의 귀족들이 모반을 일으킨다.
기원전227년, 원래의 한나라귀족은 진나라가 그들의 전답과 재산을 박탈하는데 불만을 품고 근 3년이 지난 후 마침내 모반을 모의한다.
이때 진나라의 대군은 다수과 광활한 조나라에 배치되어 있었다. 진시황은 즉시 10여만을 조직하여 왕전의 아들 왕분에게 지휘하게 하고, 이신을 부사령관으로 삼아서 신정으로 보내어 반란을 진압한다.
신정의 반란이 아직 채 진압되기도 전에, 남방의 초(楚)나라가 문제를 일으킨다. 초나라의 공자 웅부추(熊負芻)가 동생 초애왕(楚哀王)을 죽이고 새로이 초왕에 오른다. 초왕 부추는 등극하자마자 항연(項燕)으로 하여금 군대를 지휘하여 진나라와 전투를 크게 벌일 준비를 하게 한다.
신정의 동란과 비교하자면, 초나라의 위협은 훨씬 컸다. 초왕 부추는 두 형제인 초유왕이나 초애왕과는 달랐다. 그의 외교전략은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진나라를 친다는 것이다.
이때의 형세는 만일 초나라가 한나라의 원 귀족들과 연합하게 되면, 위나라 제나라도 기회를 보아 진나라에 반기를 들 것이다. 비록 열국이 합종을 하더라도 진나라의 통일로의 발걸음을 저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열국이 합종했다면,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수년에서 십여년 지연되었을 것이다.
강경책과 유화책을 같이 써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진시황시대의 큰 진보였다. 이때 진시황의 선택은 외교였다.
초나라에는 공자 창평군(昌平君) 웅계(熊啓)는 진시황 초기의 내각에서 어사대부를 맡는다. 진시황의 초기에 공로를 세웠고, 지금은 초나라의 진성(陳城)에 있다.
그래서, 한나라 남양태수등, 조나라의 곽개를 상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위료는 큰 돈을 가지고 길을 터서 옛날의 우정을 가지고 높은 관직을 약속하여 창평군의 마음을 움직인다.
초나라 항연의 대군이 아직 소집완료되기 전에, 창평군 웅계는 진성에서 선포한다. 자기야말로 초왕이라고.
이제 항연은 머리가 아파졌다. 창평군 웅계와 초왕 부추는 형제간이다. 후방이 불안하면 대장군이 절대 쉽게 병사를 움직일 수 없다.
신정쪽에 왕분은 부친 왕전의 기풍을 물려받았다. 신정에서는 초나라의 지지가 없으면 반란을 평정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왕분은 먼저 역량을 집중하여 신정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 후에 몸을 돌려 병력을 진,초의 국경으로 옮긴다. 초나라군대는 감히 나서서 싸우지 못한다.
바로 왕분이 이 골치아픈 반란을 평정할 때, 천하를 진동시키는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 즉,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시도한 사건이 일어난다. 연나라의 태자단은 확실히 지간을 잘 골랐다. 단지 대외적으로 병력을 일으키기 곤란할 때야 진시황은 비로소 연나라를 중시하게 된다.
진시황은 전체적으로 온건한 사람이다. 그러나 형가자진왕사건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연나라를 치기로 한 것이다.
왕분과 이신은 금방 초나라의 전선에서 1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전선으로 간다.
연나라는 진나라의 맹방이었고, 원래 가장 마지막에 멸망하는 동방제후국이 될 수 있었다.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했기 때문에 연나라의 멸망시기는 한나라, 조나라의 뒤를 이어 세번째가 된다.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출병한 것은 기실 조나라의 옛 영토에서 병력을 일으켰다. 진나라의 국경은 이미 연나라와 붙어버렸다.
왕분의 십여만대군은 영정하(永定河)를 넘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평원이고, 연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은 더 이상 방어할 험준한 지형이 없었다.
그러나 연왕희(燕王喜)와 태자단은 일찌감치 도망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연나라의 동북은 종심이 매우 깊어서, 연왕희는 요동으로 가서 계속 한 지방을 할거할 생각이었다.
계성은 빈 성이 되고, 왕분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계성을 점령한다.
