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왜 제국을 잃어야 했는가?
글: 후홍빈(侯虹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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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전쟁시기에 성을 도살하는 것(屠城)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항우는 특히 이를 좋아했다. <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진2세 2년(기원전208년), 항우는 양성(襄城)을 도살한다. 같은 해, 유방, 항우는 성양(城陽)을 도살한다. 2년후, 항우는 함양을 도살한다: "수일동안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함양을 도살한다. 진나라에서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실을 불태워 불이 3달동안 꺼지지 않았다; 그 보물과 부녀를 거두어 동쪽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제나라땅을 도살한다: "북으로 가서 제나라성곽과 가옥을 불태우고, 전영의 투항한 병졸을 모조리 갱살한다. 노약자와 부녀를 끌고간다. 제나라에서 북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이 잔멸(殘滅)된다."
이전의 귀족은 생사를 가볍게 여기고, 도의를 중히 여기는 특징이 있었다. 인명을 중시 여기지 않는 나쁜 습관도 있었다. 가소로운 점이라면, 항우가 득의망형할 때, 돈과 여자까지 탐하면서 마지막 남은 귀족의 기질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유방도 그다지 선량해보이지 않는다. 항우와 함께 성양을 도살한 외에, 진2세 3년, 그는 영양(潁陽)을 도살한다. 그리고 물을 끌어들어 폐구를 물에 잠기게 한다; 항우를 이긴 후에 유방은 천하의 병력을 데리고 노(魯)를 도살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유가의 성보(城父)도살이 발생한다. 번쾌는 호릉, 자조, 폐구를 도살한다; 주은은 육읍을 도살한다; 주발은 마읍을 도살한다; 시무는 참합을 도살한다; 난포는 조나라 도성 한단에 물을 넣어 잠기게 한다; 주발은 혼군을 도살한다(의문이 있음). 이상의 사건들은 모두 설명한다. 진나라말기의 전쟁때, 장군들은 도성을 별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성격이 조급했고, 사람을 죽이는데 눈이 벌건 사람들 항우, 번쾌가 그러했다. 성격이 정상적인 사람, 유방같은 사람은 몇 개의 성만을 골라서 도살하였다.
항우와 같이 극도로 포악한 자와 비교하면, 유방의 포악한 정도는 보통이다. 오히려 크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유구하고 이전의 사람들의 의식에서, 사람의 목숨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귀하지 않았다. "도(屠)"라는 글자는 실로 말로 다하기 힘들 피비린내가 숨어 있다. 시체가 강물에 쌓여서 강물이 흐르지 못한다든지, 도처에 불꽃이 피어오른다든지, 온 산과 들에 곡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다든지. 공기에 타는 냄새와 연기냄새와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한다든지. 온 땅이 피비린내라든지. 온 땅에 발을 디디면 진득진득한 발자국이 남는다든지. 사병들이 사람을 다 죽이고 나면 내리치다가 날이 굽은 칼을 들고 중얼중얼거리면서 금방 죽인 자의 뼈가 너무 단단하다고 투덜댄다든지....매번 도성이 이루어지면 거의 비슷하다. 전쟁이 개시되고, 피를 묻히게 되면 한 명을 죽이건 백명을 죽이건 이들의 눈에는 모두 차이가 없다(머리를 잘라서 군공을 얻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러나, 순식간에 이들 사병들도 항복한 병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의 운명도 남이 그다지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항우가 갱살한 20만의 항복한 병졸들은 20만의 건장한 남자이다. 모조리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분명 여러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삽을 들고 다른 사병을 파묻는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하지 않았을가? 토사호비(兎死狐悲)하지 않았을까?
