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궁(阿房宮)은 항우(項羽)가 불태웠는가?
글: 문재봉(文栽縫)
역사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방궁이 2천여년전의 진나라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진시황(기원전259-기원전210년)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라 하나를 정복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실도를 그려서, 진나라 도성인 함양의 위수 남안에 궁전을 똑같이 모방해서 만들었다. 이를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고 불렀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에 모두 145종의 궁실이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것으로는 신궁, 감천궁, 흥락궁, 장양궁등의 궁전이 있다. 당시 함양은 궁전이 숲이라고 할 만하다. 누각이 서로 이어져 있고, 회랑과 길이 끝이 없고, 꽃향기와 경치가 뛰어났다. 진시황35년(기원전212년)에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후, 도성인 함양에 사람이 너무 많고, 이전의 황궁이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하여, 죄수70여만명을 동원하여 사천, 호북등지에서 목재를 벌목하게 하여 운반하고, 북산의 돌을 캐내도록 하였다. 주나라의 도성 풍, 호의 사이에 놓인 위하의 남안에 있는 황가원림 상림원(上林苑)에 천하의 건축의 정수를 모아서, 새로운 궁전을 건설한다. 이 궁전이 바로 나중에 아방궁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궁궐이다.
아방궁의 규모는 공전절후였고, 기세가 대단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방궁의 전전(前殿)은 동서로 오백보이고 남북으로 오십장이며, 전각의 안에는 1만명이 앉을 수 있었다. <<한서>>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함양에서 시작하여 서로는 옹(雍)에 이르며, 이궁이 삼백이며, 종, 북, 장막을 옮기지 않아도 되도록 갖추었다. 그리고 아방(阿房)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전각의 높이가 수십인(數十仞)이고, 동서로 5리이며, 남북으로 천보이다. 가마를 타고 말을 타고 다녀도 되며, 4마리의 말이 달려도 깃발이 걸리지 않는다. 궁실의 화려하기가 이 정도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두목은 <<아방궁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육국의 왕이 망하고, 사해가 통일되었따. 촉산이 우뚝하니 아방궁이 나타났다. 삼백여리에 걸쳐 있으며 하늘의 해가 나뉜다. 여산의 북쪽에 지어서 서쪽으로 꺽여져 함양에 닿는다. 두 내가 흘러서 궁의 담장으로 흘러든다. 다섯 걸음마다 누(樓)가 있고, 열걸음마다 각(閣)이 있다. 회랑은 휘어져 있고, 처마는 높이 솟아 있어, 각각 지세를 끌어안고 서로 싸우는 듯하다. 하루 안에, 한 궁궐안에서 날씨가 서로 같지 않을 정도이다.” 만일 <<사서>>의 기록에 따라 추산해보면 진나라때의 1보는 6척이고, 삼백보가 1리이다. 진나라의 1척은 약 23센티미터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아방궁의 전전은 동서로 약 690미터, 남북으로 115미터가 된다. 부지면적은 8만평방미터이고, 만명을 수용하는 것도 여유가 있다. <<한서>>에 따라 추산하면, 규모는 더욱 커진다.
전설에 따르면, 이처럼 인적 물적 투입을 많이 한 극도로 호사스러운 아방궁이다. 그러나 수십년후 초패왕 항우가 관중으로 들어올 때,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큰 불은 3개월간 꼬박 탔고, 방원 백리는 모조리 잿더미로 변했다.
2002년, 이전의 휘황함을 찾기 위하여 고고학자들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부교외에 있는 삼교진 이남의 동으로는 거가장부터 서로는 고성촌에 이르는 아방궁의 유적지에 대한 탐사를 시작했다.
