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순수한 한족(漢族)은 존재하는가?

중은우시 2010. 9. 21. 11:26

: 노위병(路衛兵)

 

한족(漢族)이라는 명칭은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화하(華夏)라고 불렀다. “하(), 중국지인야(中國之人也)(하는 중국의 사람을 말한다). ‘중국(中國)’은 고대 중원지구를 가리키고, 중원지구에 살던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중국인과는 의미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중원의 사람은 주로 한족이다. 당연히 당시의 한족과 지금의 한족도 많이 다르다. 중원의 주변에는 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였고, 서로간에 계속 융합되면서, 한족의 실질도 변화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역은 넓다. 중국인들은 이를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중국의 지역은 상대적으로 폐쇄되어 있다. 현재는 바다에 면한 것이 지리적인 장점으로 꼽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황량하고 궁벽진 곳으로 취급받았다. 예를 들어, 창주(滄州) 옛날에 유배를 보내던 곳이다. 중국대륙의 동쪽과 남쪽은 바다이다. 나갈 수가 없다. 서남은 험산준령이고, 세계의 지붕이고, 지세가 너무 높아서 넘어갈 수가 없다. 서쪽은 산맥이 계속 이어지고, 나중에 비단길이 개척된다. 하서주랑(河西走廊) 통하여 겨우 서방과 연결될 있었다. 주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아주 좁다. 어쨌든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통로이기는 하다. 남방은 당시에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다. 미개발의 처녀지였다. 북방은 대막, 초원, 고비사막이다. 방목에 적합하고 유목민족들이 생활할 있는 곳이다. 상대적으로는 낫다고 있지만, 기후가 너무 나쁘고, 황사가 시시때때로 분다.

 

그래서 고대에 가장 좋은 곳은 현재의 관중평원과 화북평원이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중원지구이다. 중원은 기후가 좋고, 토지도 비옥하다. 농경문화가 발전하는데 유리한 곳이다. 그래서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기회만 있으면 남하해서 좋은 서식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원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전설상의 황제와 치우의 전쟁, 나중의 흉노, 동호, 이런 민족간의 충돌은 거의 중단된 적이 없다. 민족들은 이런 충돌과정에서 계속 융합해갔고, 계속 충돌하면서 전진해갔다. 당연히 이런 융합은 혈통상의 융합뿐만이 아니라 문화상의 융합도 포함한다.

 

민족간의 1차대규모 융합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일어난다. 시기에 북부와 서부의 5 소수민족, 흉노 선비, , , 강은 앞뒤로 중원에 진출한다. 한족을 대표하는 ()나라는 짐을 싸들고 강남으로 건너갔다. 북방에 남아있던 한족은 이들 소수민족과 혼거하기 시작하고, 계속 융합한다. 소수민족은 한족의 선진문화를 부러워했고, 한족들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십육국정권의 건립자들은 대부분 소수민족이다. 이들 제왕들은 젊었을 거의 모두 한족문화를 접촉해본다. 장안이나 낙양에서 공부를 한다. 그들은 나중에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이나 백관제도를 대부분 한족에게서 배워갔다. 예를 들어 가장 먼저 중원에 들어온 흉노족 유연, 후조를 건립한 갈족 석륵, 전진의 부견 등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한화정도는 매우 높았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나중의 탁발씨이다. 탁발굉은 한화개혁을 대거 실행한다. 선비족에게 한족말을 하고, 한자를 배우게 하고, 선비족과 한족의 통혼을 장려한다. 기본적으로 한족의 풍습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민족은 사람이 일정한 지역범위내에서 장기적으로 생존하며, 자신의 독특한 언어와 습속을 지니게 되면서, 점정 다른 무리들과 구분되는 것이다. 민족은 혈연으로 구분되는 종족(種族)과는 다르다. 중국에서 종족의 개념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주로 보는 것은 생활습속에서의 차이이다. 소수민족은 한족의 습속을 받아들이면 점점 한족과 다를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족도 소수민족의 습속을 받아들이며, 이상 완전한 의미의 한족이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북연을 건립한 풍발은 한족이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선비군대에서 일했고, 선비화정도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그가 모용씨를 대체할 , 선비족들도 받아들일 있었던 것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의 융합뿐아니라, 소수민족간에도 상호 통혼하고 융합했다. 예를 들어, 흉노부친과 선비모친의 결합은 나중에 철불(鐵弗)이라는 후손을 낳는다.

