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은우시 2014. 1. 29. 23:01

글: 우좌(于左) 

 

 야사에 이런 말이 있다. 원순제는 기실 송나라 종실의 후손이라고.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한 후, 송소제(宋少帝) 조현(趙顯)은 원나라사람의 수중에 들어가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4살이었다. 그는 영국공(瀛國公)에  봉해진다. 어른이 된 후, 조현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고, 화를 피하기 위하여 온 집안이 대막에 숨어 몽골인의 방식으로 생활하였다. 당시 원명종은 아직 번왕이었고, 역시 대막에 살고 있었으며, 조현과 알게 된다. 그의 어린 아들을 아주 좋아해서, 자신의 아들로 삼고 이름을 테무르로 고친다. 그가 바로 나중에 원순제가 되는 토환테무르이다.

 

야사와 통속소설이 관심을 가지는 또 한 가지 점은 원순제의 후궁생활이다.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야상서는 이렇게 말한다. 원순제의 후궁중 미녀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부인(夫人)과 귀비(貴妃)의 인신(印信)을 차고 있는 여자들만 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여인은 숙비(淑妃) 용서교(龍瑞嬌), 정일녕(程一寧), 과소아(戈小娥), 여빈(麗嬪) 장아현(張阿玄)이 있으며, 재인 영영(英英), 응향아(凝香兒)등이 있다. 모두 7명이다. 이 7명의 권위(權位)는 황후의 아래로 궁중에서는 그녀들을 "칠귀(七貴)"라고 불렀다.

 

7명의 자색과 재주는 각각 달랐다. 정일녕은 피리를 아주 잘 불었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원래 궁중에서 이름없는 여인이었는데, 어느 날 밤, 원순제는 돌연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피리소리를 듣는다. 그후에 여인의 가볍고 느린 노래소리가 들린다. 원순제는 그 노래에 완전히 빠진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피리불고 노래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물어본다.

 

모두가 정재인(程才人)이라고 대답한다. 원순제는 이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아무런 인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을 거기서 그친다. 다음 번에 그 곳에 갔을 때 다시 은은한 노래소리가 들린다. 원순제는 노래 속에 비정(悲情)이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여인의 노래는 처량하다. 궁중에 이렇게 수심에 젖은 여인이 있구나."

 

호기심은 가장 좋은 가이드이다. 원순제는 노래소리를 향하여 가마를 향하게 한다. 취란루(翠鸞樓)에 도착하니 한 여자가 가볍게 걸어나왔다. 그리고 원순제에게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다. 그녀가 바로 정일녕이다. 원순제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서 주연을 베풀고 그녀의 피리소리가 아주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옥적(玉笛)을 원취후(圓聚侯)에 봉하고, 정일녕이 거주하는 누각의 이름을 봉어루(封御樓)로 개명한다. 이때부터 총애하는 후궁의 명단에 한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후인들이 사(詞)를 써서 정일녕의 운명을 노래했다: "천자방탐천마무(天子方耽天魔舞), 궁인자농월하적(宮人自弄月下笛), 월하적(月下笛), 화지읍(花枝泣). 양거미지하소적(羊車未知何所適), 은하도사동호적(銀河倒瀉銅壺笛), 일성취철취란루(一聲吹徹翠鸞樓), 만리관산문열석(萬里關山聞裂石), 안옥룡(按玉龍), 심여도(心如搗). 군왕약불석아미(君王若不惜蛾眉), 천첩하사장문로(賤妾何辭長門老). 운유양(韻悠揚), 성묘묘(聲杳渺). 천풍취락(倩風吹落), 여음원향군전요(餘音願向君前繞)"

 

과소아의 특징은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다. 물을 적시면 피부의 표면에는 가볍게 붉은 색이 떠오른다. 마치 복숭아꽃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과 같이 극히 아름다웠다. 원순제는 그녀를 요도지녀(夭桃之女)라고 칭찬했고, "건도부인(蹇桃夫人)"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과소아는 목욕을 좋아했다.

 

매년 봄의 상사일(上巳日)에, 궁중에서는 양벽지(漾碧池)에서 불계(祓禊,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불교식 종교의식)를 했다. 연못은 좋은 돌로 쌓아서 만들었고, 물 속에는 옥산예(玉狻猊), 백정록(白晶鹿), 홍석마(紅石馬)등을 놓아두었다. 목욕하는 과정에서, 후궁들은 이들 돌조각을 타고 그 위에서 쉬면서 놀 수 있었다. 양벽지에는 3개의 정자도 만들었다. 각각 집란정(集鸞亭), 응하정(凝霞亭)과 승소정(承霄亭)이었다. 정자의 중간에는 나무다리(木橋)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후궁들은 목욕을 마친 후, 이 몇 개의 정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파티를 했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놀았다. 그래서 상심연(爽心宴)이라고 불렀다.

 

원순제는 향락을 추구했고, 자주 곁에 있는 사람에게 그가 느낀 인생의 깨달음을 얘기해주었다: "백년광음은 섬전과도 같다. 금방 지나가고 사라진다. 그중 늙고 병든 날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더욱 적다.  사람이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모든 시간을 다 노는데 쓰더라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항상 부귀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마음 껏 즐겨야 한다. 그래야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원순제는 자주 궁중에서 가무모임을 갖는다. 황혼때부터 여명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유광(遺光)"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