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는 왜 오강에서 자결했는가?

중은우시 2012. 6. 28. 18:39

글: 중국경영망

 

고대중국은 왕조교체, 강산역치(江山易幟)로 전란이 끊이지 않고, 굶어죽은 시체가 벌판에 가득했다. 조조가 쓴대로 "백골이 들판에 널려있고, 천리에 걸쳐 닭우는 소리도 돌리지 않는구나(白骨露於野, 千里無鷄鳴)"라는 말이 문학적 허구만은 아니다. 왕조교체도 그러했고, 황실내부다툼(同室操戈)도 그러했다. 명나라의 숙질간의 정난지역도 '청린백골(靑磷白骨), 출경심목(怵驚心目)"의 역사적 비극을 불러왔다.

 

얼마전에 필자는 사시집을 훑어보았다. '초한풍운'이라는 대목에서, 항우에 대하여 애석해하고, 심지어 우희, 오추마까지도 읊은 대상이 된 것을 보았다. 민중에 관련된 문자는 거의 없었고, 그저 한유와 장가구의 시 하나와 곡 하나가 언급되어 있었다. "천하고진구의(天下苦秦久矣)."  항우와 유방은 진승, 오광의 뒤를 이어 반기를 들고 진나라의 폭정을 무너뜨렸다. 원래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활하게 하여야 했다. 그러나, 여러 호족들이 권력을 다투느라고 '상심진한, 생민도탄(傷心秦漢, 生民塗炭)"의 지경에 처한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대치하고 승부가 결정되지 않자, 젊은이들은 군대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늙은이들은 전선을 지원하느라 지쳐쓰러졌다. 이때 항우는 유방에게 말한다: "천하가 매년 전쟁으로 힘들어하는데,그것은 우리 두 사람때문이다. 우리가 자웅을 겨루어 승부를 내서 천하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항우의 이러한 건의를 유방은 거부한다. "나는 지혜를 다툴지언정 힘을 다투지는 않겠다(吾寧鬪智, 不能鬪力)". 이것이 바로 유명한 '광무간대화(廣武澗對話)'이다. 항우가 난세효웅인지 반군두령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말 높이 살만한 점이다. 그의 이런 의식은 우연히 드러난 것이 아니다. 오강의 전투에서 항우는 원래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곤경을 벗어나서, 나중에 권토중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결을 선택한다. 항우는 혼자서 목숨을 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천하창생을 생각하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오강정장의 건의대로 강동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그에게서 비장함을 느낄 수 있는 점이다.

 

항우는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민의 생계를 왕권쟁탈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을 가졌지만, 이를 실천할 기회가 없었다. 기실, 고대성현들에게서 이런 사상의 연원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장자.양왕>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빈의 땅에 사는 태공 단보(亶父)는 적인(狄人)의 공격을 받는다. 재물을 바치겠다고 하여도 적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빈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단보는 말한다: "그 형과 살기 위하여 동생을 죽이고, 그 부친과 살기 위하여 아들을 죽이는 짓을 나는 할 수가 없다. 그대들은 모두 이 곳에서 잘 살아라. 나의 신하가 되는 것과 적인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땅때문에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말을 몰아 떠나간다. 그러자, 민중들도 그를 따라간다. 기산의 아래로 가서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나의 신하가 되는 것과 적인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 점은 잘 이해해야 한다. 고대의 중국에는 민족국가의 개념이 없었다. 봉건제왕은 역사무대의 주마등과도 같았다. 원나라때 사람 장양호가 말한 것처럼, "당나라가 일어나자 수나라가 망했다. 세상살이는 이처럼 풍운이 만변하는 것이다". 경성의 황제의 성씨는 유씨, 이씨, 조씨, 주씨일 수 잇다. 황성이 나부끼는 깃발의 표지도 강족, 적족, 오랑캐일 수 있다. 그래도 백성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단보의 소위 '나의 신하가 되는 것과 적인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 곳에서 적인들과 잘 살아라'라고 하는 것이다. 봉건황권시대에 '나의 신하가 되느냐' '적인의 신하가 되느냐'에 대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 '흥망'과는 무관하게 백성들은 고통을 받는 역사적 숙명을 벗어나려면,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고, 스스로 사회의 지배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정치의 큰 도리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땅때문에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가치는 더욱 선진적이다. 토지는 인민들이 생존하는 기초이다. 그러므로 토지때문에 백성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황제의 자리나 정권은 그저 '왕권'의 구성부분이다. 백성들의 고혈(세금과 부역)로 부양하는 상부구조이다. '왕권'의 연속을 위하여 민중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된다. 당시에는 아직 '인권'이라는 현대적 개념은 나타나지 않았다. 장자는 그저 단보를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能尊生者)"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단보가 '생명을 존중'할 줄 알았던 것과 항우의 '천하의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은 착안점이 모두 민중이 생명과 생계에 중점을 둔 것이다.봉건제왕의 관념 속에는 "하늘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 백성은 통치자가 먹여살리는 것이다"라는 관념은 확실히 거꾸로 된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보가 보기에 '왕권'이 '인권'을 위협할 때는 '왕권'이 '인권'에 양보해야 한다. '왕권'을 위하여 '인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이것은 단보의 잠재의식속에는 '인권'이 '왕권'보다 높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날, 여러 국가의 왕권은 일찌감치 대체되었다. '인권'이 '왕권'보다 높다는 것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말하기는 쉽지만, 관철하기는 어렵다. 2011년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설명해준다. 일부 통치자들은 자신의 수십년간 유지해왔던 정권을 계속유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민중을 핏물 속에 몰아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일부 봉건과두는 가족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하여 민중을 인질로 잡았다. 그들의 눈에 '인권'은 여전히 '왕권'의 도마위에 올라있는 고기이다. 오늘날이 어떤 시대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국공(국민당-공산당) 충칭담판때, 민주정치와 평화건국을 추구하는 것이 당시 민중의 강렬한 바램이었다. 황제생 선생은 사를 지어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는 배와 같고, 민권은 물과 같다. 물이 차서 넘치면 배가 뜨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민주정치를 실행한다면 자연히 민중의 옹호와 지지를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