왕분은 손쉽게 계성을 점령했다. 그의 부친 왕전이 고생고생하면서 힘들게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과는 달랐다. 이는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영웅이 역사를 바꾸는 것인가?
연나라는 도성을 잃었으니, 이론적으로는 나라가 망한 것이다. 비록 연왕희가 멀리 도망쳤지만...
연나라의 역사는 주나라와 동시에 시작한다. 즉 이 팔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후국이라고 할 수 있다.
팔백년전에, 주무왕 희발(姬發)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후, 동생 소공(召公) 희석(姬奭)을 연으로 보낸다(지금의 북경과 하북성 중,북부). 연나라의 도성은 계성(지금의 북경시 방산구 유리하)이다.
희석은 주무왕 희발의 친동생일 뿐아니라, 둘째형인 주무왕 희발이 상주왕(商紂王)을 토벌할 때 한마공로를 세운다. 희석은 지위로 보나 공훈으로 보나 모두 뛰어나게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연나라는 주왕조와 동시에 성립된 국가이고, 연나라 국군의 성은 희(姬)로, 주나라 천자와 같은 성이다. 희석의 후손들은 항상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때 주왕조의 북부는 아무도 지배하지 못한 땅이었다. 이전에 상왕조도 이 땅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 당시의 화북평원은 황하가 자주 물길을 바꾸고, 홍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융적(戎狄)이 활동하는데 이들은 홍수보다도 무서웠다.
이곳의 사방환경을 보면, 서쪽은 태행산에 적적(赤狄)이 있고, 북쪽에는 흉노(匈奴)와 임호(林胡)가 있고, 동쪽은 바다이고, 남쪽은 하도 많아서 명칭을 다 헤아릴 수도 없는 융인(戎人)이 있다. 이곳은 명실상부한 전란(戰亂)의 땅이었다.
주무왕의 동생 소공은 명을 받아 주왕조의 최북방을 봉지로 받는다. 연나라는 바로 주왕조의 북대문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또한 주나라 북방영토의 고독한 수망자(守望者)이다.
연나라의 북쪽은 연산산맥이고, 서쪽은 태행산이다. 두 개의 산의 건너편에는 많은 유목민족이 있어, 언제든지 연나라를 침략할 수 있었다. 연나라의 팔백년 역사는 어느 한 순간도 이들 외래침입자들을 방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연나라의 남쪽은 각종 융인이 있다. 거리가 가장 가까운 제후국인 제(齊)나라와 형(邢)나라도 연나라와 수백리가 떨어져 있었다. 연나라는 북방유목민족과 각종 융인을 막아내는데 완전히 자신의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땅은 좋지 않으나 책임은 중대하다. 이는 연나라 봉지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설명이다.
그러나 서주 춘추전국 팔백년을 거치면서 연나라는 사방팔방에서 오는 외족의 침입을 막아냈을 뿐아니라, 전국후기에는 요동의 천리를 개척한다.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연왕희는 수십만의 연나라 군민을 이끌고 침중한 심정으로 그러나 호호탕탕하게 요동으로 옮겨간다.
일찌감치 계획했기 때문에, 전기에 이미 대량의 양초를 요동으로 옮겨놓는다. 이번 이사는 단지 진시황암살을 실패한 후의 B플랜이었다. 그러므로 군민들은 당황하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연나라 태자단은 명을 받들고 십여만의 연나라 대군을 이끌고 뒤를 막았다.
진나라의 사령관 왕분은 역시 왕전의 아들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전술은 아주 온건하다. 그는 단지 군대를 파견하여 연나라의 핵심지역의 성읍을 하나하나 정멸하고, 병력을 보내어 연나라 태자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왕분은 용모에서나 성격에서나 모두 그의 부친을 그대로 닮았다. 연령때문에 그는 왕전보다 약간 키가 크고 말랐고, 얼굴의 웃음기도 약간 적을 뿐이었다. 손발의 거동은 부친의 기질을 그대로 닮았다.
왕분은 왕전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그는 연나라의 도성까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점령한 후, 함부로 진격하지 않고, 착실하게 부근의 성읍을 하나하나 점령한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키고 함양에서 파견해온 관리가 접수하기를 기다렸다.