현재 자주 이렇게 얘기한다. 현대전쟁은 선진적인 무기가 있어서 아주 잔혹하다고. 현대무기가 가져다준 상해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잔혹한 것은 원래 사람의 마음이다. 역사상 전쟁에서 살상력이 가장 큰 것은 원자탄이다. 다만 두번의 원자탄 폭발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자수는 더해보아야 20만이 넘지 않는다. 그렇다. 아주 잔혹하다. 그러나, 항우가 한번애 갱살한 것이 이십만명이다. 수십년 먼저 진나라이 백기도 한번에 조나라의 투항한 병졸 40만을 갱살했다(숫자는 아마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의 군대가 전쟁중에 참수한 사람만 90만에 이른다. 다만 원시적인 냉병기로 사람을 죽이려면 골치아프다. 그러나 위력은 원자탄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그 어떤 무기의 살상력도 인심의 잔혹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나중의 역사발전과정에서, 매번 전란을 맞이하면, 도성(灌城 즉 성을 물에 잠그는 것 포함)은 여전히 두려운 전통처럼, 계속하여 유지되었다. 어떤 사람은 항우가 투항한 병졸을 갱살한 것은 그들이 창을 거꾸로 들까봐 겁이나서였다고 한다. 합리적이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진,한시기의 대도살은 많은 경우 군사전략상의 고려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감정이 발설이나 탐욕의 만족등등을 위한 것이었다.
항우가 최종적으로 패망한 것은 그가 투항병사를 죽이기 좋아하고, 도성을 좋아한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나중이 효장 이광(李廣)이 죽을 때까지 제후에 봉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 자신이 최후에 내린 결론은 그가 팔백의 투항병졸을 죽였기 때문에 불길해서라고 하였다.
비교하자면,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러 성읍이 소식을 듣고 투항하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는 유방이 계속하여 장수를 거두어 들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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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더 많은 자료와 수치로 유방, 항우의 군대구성을 분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항우는 집안대대로 명장이고, 그의 수중에는 적지 않은 비교적 뛰어난 직업군인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방은 처음 삼천명이 모두 임시로 모집한 것이어서, 유협(遊俠)도 있고, 군도(群盜)도 있고, 보통농민도 있고, 하층관리도 있다. 그후의 전쟁에서, 계속하여 새로운 의거인원이 유방에 가담한다. 실제로 이렇게 복잡한 대오는 지휘하기가 어렵다. 의거부대는 왕왕 폭력조직이다. 특히 많은 의거자들이 모두 하층농민일 때는 더욱 겁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다. 동시에 염치나 도덕관도 없다. 그들은 그저 굶구렸고, 동시에 굶주림으로 인한 광기와 원한만 남아 있다. 의거자들은 주의(主義)에는 관심도 없고, 강탈과 살인이야말로 그들의 목적과 흥취인 경우가 많다. 이백여년후, 서한말기의 녹림, 적미군은 충분히 '의군'의 진실한 면목을 보여주었다. 부패한 정부가 달라는 것은 너의 돈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 격동한 강탈자들은 너의 돈을 달라고 할 뿐아니라, 너의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이 땅 위에서, 너무 심하게 착취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먹을 거리를 조금만 남겨주면, 그들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잊어버린다. 시시때때로 통치자를 위하여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통치자의 잔혹과 탐욕이 도를 넘으면, 하층백성들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목숨도 아까지 않고 더더구나 남의 목숨을 신경도 써지 않는 잔혹함과 피의 굶주림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이성적인 정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고귀한 점이라면 이 정벌과정에서, 유방은 그의 수하인 명장들을 빌어, 성공적으로 이 수하의 의거군을 단속했다는 것이다.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고나서 문제는 설명된다. 진왕 자영이 투항한다. 모두 그를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방은 말한다: "회왕이 나를 보낸 것은 바로 내가 비교적 관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이미 투항했지 않으냐. 죽이면 불길하다." 비록 진나라궁안의 보물과 미녀를 보자마자,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던 유방의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그는 번쾌, 장량의 권유를 듣고,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군대를 패상에 주둔시키고, 소하로 하여금 진나라 승상부의 도적문서를 모조리 거두데 한다. 재물도 갖지 않고, 미녀도 갖지 않았으며, 영지도 갖지 않았다. 그저 각종 호적자료, 법률문서, 재정보고서, 세무장부, 지도와 내무부서적을 가졌을 뿐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나라제국이 시정과 통치를 유지하는 근본이다. 이를 보면 이때의 유방은 이미 황제가 될 준비를 한 것같다. 동시에 백성들을 다독였다. 그는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린 함양 사람들에게 '약법삼장'을 포고하였고, 백성들이 군대에 물자를 가져다 주어도 받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했다.