 

십육국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역사무대에 등장했던 5개민족은 강족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강족은 십육국시대에 후진을 건립한 강족과는 차이가 있다. 여러 민족과 계속 융합하면서 계속 번성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다만, 민족은 소멸될 있지만, 인종은 소멸되지 않는다. 현재의 혼혈아와 마찬가지로, 몇분의 몇은 어느나라의 혈통인 것과 마찬가지로 분자는 아주 적더라도 영원히 1이다. 분모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절대로 0으로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흉노, 선비, , 갈의 소수민족은 독립된 민족으로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혈맥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다.

 

한족은 사실 이상 고대의 한족이 아니다. 다민족의 융합체이다. 한족을 상징하는 것은 문화와 습속이 이어진다는 하나의 부호이다. 한족은 여러 대규모로 남천(南遷)했다. ()나라도 중의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남방인들이 순수한 한족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 남천한 사람들이 혈통에서 순수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설사 순수한 한족혈통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정착한 남방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상 단일성을 유지할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중국에서 남방은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곳으로 이주한 한족은 그들과 융합되었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민족간에는 우열이 없다. 그저 발전이 다를 뿐이다. 한족이 소수민족을 받아들이고, 소수민족을 동화시키는 동시에, 계속하여 소수민족의 선진문화와 습속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으며(席地而坐), 자신의 뒷꿈치 위로 꿇어앉았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모두 중국에서 배워갔기 때문에, 현재도 이런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화복을 입은 일본여인을 보라. 걸음걸이가 완전히 팔자이고, 모두 바닥에 앉는다. 아마도 일본인들의 다리가 짧은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반신의 혈액이 순환되지 않으므로, 발육에 영향을 준다. 현재는 일어섰고, 혈액이 통하니, 키도 커지는 것이다. 중국은 옛날에 꿇어앉았었다. 황상이 회의를 열고 시간이 오래되더라도, 일어서고 싶어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시 병기를 보자. , 화살, 말등을 보자. 일찍이 조무령왕때, 호복기사(胡服騎射) 실행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남에게 배운 것이다. 유목민족은 하루종일 말을 타고 활을 쏘니 훨씬 잘했다. 그리고 목축기술이 있다. 그저 양식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 입맛을 바꾸어 고기도 먹어야 한다. 농사를 짓는 것은 하지만, 양을 기르는 것은 반드시 잘한다고 수가 없다. 소수민족을 동화시킨 것은 한족의 수가 많았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장기간 집적되고 형성된 선진문화이다. 탁발씨가 중국 북방에 진입한 것은 조위시대이다. 중원에서는 삼국연의의 두뇌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북방에서는 여전히 새끼를 꼬고, 나무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삼황오제때의 수준에서 그다지 발전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배운 것이다. 낙후한 나라가 선진나라에서 배우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배우지 않는 것이 바로 낙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상의 낙후와 우매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민족을 나누는 것은 사실 우매한 짓이다. 어느 민족이든 자랑할만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민족이든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 있어서, 어느 민족이든 모두 엘리트는 있기 마련이고, 어느 민족이든 모두 패류(敗類) 있기 마련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으니 나쁘다. 그러나, 그들 국내에서도 천황에 반대하고 진리를 옹호하려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인들 중에서도 매국노와 한간이 나왔다. 그래서 민족만 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은 사람을 보아야 한다. 인간성을 보아야 한다. 인간성의 승리가 최종적인 승리이다. 십육국의 역사는 천년이상 흘렀다. 오늘날까지도 풍운을 질타하던 영웅들은 일찌감치 역사의 과객이 되었지만, 많은 경험과 교훈을 남겨주었다. 이것들은 후세인들이 평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