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의 죽음: 오강자문(烏江自刎)과 전사동성(戰死東城)

중은우시 2012. 2. 1. 11:27

글: 허정산(許正山)

 

이천년동안 전설로 내려온 이야기가 있다: 패왕은 오강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러해동안 연구한 결과, 항우는 기실 동성(東城, 지금의 정원)에서 전사하였지, 오강(烏江, 지금의 화현)에서 자결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2천년동안, 사람들은 동성에서 전사한 항우를 오강에서 자결한 것으로 잘못 전했을까? 필자가 고증한 결론은 사마천이 <사기.항우본기>에 아주 생동감있고 감동적인 민간전설을 끼워넣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록 <사기.항우본기>의 마지막 부분의 논찬(論贊, 결론)에 작가는 이미 명확하게 항왕은 "5년 그 나라가 망하고, 동성에서 죽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읽으면 더 이상 말미의 결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말한대로 말을 전하고' '따라서 베끼는' 습성은 종래 잘못된 내용이 전해지는 원인이다. 그리하여 항왕이 '오강을 건너려 하였다'는 것이 '오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변질된 것이다.

 

1. '오강자문'은 민간전설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항왕이 오강에서 목을 베어 자결했다"는 것은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이유는 다음의 다섯가지이다.

 

첫째, 항왕이 남으로 도망친 노선을 보면, 음릉(陰陵)에 도착한 후 한군의 포위추격을 받는다. "동성(東城)에 이르러, 28기가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병사 오천기가 몇 겹으로 포위했다. 당시 항왕은 이미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연 이백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강까지 갈 수 있었을까? 동성에서 오강까지 가려면 반드시 동성, 건양, 전초, 준유, 역양(지금의 정원, 제현, 전초, 비동, 화현)을 지나는 이백리 황보산맥을 가로질러야 한다. 지하, 비하, 양하, 제하가 그 가운데로 흘러서 가로막고 있다. 실로 산이 겹겹이 놓여 있고, 강이 겹겹이 놓여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패배하여 이미 세력이 급전직하한 상태인데, 중간에 음릉으로 가는 길을 택하여, 길을 잃는 바람에 한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멀리 삼백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오강정장이 아무리 항우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을 알아내서 사전에 배를 준비해둘 수 있었을까?

 

둘째, <사기.항우본기>의 전체 편의 구조를 살펴보면, 내용이 아주 엄밀하고 정치하다. 특히 전투의 묘사는 사마천이 친히 명산대천을 다녔기 때문에 쌍방이 강을 건너고 물을 건너고 관문을 공격하고 빼앗을 때의 지리형세를 모두 조리있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하여 강산이 손바닥안에 들어오는 느낌을 준다. 항왕이 해하에서 패번한 후의 행적을 보자:

 

"해하에서 병력은 작고 먹을 것은 떨어졌다"(밤노래에 강개한다)

"포위를 뚫고 남으로 달린다. 따르는 자가 팔백여명이다"(밤)

"회하를 건넌다. 따르는 자는 백여명이다"

"음릉에 이르렀다. 길을 잃었다"(아침안개)

"늪에 빠져 한군의 추격을 받았다"

"동성에 이르렀고, 28기가 남았다"

 

시간과 장소의 이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성에 도착한 이후는 어떠한가? 왜 삼백리에 이르는 전장터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을까? 구성이 갑자기 느슨해졌을까? 즉, 동성에서 항왕이 오강을 건너려고 생각할 때, 오강에선느 '정장이 이미 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묘하게도 "오늘은 신의 배뿐이어서, 한군이 강을 건너 추격해올 수도 없습니다"라고 한다. 다만, 세심한 독자라면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금방 동성에서 죽기살기로 싸우던 항왕이 순식간에 오강의 가에 서서 탄식하고 있다. 설마 그 중간의 지하, 제하, 그리고 그 산들과 늪을 항왕은 한 달음에 넘었단 말인가? 사실 사마천은 교묘하게 "욕(欲, 하려고 했다)"자를 집어넣어 동성에서 벌어진 혈전과 오강의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을 하나로 얽은 것이다. 이 일대의 지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러가지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강회일대의 학자, 전문가들은 여러해동안 여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온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 억측과 오해도 여기서 발생했다.

 

셋째, 작자는 항왕이 배가 있는데도 타고 건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강동부로를 볼 면목이 없다"고 한다. '항우는 강동자제 8천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왔는데, 지금 혼자서 돌아가면' 마음 속으로 부끄러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들어 강을 건너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기 어렵다. 먼저, 팔천자제가 한 명도 돌아가지 못해도 그것이 모두 항왕을 위하여 전사한 것은 아니다. 한왕 유방에게 귀순한 자들도 적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동성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일 때, 곁에는 여전히 28기가 있었다. 이들은 해하에서 남으로 도망칠 때 마음 속에 품은 목표는 오로지 하나 즉 오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해서도 항우를 떠나지 않았다. 그중에는 분명히 강동자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기.관영> <한서.관영>에는 이런 진실이 쓰여 있다. 관영은 "동성, 역양으로 가서 초나라장병 만이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강가까지 갔거나, 아니면 도강을 준비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한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다. 이런 과장은 바로 민간전설의 치명적 약점이다.

