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유병충: 북경성의 건설자, 쿠빌라이의 제갈량

중은우시 2011. 2. 5. 19:33

글: 왕위(王偉)

 

 

 

북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며, '지구표면에서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공정'이라고까지 불리운다. 이 뛰어나기 그지없는 도시는 중국역사상 마지막 5대의 봉건왕조인 요, 금, 원, 명, 청의 수도였고, 중화문화의 정수가 이 곳에 모였으며, 그 설계계획은 중국고대도시의 최고의 성과를 나타냈다.

 

북경성은 세계에서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이며, 지구인들이 모두 아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 대도시를 누가 설계했는지를 물으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북경은 진한(秦漢) 이래로 중국북방의 군사 및 상업 중요도시였다. 역사적으로 계성(薊城), 연도(燕都), 연경(燕京), 탁군(涿郡), 유주(幽州), 남경(南京), 중도(中都), 대도(大都), 경사(京師), 순천부(順天府), 북평(北平), 북경(北京)등으로 불리웠다. 3천여년의 도시역사와 850년의 수도로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북경이 처음으로 고대 중국의 수도가 된 것은 금(金)나라때이다. 정원 원년(1153년), 금나라의 황제 해릉왕(海陵王) 완안량(完顔亮)은 정식으로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중도라 부른다. 당시의 규모는 비교적 적었다.

 

1206년, 징기스칸이 몽골철기를 이끌고 대몽골제국을 건립한다.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역대왕조중 영토가 가장 넓었던 왕조인 대원왕조를 건립한다.

 

1260년 6월 4일, 쿠빌라이는 한 위대한 인물로 하여금 도성인 개평(開平, 지금의 내몽고 다륜현 부근)을 건설하게 하고 상도(上都)라 부른다. "삼년만이 공사를 완공하고, 개평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상도로 승격되며, 연(燕)을 중도(中都)로 삼는다." 쿠빌라이는 개평에서 황제에 오른다.

 

쿠빌라이가 영토를 계속하여 확장하며 사업은 갈수록 강대해졌다. 원래의 도성인 개평으로는 이미 수도로 삼기에 부적합해졌다. 그는 다시 이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아는 '위대한 인물'에게 중도(연, 지금의 북경시)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게 한다. 완공한 후에 이름을 바꾸어 대도(大都)로 부른다. "사년, 다시 00에게 명하여 중도성을 건축하고, 종묘와 궁실을 만들었다. 팔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원으로 하고, 중도를 대도로 하도록 건의한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북경이 원나라때 전중국의 수도로 등장하며, 원대도(元大都)라 불리웠고, 전국의 중심이 된다.

 

지원8년(1271년) 쿠빌라이는 <<건국호조>>를 반포하여 국호를 "원"이라 한다. 이 국호는 쿠빌라이가 이 '위대한 인물'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역경>>에서 "대재건원(大哉乾元)"의 의미를 따서 지은 것이다.

 

북경성은 명,청 두 왕조의 황성이기도 하다.명나라는 명성조(영락제 주체)이후 북경에 대규모 확장공사를 벌인다. 청나라도 다시 확장건설을 한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서는 북경ㅇ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이 '원대도(북경성)'의 건설자는 <<주례.고공기>>의 "구경구위(九經九緯)", "전조후시(前朝後市)",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예제에 따라, 길거리를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분할하여 나누었다. 새로 만든 길거리는 아주 규칙적이었고, 규모도 컸다. 원대도는 근대 북경성의 원형을 형성한다. 중국 봉건사회의 역대도성중 가장 주례의 법도에 가까운 도성이 된다.

 

"중축포국(中軸布局), 좌우대칭(左右對稱)"은 원대도와 황궁설계의 중요원칙이었다. 그것은 유아독존, 황권지상 및 왕은 천하의 중심에 거처해야한다는 봉건황권사상을 나타낸다. 전체 원대도의 건축배치는 황궁이라는 중심을 두고 건설되었다. 한가운데에는 남북으로 8킬로미터에 이르는 아주 분명한 중축선을 가지고 있다. 북경성의 궁전은 거대하고 사묘도 웅위했다. 길거리는 넓고 좌우대칭이었다. 계획은 아주 정치했고, 기상이 컸다. 앞뒤로 기복이 있고 아름답고 커다란 건축물들을 배치했는데, 모두 이 중축선을 둘러싸고 건설되었다. <<역경>>의 음양팔괘, 천지조합은 모두 배치에 활용되었다. 북경성의 설계는 뛰어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계자는 세계건축사상 가장 위대한 설계자의 한 명임에 틀림없다.

