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연(汪大淵): 원나라의 항해가
작자: 미상
원나라때의 저명한 항해가 왕대연은 자(字)가 환장(煥章)이며, 강서 남창 사람이다. 서방의 학자들은 그를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고 부른다.
왕대연은 원무종 지대4년(1311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부모의 사랑을 깊이 받았으며, 부모든 그가 큰 인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논어>에서 "환장"이라는 문구를 따서 자로 삼게 했다. 왕대연은 과연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항해가가 된다.
그는 먼저 천주(泉州) 즉, 당시 중국남방 최대의 상업항구이며 세계최대의 상업항구의 하나인 그곳으로 간다. 각종 피부색과 각종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항구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크고 작은 선박이 있었다. 특히 그들 중국,외국의 상인, 선원들이 말해주는 외국의 풍정은 아주 생동적이고 재미있었다. 이것은 모두 왕대연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중에 그가 두번이나 멀리 항해하는 장거를 이루게 한다.
원문종 도순원년(1330년), 나이 20살의 왕대연은 천주의 원양상선을 탄다. 천주항에서 출발하여, 원통2년(1334년) 여름,가을경에 천주로 돌아온다. 이번 항해는 천주에서 해남도, 점성(베트남), 마육갑(말래카), 자바, 수마트라, 버마, 인도, 페르시아, 아랍, 이집트, 그리고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갔다가 이집트로 되돌아온다. 홍해를 거쳐 소말리아로 가고 남쪽으로 방향을 꺽어 모잠비크로 간다. 다시 인도양을 건너 스리랑카, 수마트라, 자바를 거쳐 호주로 간다. 호주에서 칼리만탄섬으로 갔다가 필리핀군도를 거쳐, 천주로 되돌아온다. 원혜종 지원3년(1337년)에 왕대연은 제2차로 천주를 출항하여 남양군도에서 놀고, 인도양 서쪽의 아랍해, 페르시아만, 홍해, 지중해, 모잠피크해협 및 호주각지를 거쳐 2년후 천주로 되돌아온다.
왕대연이 원양을 항해하고 귀국한 후 <도이지(島夷誌)>를 쓴다. 두 번의 항해에서 관찰한 각국의 사회경제, 기이한 풍속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리하여 자료를 보존한다. 당시 천주는 군지(郡誌)를 편찬하고 있었다. 천주의 지방장관(당시에는 다루가치라고 불렀다)와 군지를 편찬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보고 감탄하며, <도이지>를 <천주로청원지>에 수록하여 부록으로 삼는다. 나중에 왕대연은 오래 전에 떠난 남창으로 간다. <도이지>의 내용을 줄여서 <도이지략(島夷誌略)>으로 만들어 남창에서 인쇄 발행한다. 이 책이 널리 전해지게 된다. 그러나, <도이지>는 원말의 병란와중에 대부분 산실되고 명나라후기에는 마침내 실전된다.
왕대연이 <도이지>를 저술한 태도는 아주 엄숙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썼다: "모두 내가 친히 가본 곳이다. 귀와 눈으로 친히 본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책의 서문을 써준 천주 지방관이자 저명한 문인 장저(張翥)는 이렇게 말한다: "왕군 완장이 관년(20세)일 때, 일찌기 두번 배를 타고 동서양을 갔고, 지나간 곳의 산천, 풍토, 물산의 궤이, 거실, 음식, 의복의 기호, 무역관련사항을 기록했고, 친히 보지 않은 것은 쓰지 않았다." 또 다른 서문의 작자인 천주방지 주편찬자 오감(吳鑒)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눈이 미치는 곳은 모두 책에 기록했다. 그가 전한 것은 모두 믿을만하다. 그래서 <청원속지>(즉, <천주로청원지>)에 부록으로 붙였다." 나중에 명나라 영락연간에 정화하서양을 한 마환(馬歡)이 말한다: "그(정화)가 간 곳을 따라가니...여러 나라를 섭렵하고.....눈으로 보고 몸으로 발을 디뎌보고는 나중에 <도이지>의 저자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보면 그 책의 내용이 진실하고 신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축약하여 쓴 <도이지략>은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등 각주의 국가와 지구 약 220여개에 관련되어 있고, 상세하게 그곳의 풍토인정, 물산, 무역을 기록했다. 이는 더 얻기 힘든 고귀한 역사자료이다. 책에는 대만, 팽호가 중국의 신성한 영토라고 적었다. 당시 대만은 팽호에 속했고, 팽호는 천주 진강현에 속했다. 염과, 세수는 진강현에 귀속되었다. 책에서는 여러 곳에 화교의 해외상황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천주 오댁(吳宅) 상인이 고리지민(古里地悶)(지금의 티모르섬)에 있고, 원나라때 자바에 출정한 부대의 일부 병력이 구란산(句欄山)(태국 코람섬)에 남아 있고, 사리팔단(沙里八丹)(지금의 인도 동안의 나가파탐)에는 중국인이 1267년에 지은 중국식 전탑이 있고 거기에는 한자로 "함순삼년팔월화공(咸淳三年八月華工)"; 진랍국(지금의 캄보디아)에도 중국인이 있었고,. 지금의 칼리만탄섬의 폰티아낙(쿤티엔)은 특히 중국인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용아문(龍牙門)(지금의 싱가포르)에는 남녀 겸 중국인이 거주했다; 심지어 마로간(馬魯澗)(지금의 이란 북부의 마라거)의 추장은 중국 임장 사람으로 성이 진씨라고 기록한 등이다.