 

넷째, 정원에도 민간전설이 있는데, 남녀노소 모두 알고 있다. 패왕이 우희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차우돈(嗟虞墩)까지 갔다는 것이다. <정원현지. 문화예술. 고사전설>에는 "우미인초(虞美人草)와 미인사(美人詞)"라는 제목으로, 상세하게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항우가 위난중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수급을 계속 달고 왔다고 생각한다. '죽지 않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마음과 맹서가 바로 <시경>에서 읊은 것처럼, "곡즉동실, 사즉동혈(轂則同室, 死則同穴)"(움직일 때는 같은 가마를 타고, 죽어서는 같은 구멍에 묻힌다). 만부득이한 사태가 아니면, 영웅이 쓰러지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우희의 수급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정원현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희의 묘는 차우돈이다. 현의 남쪽 육십리 동성 근처에 있다" "동성근처(近東城)"은 바로 사마천이 말한 항왕이 '동성에서 죽었다(身死東城)"는 결론에 들어맞는다.

 

다섯째, 중국인민은 역대이래로 약자를 동정해왔다. 정의를 세우는 선량하고 의협의 마음을 중시했다. 그래서 실패한 영웅들에 대하여 전설을 통하여 그들의 기개와 절개를 드러내어 자신의 바램을 완성시킨다. 예를 들어, 사가법이 양주에서 패배하여 청나라군사에 살해당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사방에서 전설이 생겨난다. 어떤 사람은 친히 사가법이 청색장의를 입고, 머리에 흑사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백마를 한 필 타고서 천녕문을 나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고, 성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때 안진경이 반군에게 해를 당했고, 송나라때의 문천상은 원나라사람에게 죽었는데, 그들이 죽은 후에 민간에는 전설이 속속 나타난다. 시인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은 후, 전설이 많이 나타난다. 그의 고향사람들은 '굴대부가 죽은 후 큰 물고기가 돌아왔다"고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은 모두 가지고 있다. 항우는 오중에서 굴기하여, '강동자제 8천명을 이끌고 강을 건넌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전투를 벌였고, 진나라를 상대하는 전쟁에서 오중의 자제 및 강동부로는 항우에 많은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항왕은 오강을 건너려고 했고, 오강정장은 배를 준비하여 기다렸다" 그러나 항왕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강동부로를 볼 면목이 없다며 강을 건너려 하지 않았다."는 등등의 영웅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이해가 되는 일이다. 사마천은 "스무살에 남쪽 강회로 여행을 떠난다. 회계를 오르고, 우혈을 찾고, 구의를 보며, 원, 상에서 논다...... 양, 초를 지나 돌아왔다" 그는 자연히 이들 민간전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태사공이 쓴 <사기>는 '천하에 잊혀진 이야기들을 망라한다'는 것을 중시했다. <사기>를 통독해보면, <오제본기> <하본기>부터 <은본기> <주본기>까지 사마천이 기록을 남길 때 문자기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입으로 전해진 역사" 혹은 '조각조각난 말들'뿐이었다. 그중 신기하고 괴이한 일들이 수도없이 많다. <사기. 고조본기>에만도 6,7군데가 그러하다.

 

"고조...부친은 태공이라 한다. 모친은 유온이라 한다. 유온은 자주 대택의 언덕에서 쉬었는데, 꿈에 신과 만난다. 그때 천둥번개가 쳤다. 태공이 가서 보니, 교룡이 그 위에 있었고, 임신을 해서, 태조를 낳았다."

 

<사기.고조본기>를 보면, '할머니가 밤에 울고, 뱀을 베다." "노인이 밭에서 점을 치다" "위에 천자의 구름기운이 있었다"는 등등은 모두 민간의 전설일 뿐이다. 거기에 장량이 노인의 신발을 주워주고 신선으로부터 책을 얻은 일이나, 한신이 가랑이 사이로 기었다는 이야기이나 걸식할 때 빨래하던 아주머니에게 보답한 이야기 등등은 모두 민간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이다. 사마천은 바로 이런 '잊혀진 이야기'를 가공하여 생생한 인물로 그려낸 것이다.

 

2. <사기>의 기록: 항우는 동성에서 전사한다.

 

당연히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는 사실에 충실했다. 임서평이 말한대로 "본문에 황당한 일을 가득 적더라도, 끝날 때가 되면 반드시 회오(悔悟)하는 말이 있다. 다시 되돌아가서 황당한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항우본기>의 결론이 특별히 언급한다: "항우는 오년에 그 나라가 망하고, 동성에서 죽었다" '동성'은 지금의 안휘성 정원의 남쪽 오십리이다. 항우가 우희의 머리를 묻은 곳이다. 많은 사람들은 앞부분이 아주 재미있다는 것만 보고, 뒤에 재미없는 결론은 주의하지 않았다.