왕분은 전력으로 맹추격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중요한 원인이 있다. 당시 대왕 조가는 상곡군과 대군에서 독립하여, 많은 조나라를 충성으로 옹호하는 자들이 계속 그에게 의탁하러 갔다. 조가의 군사력은 십여만에 달하였고, 모두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조나라에 죽음으로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상국군에서 연나라 도성까지 태행산의 최후 통로인 "군도형"으로 오면 아주 빠르게 올 수 있다.
만일 왕분이 주력으로 연나라군대를 추격했다면, 조나라군대는 아마도 '군도형'으로 몰려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군대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며, 양초공급선이 끊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안전하게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왕전은 절대 모험하지 않았고, 왕분도 마찬가지였다.
왕분의 온건함과 비교하면, 부사령관 이신은 완전히 다른 풍격이었다. 전투에서 용맹하고, 모험을 겁내지 않았다. 이신의 강력한 요구로, 왕분은 이신에게 원망듣기 싫어서, 의례적으로 3천의 군대를 이신에게 주어, 이신이 연나라군대를 추격하고 싶다는 바램을 채워준다.
이신의 이번 추격과 관련하여 먼저 이신의 가족을 소개해야 한다. 이신의 용병은 가족전통이기 때문이다.
이신이 이름을 날리기 60년전에, 조나라의 상국(相國) 이태(李兌)는 이신의 선조이다.
이태가 어떤 사람인가. 호담웅심(虎膽雄心)으로 무서울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무령왕을 굶겨죽였으니, 표범의 담(豹子膽)을 먹은 것같았다.
이태가 죽은 후, 이씨가족은 이 오점으로 인하여 조나라에서 배척을 당한다. 일부 사람들은 진나라로 옮겨가고, 진나라에서 대대로 장수를 지낸다.
이신이 이름을 날린 60년후에는 이신의 후손인 이광(李廣)이 있다. 비장군 이광은 혼자서 흉노와 싸웠으니 담량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광의 아들 이감(李敢)은 이름 그대로 용맹하기 그지없었다. 대장군 위청도 그는 감히 암살하려 했다. 그러니 그가 못할 게 또 뭐가 있겠는가.
이신의 가족은 용맹이 큰 특질이다. 이런 가족특성은 이신이 비록 삼천의 인마밖에 없지만, 태자단을 쫓아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있었다.
삼천명으로 십여만명을 추격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를 바 없다.
이신은 삼천명을 데리고 출발한다. 이 삼천명이 진나라의 정예부대는 아니었다. 연군을 만나면 백병전을 벌이면, 기본적으로 한명이 한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신의 가족사를 보면 우리는 이신이 분명 용맹하기만 하고 모략은 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기실 이신의 가족중에서 이태, 이광등은 모략도 있었다. 단지 그들의 용맹함이 너무 특출하여, 용맹하기만 하고 모략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산은 용맹하면서 모략도 있었다.
이신은 태자단과 결전을 벌이려 했지만, 그는 직접 태자단의 십여만 주력을 찾아가서 붙으려고 할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태자단의 이 후방추격군을 막는 대군에게 무슨 약점이 있느냐고 말하자면, 정말 꼬집기가 쉽지 않다.
태자단은 평소에 예의로 현명한 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들을 대했다. 군대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많은 장병들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명망은 심지어 그의 부친 연왕희보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신은 역시 장수의 재목이었다. 그는 태자단대군의 문제점을 찾아낸다.
전방에 수십만명이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고 있었으므로, 태자단의 군대는 천천히 옮길 수밖에 없었다. 행군속도가 아주 느렸다.
태자단은 추격군을 막는 부대를 여덟 부대로 나눈다. 매 부대는 1만에서 2만의 사이이다. 행군을 할 때, 마지막 1개부대 즉 제8부대는 제1부대의 앞으로 간다. 나머지 7개부대는 그대로 있는다.
이것은 어떤 행군법인가? 항상 1개의 부대는 신속히 이동하고, 나머지 7개 부대는 가만히 있는다. 이는 행군속도를 8분의 1로 낮추는 것이다.