유방이 정말 천성적으로 그런 사람일가? 당연히 아니다. 아부 범증이 항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패공이라는 사람은 원래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했습니다. 이번에 관중에 들어가고나서 '진귀한 물건을 갖지 않고, 부녀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면 그 뜻이 아주 큽니다.' 그리고 다시 유방에게는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항우에게 그를 빨리 죽여버리도록 권한다. 범증은 정확하게 보았다. 유방은 장기적인 목표를 위하여, 적시에 자신의 토기(土氣)와 비기(痞氣)를 버릴 줄 알았다. 그리고 실제에 맞지 않는 유협몽(遊俠夢)을 버린다.
그러나, 항우는 차이가 너무 컸다. 그는 함양에 들어가자, 며칠도 지나지 않아 함양성을 도살한다.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궁실을 불태운다. 불길은 3달이 되도록 꺼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후에 보물을 모조리 빼앗고, 미녀를 데리고 동쪽으로 간다. 기실, 항우가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그가 지도자가 되려고 결심하면, 민중은 아무런 방법이 없다. 강산을 차지하고 그렇게 2,3년을 지낸다. 천하에서 만세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은 진정성이 들어가게 된다. 누구든지 항우를 내쫓으려고 하면, 아마도 백성들은 항우를 따라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하였는가? 천하를 수습할 준비를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명백히 전투에도 관심이 없어지고, 주둔하는데도 관심이 없어지고, 그저 한번 강탈하면 떠나는 강도같았다. 강탈이 끝나면 살인방화를 하고 시신을 불태워 흔적을 없앤다. "진나라의 백성들이 실망한다(秦民失望)", 이는 잔혹한 본성에 실망한 것만이 아니라, 그가 잘 통치하려고 하지 않는데 실망한 것이다.그들의 조타수가 영주가 되려고 하지 않는데 실망한 것이다.
항우는 유방과 비교하면 훨씬 더 고귀한 몸이다. 견식도 넓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하다니. 더욱 황당한 일은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백(伯, 覇)을 수도로 결정하자고 건의하자, 항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나라의 궁실을 모두 불태워버렸으므로, "됐다. 여기에 더 머물지 말자. 나는 이제 부귀하게 되었고, 능력이 있으니, 고향인 초의 땅으로 돌아가서 자랑해야 겠다" 그러면서 명언을 한 마디 남긴다: "부귀해지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지 않느냐"
그리고, 항우의 이상에서 그는 천하통일은 없었다. 그저 18개의 소국을 만들고, 그들은 하나의 연합체가 된다. 그는 그 중에서 초국(楚國)의 왕이 된다. 즉 이 연합체의 맹주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니, 오히려 그 화를 당하게 된다.
원래 항우와 실력차이가 컸던 유방은 함양사건을 겪은 후, 도의상으로나 영향력으로나, 은연중에 이미 항우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할 수 있게 된다. 홍문연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이지 않고, 유방이 도망치게 놔둔 것은 항우의 성격가운데 우유부단한 일면이 나타난 것이기도 하고, 또한 항우가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방이 먼저 관중을 양보한 후, 쌍방은 서로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방은 암중으로 기회를 기다렸다. 항우가 영포(英布)를 시켜 의제(義帝)를 죽이자, 유방은 분명 기뻤을 것이다. 항우는 이미 자신의 합법성을 포기하고, 동시에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천하의 장수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진다. 유방은 이 기회를 잡았다. 의제의 장례를 치르면서, 천하에 항우를 치자고 호소한다. 그후 거의 4년의 시간을 거쳐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물리치고, 그를 오강에서 자결하게 만든다.
사마천은 항우의 실패를 깊이 동정했다. 심지어 찬미했다. 필자는 이렇게 이해한다. 그는 문학가로서 일대효웅의 비장한 죽음에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패왕별희와 오강자문은 젊고, 영준하고, 강건한 항우의 사망에 더욱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리고 그의 적, 구오지존에 오른 유방은 여가포환(如假包換)의 농촌무지랭이다. 심미적으로 볼 때 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항우가 패배하는 일막에서 부득이 청나라때의 희곡 <천종록<千鍾祿)>을 떠올리게 된다: "수습기대지산하일담장(收拾起大地山河一擔裝), 사대개공상(四大皆空相), 역진료묘묘정도(歷盡了渺渺程途), 막막평림(漠漠平林), 첩첩고산(疊疊高山), 곤곤장강(滾滾長江). 단견나한운참무화수직(但見那寒雲慘霧和愁織), 수부진고우처풍대원장(受不盡苦雨凄風帶怨長). 웅성장(雄城壯), 간강산무양(看江山无恙), 수식아일표일립도양양(誰識我一瓢一笠到襄陽)." 이 노래의 길게 늘어진 곡조를 들으면 사람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같다. 강산도 빼앗기고, 갈 곳이 없는 항우는 바로 1천여년후에 갈 곳이 없어진 명나라 건문제가 아니던가?