고고팀은 제1차 탐사갱을 뚫었는데,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가 죽지 않고, 계속 발굴하기로 결정한다. 탐사작업이 더욱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항토층(夯土層)부터 조사를 시작한다. 고대 건축의 기층은 항토로 만들었고, 한층을 쌓은 후 다시 한층씩 쌓았다. 항토의 기반을 옆에서 본다면 마치 여러겹의 케이크와 같다. 항토는 일반적인 경작토와 다르다. 아주 견고하고 아주 굳어서 철추로 내리쳐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이 항토층은 비록 2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거의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견고했다. 그러나, 고고팀이 순조롭게 탐침봉을 넣어본 후에 나온 결과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불에 탄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큰 불이 난 후의 잔류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고고팀은 아마도 발굴한 곳이 너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즉, 아방궁에서 불에 탄 부분을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고팀은 아방궁 유적지에 대하여 융단폭격식의 전면적인 탐사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고고팀도 방법을 바꾸었다. 그들이 채택한 것은 매화점위법(梅花點位法)이다. 소위 ‘매화점위법’은 매 1평방미터에 매화점 같은 형식으로 5개의 탐사구멍을 뚫는 것이다. 매화점위법은 비교적 일반적인 탐사보다 더욱 세밀한 방식이다. 그러나, 수만개의 탐사구멍을 뚫고, 지층의 토양에 대한 원소분석을 하였찌만, 여전히 화재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2000여년이 지나다보니, 비바람에 씻겨서 이미 큰 불이 남긴 흔적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비교를 위하여, 아방궁 고고팀은 한나라때 장락궁의 유적지로 갔다. 이곳은 일찍이 한나라때의 수도인 장안성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중 하나였다. 바로 한무제의 모친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금옥장교’로 알려진 풍류이야기는 바로 2천여년전 이 궁전에서 일어났다. 동한 말기에 장락궁은 한나라의 다른 궁전과 마찬가지로, 불에 타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2천년이 지났지만, 이곳에는 불에 탄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2천년간 전해져 내려온 서초패왕 항우의 군대가 관중으로 들어간 후, 원한을 풀기 위하여 아방궁 및 부속건물을 모조리 불태워서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것이 거짓이란 말인가?
고고학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아방궁 유적지는 실제적으로 아방궁 전전의 유적지라고 한다. 아방궁 전전 유적지의 항토층은 동서 1270미터, 남북 426미터이고 기반위의 서, 동, 북의 세 곳에는 이미 항축토장이 있고, 담벼락의 위에는 기와를 깐 흔적도 있다; 항토기반에는 남쪽 담벼락은 만들지 않았다. 삼면의 담장 안에서 진나라때 문화층이나 진나라 궁전건축유적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흙의 분포를 보면 사람들은 항토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겼고,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기반을 쌓아갔다. 전문가는 이에 근거하여 대담한 추론을 내놓았다. 아방궁의 모든 공사는 단지 전전의 기반공사만 하였고, 다른 공사는 아직 착공하지도 않았다. 아방궁은 완공되지 못한 것이다.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항우가 불태워버린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기록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자영 및 진나라의 여러 공자종족을 죽였다. 함양을 도살하고, 궁실을 불태웠으며, 그 자녀들을 노획하고, 진기이보를 거두어서, 제후들이 함께 나누었다.” 항우는 함양에 대하여 불태우고, 죽이고, 노략질했지만, 아방궁을 불태웠다고 명확히 적지는 않았다. <<사기.항우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궁실을 불태웠으며, 불이 석달동안 꺼지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말은 없다. 불에 태운 것은 아마도 진나라의 다른 궁전들일 것이다. <<사기>>의 또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아방궁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는 방증이 된다. “사월, 진이세가 함양으로 돌아왔다. 말하기를 ‘선제는 함양조정이 적다고 아방궁을 만들었다. 건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황상이 붕어해서, 만들기를 그만두고, 여산에 흙을 다시 쌓았다. 여산의 일이 끝났다…’ 그리고는 아방궁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이 해 7월에 진승오광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후로 이 정도 시간이면 아방궁을 완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방궁의 전전조차 짓지 못했다면, 전전의 항토기반에 궁전건축물이 없었을 것이다. 항우도 굳이 위하를 건나와서 궁전건축물도 없는 항토기반에 불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