 

원대도는 1267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1285년에 완공한다. 18년의 기간이 들었다. 도성의 둘레는 28킬로미터여이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성이었을 뿐아니라, 역대왕조에서 지은 가장 규모가 큰 성이기도 하다.

 

마르코 폴로는 지원12년(1275년)에 원대도로 온다. 당시 궁성은 막 완공되었고, 도성은 여전히 건설중이었다. 궁전의 웅위함과 장려함에 그는 완전히 빠져버린다. 그는 여행기에서 원대도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미하고 상세히 묘사한다

 

위에서 말한 "위대한 인물"의 본명은 유간(劉侃, 1216-1274)이고, 자는 중회(仲晦)이다. 병충(秉忠)이라는 이름은 쿠빌라이가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원나라때 형주(邢州, 지금의 하북성 邢台)사람이다. 스스로 호를 장춘산인(藏春散人) 혹은 요휴상인(寥休上人)이라 하였다. 그는 유, 불, 도를 한 몸에 익혔다. "鑿開三室, 混爲一家(착개삼실, 혼위일가)". 그는 스님이여, 도사이며, 유학자이며, 관리였다. 그는 속세를 떠난 신분으로 속세의 일을 해냈다. 이를 보면 마음 속에는 시종 '사이천하위기임(士以天下爲己任, 선비는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의 유가사대부사상이 있었던 것같다.

 

청년시기의 유병춘은 원래 하급관리였다. "형태절도사부영사(邢台節度使府令史)"의 직위였다. 그는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항상 우울하게 지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지냈는데, 이제는 몰락하여 하급관리로 있다. 대장부가 세상을 만나지 못하면, 은거하여 그 뜻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1238년, 유병충은 관직을 버리고, 무안산으로 들어가서 전진교의 도사가 된다.

 

천녕사의 고승인 허조선사(虛照禪師)는 유병충이 기재라는 것을 알아보고, 제자를 보내어 그를 천녕사로 데려온다. 여러번의 장시간 대화를 거쳐 그는 다시 화상이 된다. 허조는 그에게 자총(子聰)이라는 법호를 내린다.

 

사실 유병충에 있어서, 도사도 좋고, 화상도 좋다. 그는 모두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그저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모두 지나가는 과객이었고, 부운(浮雲)이었다. 그의 출가는 거짓이었다. 유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나라에 도가 있으면 관직에 나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나 은거한다"는 이론에 따라 그는 은거한 것이었다. 기회를 보아서 명군을 만나서 큰 사업을 하는 것이 그의 진실된 뜻이었다.

 

유병충과 사부인 허조선사 두 사람은 천하를 운유한다. 나중에 산서 대동의 남당사에 정착한다. 사회의 속박이 없었으므로 그는 여러 분야의 지식을 힘껏 익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특히 <<역경>>과 북송때 사람 소옹(邵雍)이 쓴 책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정통했다.

 

1242년, 북방의 선종 임제종(臨濟宗)의 영수인 고승 해운(海雲)이 명을 받아 쿠빌라이를 접견하러 가는 길에 대동을 들르게 된다. 그는 유병충이 박학다식하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그를 만나본다. 대화를 나눈 후에 함께 갈 것을 권유한다. 유병충은 자신이 두각을 드러낼 기회가 왔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산을 나와 해운과 함께 쿠빌라이를 만나러 간다. <<원사. 유병충열전>>에는 그에 대하여, "천문, 지리, 율력, 삼식육임둔갑에 속하는 것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천하의 일을 논함에 손바닥안의 일처럼 잘 알았다. 세조(쿠빌라이)가 그를 크게 아꼈다. 해운이 남으로 돌아간 후, 병충은 번저에 남아있게 된다."