당연히 문인의 억측과 현실의 논리는 어떤 경우 전혀 별개이다. 항우의 잔혹, 포악, 강퍅자용(剛愎自用)은 그저 "목후이관(沐猴而冠)"일 뿐이다. 항우가 성공을 거둔 후, 공신을 죽이는데 어찌 유방보다 덜했겠는가? 유방은 자주 "위선(僞善)"으로 비난받는다. 그러나 항우는 그러한 "선"을 "위장"하지조차 않았다. 송의를 죽이고, 의제를 죽이고 이십만 진군을 갱살하면서 핑계조차 대지 않았고, 전혀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된 후에 어찌 돌연 "유정사수(柔情似水)"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증명한다. 이 젊을 때 제대로 일하지 않던 유계(유방)은 좋은 농민이 될 수는 없었지만, 좋은 지도자는 될 수 있었다.
3
어떤 때는 항우와 유방의 성공과 실패를 생각해보면 한 마디로 다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유방이 왜 이겼는가? 매번 중요한 순간에 그의 성격에 있는 "인후, 대도"가 역할을 했고, 또한 간언을 잘 들으며 신과 같은 반응속도를 보인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적시에 그를 구해주었다. 진평은 형수를 꼬시고 뒷돈을 받아서 유방이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무지의 해석을 듣고는 그를 중용한다. 한신은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소하의 추천을 받아 그를 대장에 임명한다. 나중에 한신이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를 진짜 제왕에 앉힌다. 역생이 처음에 유방을 만났을 때는 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고 있었는데, 역생이 한번 권하자, 유방은 즉시 의관을 정제하고 그를 상석에 앉힌다...그래서 항우와 축록중원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방을 도와주려 한 것이다. 유방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운주유악지중, 결성어천리지외"는 내가 자방(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며, 군량을 조달하는데는 내가 소하만 못하고, 백만의 군대라도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는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명은 인걸이다. 내가 그들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장수를 잘 거느리는 장수(善將將)"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전혀 과장되지 않다.
사마천은 항우를 편애했고, 유방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항우를 아주 선량하게 기록한다: "항우는 사람을 대할 때 공경자애했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었다." 그러나 유방은 깡패기질을 버리지 못한 무지한 사람으로 그린다. "패공은 유학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손님을 청할 때 유생관을 쓴 자가 들어오면 패공은 그 관을 벗겨서 안에 오줌을 누었다.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자주 욕을 했다.' 그리고 유방은 신뢰를 저버리고 의리를 지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유방이 도망칠 때 마차가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하여, 아들딸을 세번이나 걷어차고, 매번 하후영이 다시 주워올렸다. 항우가 유방의 부친을 삶으려 할 때, 유방은 그냥 실실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 유방이 형양에서 도망칠 때는 이천명의 여자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동문으로 나가게 하여, 초나라병사의 화살받이가 되게 한다. 게다가 기신을 보내어 자신으로 변장시켜 초나라병사에게 죽게까지 한다.
그러나, 항우의 인자는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심지어 사마천 조차도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말의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이 공을 세워서 작위를 봉해야 할 때 도장을 다 파고도, 주기를 아까워했다. 이것은 바로 부인지인(婦人之仁)이다." 도량이 이 정도로 좁았던 것이다.