 

항우가 동성에서 전사한 사실은 <사기> <한서>에도 모두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사기. 고조본기>를 보면, "한나라 오년, 고조는 제후의 병사들과 함께 초군을 공격한다. 항우와 해하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한다.....항우는 한군이 초나라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한나라가 초나라땅을 모조리 다 얻었다고 생각한다. 항왕은 패배하여 도주하였고, 병력이 대패한다. 기장 관영으로 하여금 항우를 동성에서 추살하게 한다. 팔만을 참수했고, 마침내 초나라땅을 평정한 것이다.

 

<사기.관영>의 기재는 더욱 상세하다: "항적(항우)는 해하에서 패하여 갔다. 관영은 어사대부로 명을 받아 항적을 동성까지 추적하여, 격파했다. 장졸 5명이 함께 항적을 참하여, 모두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 좌우 사마 각 1인, 병졸 만이천명의 항복을 받는다. 초나라군대의 장병을 모조리 얻었다."

 

<한서.고제기>를 보면, "십이월, 항우를 해하에서 포위한다. 항우는 밤에 한나라군대가 사방에서 초나라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초나라땅을 다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항우는 수백의 기병과 달아났고, 병사들은 대패한다. 관영이 항우를 동성에서 추격하여 참한다."

 

<한서.관영>에는 " 항적은 해하에서 패하여 갔다. 관영은 어사대부로 명을 받아 항적을 동성까지 추적하여, 격파했다. 장졸 5명이 함께 항적을 참하여, 모두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 좌우 사마 각 1인, 병졸 만이천명의 항복을 받는다. 초나라군대의 장병을 모조리 얻었다."

 

항우는 5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싸워서 죽였다는 것은 <사기> <한서>에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관영이 이끄는 장졸 5명이 함께 항적을 참하여 모두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바로 관영이 이끌던 수천의 기병중에서 다섯명의 용사가 함께 달려들어, 항우를 죽였다는 말이다.

 

양희(楊喜), 왕예(王翳), 여마동(呂馬童), 여등(呂騰), 양무(楊武)의 다섯명이 모두 항적을 죽인 공로로 제후의 작위를 받은 사실은 <한서.고혜,고후문공신표제4>에서도 확인된다.

 

"적천엄후 양희: ..나중에 관영을 쫓아 함께 항적을 참하다(共斬項籍), 후, 천구백호."

"중수엄후 여마동: ....다시 함게 항적을 참하다. 후, 천오백호"

"두연엄후 왕예: ...함께 항우를 참하다. 후, 천칠백호"

"열양엄후 여등: 함께 항우를 공격하여 참하다. 후, 천오백호"

"오방엄후 양무: 기도위로 항적을 참하다. 후, 칠백호"

 

오인은 모두 '공동으로 항우를 참한' 공적이 있다. 그중 양무가 도기위로 지위가 가장 높은데, 받은 봉록은 가장 적다. 겨우 칠백호이다. 양희, 여마동, 왕예의 세 사람은 제후에 봉해진 시간이 모두 "한나라 6년 정월 사유일"이다. 그리고 봉호의 차이는 사백호에 지나지 않는다. 여등은 '한나라 7년"에 봉해지고, 양무는 '한나라 8년 삼월 신묘일'에 봉해진다. 마찬가지로 항우의 시신의 일부분을 얻은 5인인데, 제후에 봉해진 시간과 호수에 차이가 난다. 이것은 바로 '항왕의 시신을 얻어서 제후에 봉해졌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서, 양희 등 5명이 전우로서 서로 앞다투어 싸우면서 항우의 시신을 나눠차지했다면, <한서. 공신표>에 '항왕 시신일부를 획득"한 것을 공로로 적을 것이다. 절대로 '함께 항적을 참했다"고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반고가 <한서>를 쓸 때는 문구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사실의 진실성과 엄밀성은 사서의 모범이 될 만하다. 절대로 아무렇게나 황당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외에, 필자는 항왕이 자살하지 않았다고 본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고릉에서 해하까지 물러나면서 마음 속으로는 의분과 치욕을 씻겠다는 분노가 있었다. 홍구의 약속은 초한 쌍방이 스스로 원해서 체결한 평화정전협정이다. 유방, 항우의 쌍방은 분명히 맹세를 했다: 전쟁을 끝내기로. 그런데 항우는 신의를 지켜, 금방 약속대로 유방의 부모처자등 인질을 풀어주었고, '한군은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순식간에 유방은 신의를 어기고, 초군을 추격하여, 다시 전화를 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항우와 우희는 마음 속으로 속았다는 분노가 솟았을 것이다. 스스로 패주라고 생각하는 항우가 어찌 이런 굴욕과 사기를 참을 수 있을 것이가. 항우의 성격으로 보면, 그는 분노하여 맹세했을 것이다. "유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사람새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항우는 오로지 오강을 건너가서 재기하여 복수할 것만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항왕이 어찌 강가까지 갔는데 건너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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