이렇게 갈 때의 좋은 점이라면 만일 적군이 다가왔을 때 제7부대 즉 마지막 부대는 휴식을 오래 하였기 때문에 항상 편안히 앉아서 피곤하게 달려온 부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제7부대가 무너지면, 제6부대가 맞이한다. 이렇게 차례로 싸우게 되므로 가장 피로한 제1부대는 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이 철군방식만 보더라도 연나라에는 인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자단의 수하에는 능력있는 자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신의 3천의 피로한 군대가 1만여명의 연나라군대를 만나면, 그것도 휴식시간이 가장 긴 제7부대를 만나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이 없어보이는 이 철군의 진법이 이신의 눈에는 한푼의 가치도 없어 보였다.
용병의 도리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데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제압당하지 않는데 있다. 만일 이신이 태자단의 방식으로 싸우면, 분명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다. 이신은 연나라군대는 아예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는 먼 길을 돌아서 요동으로 간다.
태자단은 분명히 바보가 아니다. 연산에서 그는 척후활동을 많이 했다. 진나라군대가 우회하여 갔다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러나 이신은 이미 결심을 했다. 3천진나라군대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일단 행적이 노출되면, 시신도 남기기 어려운 살신지화를 당할 것이다.
진나라군대는 깃발도 휴대하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나라군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였다. 야간에도 횃불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경이 긴장되고 바람소리 풀소리에도 바로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3천명이라고 하지만, 광대한 연산산맥에서서는 그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배 한 척같았다. 그리고 설사 연나라의 척후가 그들을 발견하더라도, 절대로 그들이 진나라군대라고는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3천의 진나라군대는 숨기 위해서 그리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조용히 소리없이 연산을 넘어간다.
태자단의 행군속도가 너무 느려서, 진나라군대가 먼저 요하를 넘은 후, 며칠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이때의 이신은 다시 그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다. 그는 요하곁에 주둔시키고, 태자단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방식은 일부 도하한 연나라군대를 격패시킬 수는 있지만 분명 연나라군대에 큰 타격을 가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인원수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신은 기습장소를 요하의 한 지류로 정한다. 이 강은 바로 태자하(太子河)이다.
이 태자하는 요동군의 치소 양평(襄平)으로 가는 길이다. 강을 따라서 넓은 관도(官道)가 있다. 이곳은 연나라군대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태자단의 십여만인마는 차례로 요하를 건넌다. 그러자 대군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왜냐하면 요하는 아주 넓고, 물살이 빨라서, 요동군과 요서군을 나누는 천연경계선이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요동이다. 태자단은 더 이상 원래의 방식으로 철군하지 않고 자신이 천여명의 금위군을 이끌고, 급히 요하를 따라 양평으로 가서 연왕희에게 보고한다. 이 십여만 대군은 다른 장군에게 지휘하도록 넘긴다.
이어서 바로 이신의 군대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다. 그들은 낡아빠진 연나라군대의 옷을 벗어버리고, 칼을 갈면서 전투를 준비한다.
바로 태자단이 요하를 건넌 그 저녁에 태자단의 영지에서, 돌연 2천의 의복이 남루하고, 눈빛이 흉악한 진나라사람들이 나타난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이들 진나라사람들이 어찌 사지에 몸을 둔 결과를 모르겠는가? 태자단의 금위군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한 명이라도 살려보내게 되면, 전군몰살의 살신지화가 닥칠 것이다.
태자단의 군대는 저항할 여유가 없었다. 온 자들이 누구인지도 알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그냥 죽임을 당한다. 태자단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얼굴로 상대방 우두머리의 머리모양을 본다. 진나라의 장군같았다. 이 우두머리의 허리에는 달빛아래 빛이 나는 남전옥(藍田玉)을 달고 있었다.
진나라군대이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태자단은 놀라면서 의혹을 품어 칼을 뽑아서 저항해야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 장군이 창으로 찌르다 자신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된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 장군이 바로 이신이다.
태자단이 죽었다는 소식은 금방 양평에 전해진다. 연왕희, 아니 이제는 요동왕희라고 불러야 하는 그는 어떻게 하더라도 기뻐할(喜) 수가 없었다.
양평에서 새로 지은 연나라 종묘에서 연왕희는 여러 신하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조종의 앞에서 대성통곡한다. 그가 영토를 잃은 것을 통곡하고,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태자를 위해 통곡했다.
연나라의 조상들 앞에서 비통에 빠진 요동왕희는 악독한 맹세를 한다: "진정, 너는 단자단손(斷子斷孫)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