 

쿠빌라이는 이 스물몇살된 청년화상이 모르는 책이 없는 것을 보고는 나라를 다스리는 개세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쿠빌라이는 그를 아주 아껴서 자신으 막료로 삼아 군정대사에 참여하게 한다. 유병충은 명군을 만나서, 자신의 궤적을 바꾸게 되고, 몽골제국의 운명도 바꾸게 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33년에 이르는 군신간의 정의를 이어간다.

 

유병충이 쿠빌라이를 만났을 때가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그가 지닌 재능에 쿠빌라이는 감탄을 한다. 당시 몽골내부에는 칸의 지위를 놓고 경쟁이 치열했다. 그는 쿠빌라이에게 주공(周公)을 본받으라고 건의한다: "전장, 예약, 법도, 삼강오륜은 요, 순때부터 있었다. 난세를 다스리는 도는 주로 사람에 의지한다. 징기스칸대제가 대막에서 일어나서 여러 나라를 정복한 것은 그가 이 천하를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바로 자손드리 영원히 이어지기를 원했다. 제가 듣기에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주공은 주무왕의 동생인데, 그는 천하대사를 위하여 밤을 낮처럼 일했습니다. 주나라가 천하를 팔백년간이나 다스린 것은 모두 주공의 공로입니다. 당신은 당금 군주의 동생이니, 마땅히 주공을 본받아 일을 해야 합니다.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유병충의 이 말을 쿠빌라이는 받아들인다.

 

몽골에서부터 원나라의 여러 황제들은 모두 점을 믿었다. 쿠빌라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병충은 이 방면의 재주를 이용하여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는다. 장문겸(쿠빌라이때의 좌승상. 유병충과 동문수학)은 <<행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은 병충과 시종 삼십년이상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춥거나 덥거나 비가오더라도 싫증을 낸 적이 없다. 그리고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천문과 점복이 아주 정통하다. 짐이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업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가사를 입은 화상이 군사가 되고, 쿠빌라이의 좌우에서 그를 위하여 책략을 냈고, 법령을 세우고 예의를 밝혔다. 농잠업을 권하고 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그는 쿠빌라이조의 "중통(中統)", "지원(至元)"이라는 두 개의 연호를 짓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원의 국호도 짓는다. 연호를 만들고, 인재를 선발하고,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짓고, 전장제도를 만드는 등등이 모두 유병충에게서 나왔다. 유병충이 건의만 하면 쿠빌라이는 모두 받아들였다. "관복을 정하고, 조정의 예의를 정하고, 봉록을 주고, 관료제도를 정하는 것이 모두 유병충이 제안해서, 법이 된 것이다."

 

유병충은 조세를 경감하고, 급여를 올려주고, 청백리를 장려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고, 교육을 중시하며, 형벌을 가볍게 하여, 국가와 백성이 물과 물고기와 같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관리들의 집안에 먹고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아야, 관료는 자신의 신분과 명예를 중시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는데도 부정부패하면 엄히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는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고신양렴(高薪養廉, 급여를 많이 주어 청렴한 관리를 기른다)"이다. 유병충의 고신양렴의 건의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들 건의는 원나라를 정치, 전장, 법도, 예약, 교육등 여러 분야에서 든든한 기초를 쌓게 해주었다.

 