<도이지략>에는 호주에서 들은 두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1. 마나리, 2. 라파사. 당시 중국은 호주를 라파사(羅婆斯)라고 불렀다. 다윈항 일대를 마나라(marani)라고 불렀고, 천주상인, 선원은 호주를 세계의 끝에 있는 섬이라고 생각했고, "절도(絶島)"라고 불렀다. 왕대연은 당시 호주인의 상황을 기록했다: 어떤 사람은 "남자와 여자들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옷을 입지 않으며, 새깃털로 몸을 가린다. 음식을 할 때 불을 태우지 않고 털과 피까지 같이 먹는다. 나무위에 집을 짓거나 동굴에서 거처했다." 어떤 사람은 "오색의 짧은 단삼을 입고, 베로 한폭짜리 치마를 만들어 묶었다." 고 햇다. 그리고 "일종의 회색털, 붉은입, 붉은다리에 춤을 출 줄 알고, 키가 6척인 호주학"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이 손뼉을 치면, 날기를 세우고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으니, 반드시 기이한 물건이다." 그는 이것을 '선학(仙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호주에는 일종의 붉기가 불과 같은 나무가 있는데, "석남수(石楠樹)"라고 부른다고 했다.
왕대연은 호주북부의 어떤 땅은 '주위가 모두 물'이라고 적었다. 지금 호주의 다윈항의 동쪽일대는 늪지대이다. <도이사략>은 역사지리의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일찌기 세계에서 중시하게 된다. 1867년이래 서방학자중 10명이 이 책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다. <도이지략>의 호주에 관한 두 절의 기록은 호주에 관한 최초의 문자기록이다. 그러나 서방학자들은 왕대연이 호주에 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대연이 호주에 간 후 이백년이 지나서야 유럽인들은 비로소 새로운 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이지략>은 송나라때 주거비의 <영외대답>, 조여적의 <제번지>를 잇고, 아래로는 명나라 마환의 <영애승람>, 비신의 <성차승람>등 중요한 역사지리저작을 잇는다. 그 중요성은 이들 송, 명의 저작을 훨씬 초과한다. <사고전서총목>에는 이렇게 말한다. "제사(이십사사를 가리킴)의 외국열전을 쓰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그 곳에 가보지 않았다. 조여적의 <제번지>같은 류는 대부분 시박(항구)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이다. 왕대연의 이책은 모두 친히 겪은 것을 손으로 기록한 것이다. 공담무증(空談無證)인 얘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왕대연이 두 번이나 서양으로 가고, 간 길이 멀고, 저술이 정심한 점은 청나라중엽이전까지 앞선 것이었다."
왕대연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나간 곳은 모두 부나 시를 써서 산천, 토속, 풍경, 물산을 읊었다." <도이지략>에는 대불산(大佛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들은 대불산(지금의 스리랑카)의 부근으로 가서 진귀하고 기이한 산호를 수집한다. 왕씨는 아주 흥분하여, '다음 날 고체시 백운을 지어 이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예장소암 우선생이 보고는 시를 지었으며, 지금까지 군자당에 남겨 전해진다." 소암 우선생은 당시 저명한 문인 우집(虞集)이다. 그의 서재이름은 소암이다. 그래서 소암선생이라고 부른다. 시인 우집은 왕대연의 시를 읽고 마음이 움직여 시를 쓴 것이다. 이를 보면 왕대연의 시사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왕대연은 <도이지략>외에 다른 저작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왕대연의 만년생활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세계약서지리에 대한 위대한 공헌은 일찌감치 중국과 외국의 학자들에게 공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