유방의 본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 다만 최소한 그는 만일 제왕의 길을 걸으려면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며, 동료들과 과실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방은 초한쟁패의 후기에, 자신이 소농신분, 유협의 마인드를 일찌감치 탈피하고, 장기적인 안목과 관후한 흉금을 가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본다. 유방이 등극한 후, 여전히 몇 가지 사건에서 그의 뼛속깊은 곳에 있는 유협지의(遊俠之義)에 대한 존중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임협(任俠) 계포(季布)는 항우의 부장으로 있을 때, 여러번 유방을 괴롭힌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도 그를 잡는데 거금을 내건다. 나중에 그가 신용을 지켰다는 이유러 그를 사면한다. 난포(欒布)는 팽월의 수급을 거두며 곡을 한다. 원래는 사형에 처해져야 하지만, 유방은 존중하고 그를 사면하여 도위에 앉힌다. 전숙은 모반으로 의심받는 조왕 장오를 따라 경성으로 와서 재판을 받는다. 이에 유방은 감동하여 그에게 관직을 내린다.
거꾸로, 당초 항우의 부하인 정공(丁公)은 유방을 보내준 적이 있다. 항우가 멸망하자 다시 유방에게 작위를 구한다. 유방은 냉소하며 정공을 참한다. "정공은 항왕의 신하로 불충했고, 그래서 항왕이 천하를 잃게 한 자이다." 유방이 정공을 죽인 이유는 '불충'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홍문연때 항백이 그를 구해줄 때도 역시 항우의 진영에 있었지 않는가. 그런데 항우가 죽은 후에 유방은 항백을 제후에 봉하지 않았는가. 바로 유협이 도덕에서, 요구하는 것은 "불긍기능(不矜其能), 수벌기공(羞伐其功)"(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말고,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지 말라)이다. 정공이 앞장서서 봉작을 요구한 것은 유협이 아니다. 그저 양아치이다. 항백은 장량과 함께 도망치려 했으나 장량에게 감동을 받아 다시 유방을 구한 것이니, 유협의 기풍이 있다.
여기에 확실히 약간은 미묘한 평형이 있다.
만일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평형이 아니다. 유방이 어릴 때 가진 유협의 이상에 대한 회광반조이다. 그가 처분권을 장악하자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다. 원래 죽일 수 있는 원수는 죽이지 않고, 원래 상을 주어야 할 은인은 죽인다. 대국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유방은 황제의 은원을 마음대로 갚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만일 여전히 모르겠으면, 다시 옹치(雍齒)의 예를 보도록 하자. 진2세 십월에 유방은 마침내 진지 풍(豊)을 점령한다. 옹치로 하여금 풍을 지키게 명한다. 그 자신은 병력을 이끌고 설(薛)로 간다. 위나라사람 주시(周市)가 사람을 보내어 옹치에게 말한다. 위나가 현재 수십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니 너는 우리에게 투항해라. 그러면 너는 제후가 될 수 있다. 풍을 지키고, 투항하지 않으면, 나는 풍을 도살할 것이다. 옹치는 원래 유방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주시가 그렇게 말하자, 옹치는 바로 동의한다. 위나라사람을 위하여 풍을 지킨다. 패공이 돌아와서 풍을 공격한다. 그러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옹치의 반란에 유방은 화가나서 이를 악문다.
등극한 후, 여러 장수들이 앞다투어 공을 내세운다. 장량은 유방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겁내는 것은 공이 있는데 그대로부터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잘못을 그대가 기억하고 나중에 갚으려 하는 것이다. 만일을 위하여,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평생 가장 원한을 크게 가지고 있고, 네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 작위를 내리면, 모두 안심하게 될 것이다. 유방은 바로 옹치를 떠돌린다. 바로 논공행상을 해서 작위에 봉하여 옹치를 십방후로 삼는다. 과연 여러 신하들이 크게 기뻐하며, 유방이 옛날의 원한때문에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 이야기가 설명하는 것은 아주 많다. 만일 정공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방의 일처리는 고정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을. 어떤 때는 유방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예를 들면 정공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어떤 때는 유방이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예를 들면 옹치를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원칙이 없다. 유협기준은 그저 유방의 여러가지 기준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생각하는 군주의 최대특권이다; '임의해석권'. 만일 배반으로 말하자면, 옹치의 상황은 정공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러나 군주는 바로 신하들이 자신이 도대체 제후에 봉해질 것인지 아니면 참수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유방이 어떤 때는 독랄하고, 어떤 때는 인자하다. 아무 짓을 하더라도 이유를 댈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천위불가측(天威不可測)"이다.
나이가 든 유방은 인정세고(人情世故)의 처분에서 혈기방장했던 항우보다 훨씬 모략이 있었다. 비록 그 본인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