유병충이 쿠빌라이와 함께한 삼십여년동안, 그는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열심히 일을 하여, 쿠빌라이의 총애와 신임을 배반하지 않았다. "명을 받으면 천하를 자신의 임무라 여겼고, 일이 크거나 적거나, 무릇 국가체계와 관련되는 것이라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했고, 그가 말한 것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유병충이 처음에 쿠빌라이를 따를 때, 쿠빌라이는 아직 번왕(藩王)이었다. 그는 문관이었는데, 빡빡머리에 가사를 입은 모습은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법호가 '자총'이므로 사람들은 그를 '총서기(聰書記)"라고 불렀다. 이 화상은 이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큰 뜻을 품은 쿠빌라이고 이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병충은 비록 좌우에 있었지만, 의복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총서기라고 불렀다." 쿠빌라이가 지원원년(1264년)에 황제에 오른 후에, 비로소 조서를 내려 이 자총화상에게 환속을 명하고, 그에게 유씨(劉氏)성을 되돌려주고, '병충'이라는 이름까지 내린다. 그리고는 광록대부, 태보(太保), 참령중서성사(參領中書省事)의 직위를 내린다. 유병충은 대신이 되었다. 이를 보면 원세조 쿠빌라이가 그를 얼마나 중시하고 신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유병충을 자신의 제갈량으로 생각했다. <<속자치통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장막의 밀모에 참여하고, 사직의 대계를 짰다" 또 어떤 자료에서는 그와 쿠빌라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복심(腹心)으로 대했고, 물고기와 물과 같았으며, 모의를 할 때면, 원로나 중신이라도 미리 듣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공(유병충)과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은 쿠빌라이와 유병충이 서로 밀접한 관계이고, 유병충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병충은 많은 사람들을 추천했다. 이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는 명신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곽수경(郭守敬), 장문겸(張文謙), 장이(張易), 왕순(王恂)의 4사람은 모두 유병충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유병충은 그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추천하여 관직을 얻게 해주었고, 각각 저명한 수학자, 농학자, 천문수리전문가 및 대학자가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천문, 수학 및 수리사업의 발전에 뛰어난 공헌을 한다. 이들 5명을 합하여 "형주오걸(邢州五傑)"이라고 부른다.

 

유병충은 이외에도 요추(姚樞), 허형(許衡), 이덕휘(李德輝), 유숙(劉肅), 이간(李簡), 장경(張耕), 마형(馬亨), 유병서(劉秉恕, 유병충의 동생)등 수십명을 추천한다. 이들은 당시의 명사이거나 거유이거나 혹은 민간에서 각각의 장점을 지닌 인물들로써, 나중에 원나라의 중신이 된다.

 

유병충은 군자와 소인에 대하여 이론적인 구분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는 의리를 중시하고 마음 속으로 충량(忠良)을 품고 있다; 소인은 이욕(利慾)을 추구하며 뱃속에는 참영(讒佞)을 품고 있다. 군자가 자리에 있으면 소인을 포용하지만, 소인이 득세를 하면, 군자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반드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해야 하고, 소인을 잘못 기용하면, 국가가 망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는 쿠빌라이에 보내는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군(明君)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재료를 쓰는 것과 같다. 그 크기와 길이에 따라, 자로 재고 먹으로 표시해서 사용한다(規矩繩墨)" 쿠빌라이는 사람을 뽑고, 사람을 쓰는데 유병충의 인재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특별히 격식을 따지지 않고 널리 인재를 기용했다. 원나라 초기의 정치, 경제, 문화등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한 이유이다.

 

유병충은 조정에서 관료로서 쿠빌라이를 삼십여년간 모신다. 그는 민생을 기본으로 하고, 국가이익을 항상 고려했으며, 적극적으로 일에 대하여 연구하고 일처리를 했으며, 스스로 청렴했고,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부귀를 부운(浮雲)처럼 여기고, 공명을 몽환(夢幻)처럼 여긴다." 유병충은 이렇게 말한 바 있고, 이렇게 실천했따. 쿠빌라이가 한번은 유병충에게 백금 천냥을 하사했다. 유병충은 완곡하게 사양한다: "저는 그저 산야의 비천한 몸입니다. 아주 운이 좋아서 황제의 은총을 입었고, 먹고 마시고 쓰는 것을 조정에서 주고 있습니다. 백금은 나에게 아무런 쓸 데도 없습니다."

 

쿠빌라이는 영명한 군주이지만, 몰골족의 용맹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기세로 누르려고 했다. 여기에 조정의 명쟁암투에 유병충은 염증을 느끼게 된다. 공명을 이룬 그는 더 이상 관직이나 봉록에 연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바램이 있었다. 그는 도사, 화상을 지낸 적이 있는데, 다시 그의 선풍도골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서성사를 사직한다. 그는 <,삼전자(三奠子)>>라는 사(詞)에서 이렇게 적었다.  

 

염아행장유명(念我行藏有命), 연수무애(煙水無涯)

차거안(嗟去雁), 선귀아(羨歸鴉).

반생형원작인(半生形原作人), 거초본개누영(據抄本改累影), 일사빈생화(一事鬢生華)

동산객(東山客), 서촉도(西蜀道), 차환가(且還家)

호중일월(壺中日月), 동리연하(洞裏煙霞)

춘불로(春不老), 경장가(景長嘉)

공명미상쇄(功名眉上鎖), 부귀안전화(富貴眼前花)

삼배주(三杯酒), 일각수(一覺睡), 일구차(一甌茶)

 

유병충은 생활이 한담(閑淡)했다. 그는 <<우환주>> <<치좌>> <<만성>>등 몇 개의 시에서 은거하고 싶은 심리를 드러냈다. 그는 죽림칠현의 은거생활을 부러워하여, "난성구무삼로귀(蘭省久無三老貴), 죽림도유칠인현(竹林徒有七人賢)"이라는 싯구도 남겼다.

 

유병충은 원나라초기의 대정치가, 설계대가일뿐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심후했다. 그는 저명한 학자, 시인이며 산곡가였다. 그는 일생동안 천문, 점복, 산술, 문학분야에 저술이 풍부하다. <<장춘집>> 육권, <<장춘사>> 일권, <<시집>>이십이권, <<문집>> 십권, <<평사옥척>> 사권, <<옥척신경>> 이권등을 남겼다.

 

<<원곡삼백수>>에는 그의 <<하엽,연하동(荷葉,煙霞洞)>>이 실려 있다.

 

남고봉(南高峰), 북고봉(北高峰), 참담연하동(慘淡煙霞洞).

송고종(宋高宗), 일장공(一場空), 오산의구주기풍(吳山依舊酒旗風)

양도강남몽(兩度江南夢)

 

모택동은 이 사를 아주 좋아하여 여러번 썼다.

 

<<원사>>에는 그의 시는 소산한담(蕭散閑淡)하여, 그의 인품이나 기도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의 <<독유산시>> 10수중 두 구는 다음과 같다: "자고문장귀사달(自古文章貴辭達), 소황경불재신기(蘇黃竟不在新奇)". 이것이 그의 창작이 추구하는 바였다. 그는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시가의 특징이다. 그의 사가 표현하는 사상감정은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더욱 청냉(淸冷)할 뿐이다.

 

유병충의 시집 <<장춘집>> 6권, <<섬궁곡>> <<건하엽>>등 산곡 12수가 있다. 그는 원나라초기의 저명한 산곡작가이다. <<영귀부>>는 유병충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하였다.

 

지원십일년(1274년) 유병충은 원세조를 따라 상도로 피서를 간다. 같은 해 8월, 유병충은 남병산 별장의 자신의 불실(佛室)에서 아무런 병도 앓지 않고 죽는다. 그때 그의 나이 59세이다. 그는 죽기 전에 금(琴)을 안고 노래를 높이 불렀는데, 날이 밝을 때까지 쉬지를 않았다. 가복(家僕)이 들어가보니, 포단위에 앉아있어서,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그가 이미 좌화(坐化)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세조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 마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병충은 짐을 삼십여년간 섬기면서, 조심스럽고 세밀하며 험난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숨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음양술에 정통하여 점을 쳐서 미래를 알았으며, 맞는지는 오직 짐만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예부시랑 조병온을 보내어 호상하게 하고, 궁내부의 돈을 내서 관을 마련해서 대도에 후하게 장사지낸다. 나중에 형주의 선영(지금의 형태현 가촌)으로 이장한다. 지원십이년에 태부(太傅)에 추증하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하며,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한다. 원성종때, 태사(太師)에 추정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한다. 인종때, 다시 상산왕(常山王)에 봉한다. 원나라때 한족으로 삼공에 봉해진 사람은 오로지 유병충 한 사람뿐이다.

 

유병충은 이미 역사가 되었지만, 그가 남긴 풍성한 업적은 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만든 북경성의 바둑판 격국도 역사의 강물 속에서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