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서복(徐福)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중은우시 2010. 5. 30. 23:16

글: 소운(小雲)

 

기원전210년,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동남동녀 3천명'과 '백공(百工)'을 데리고,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배를 타고 동해를 넘어 장생불로약을 찾으러 떠났다. 그렇다면, 서복은 정말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어떤 사람은 서복이 확실히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서복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왕조를 건립했으며, 서복이 바로 신무천황(神武天皇, 진무텐노)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서복이 일본으로 갔다는데 의문을 표시한다. 그들은, 서복의 함대는 해양의 광풍과 파도를 견틸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국내학자들이 당시의 조선기술과 항로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를 하고, 서복의 상륙지점에 대하여 고증을 한 끝에 수수께끼는 하나하나 풀려가고 있다.

 

첫째 수수께끼: 서복은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서복은 서불(徐)이라고도 부른다. 진나라때의 방사(方士)중의 하나이다. 기원전210년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발해의 삼신산으로 장생불사약을 찾으러 떠나는데, 그 후에 소식이 끊긴다. 서복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서복이 향한 목적지에 관하여, 학술계에서는 서복이 선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산열도로 갔다고도 하고, 대만으로 갔다고도 하며, 조선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북경대학 역사학과 부교수인 유화축은 서복이 조선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료에 기록이 없어서 성립되기 힘들다.

 

서복의 처음 목적지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이다. 산위의 신선들에게 장생불사약을 달라고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와 지금은 발해(渤海)의 해역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말하는 발해는 중국의 동쪽 바다를 말한다. 여기에는 발해, 황해 내지 동해가 포함된다.

 

중국 동쪽의 바다에는 지금의 대만섬도 있고, 필리핀의 루손섬도 있고, 일본의 여러 섬도 있다. 서복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마천도 이에 대하여는 명확히 써놓지 않았다.

 

현재, 많은 학자들은 가장 먼저 서복이 일본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주장한 사람을 오대(五代) 후주(後周)의 의초(義楚)화상이라고 생각한다.

 

유화축은 사실 <<삼국지.오서.오주전>>에 서복의 거취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230년, 오나라는 대장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우 이주(지금의 대만)에만 닿았을 뿐, 단주는 너무 멀어서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고,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동남동녀 수천명을 이끌고 바다로 가서 이 섬에 까지 간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진수(陳壽)의 기술을 보면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단주는 대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온과 제갈량이 대만에만 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손섬(呂宋島)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수가 단주에는 인구 수만가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루손섬에 대하여 원나라 세조때까지도 여전히 '백성이 이백호도 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산열도는 더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주산열도는 육지에서 가까워 쉽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단주는 도대체 어디일까? 프랑스인 시글러의 저작 <<중국사료중 불분명한 여러 나라의 고증>>에서 단주를 일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사적이나 문헌에서,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기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학자 오야리웅(奧野利雄)은 서복이 일본에 도착한 후에 주로 활동한 지역이 일본규슈(九州), 구마노(熊野)일대라고 고증했다. <<부사고문서>> 연구가인 영목정일(鈴木貞一)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서복은 70여살때 사망했다.

 

대만학자 팽쌍송(彭雙松)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각지에 서복의 이름과 관련된 묘, 비, 궁, 묘, 신장등 유적지가 50여곳에 이르고, 상륙지점이 20여곳이며, 전설고사가 30여개이다. 이들 유적과 전설은 비록 모조리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과 관련은 있을 것이다.

 

서복이 수천명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여, 중국의 선진적인 농경방식, 백공의 기술과 습속문화등을 가져왔다. 일본은 금방 신석기시대에서 동기,철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어렵경제시대인 죠몬(繩紋)시대에서 농경경제의 야요이(彌生)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벼농사, 양잠, 약물등이 보급되어, 일본경제문화의 대발전을 이룬다. 일본 민간에서 서복을 농신(農神), 잠상신(蠶桑神), 의약신(醫藥神)으로 모시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보면, 서복이 확실히 일본열도에 도달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수수께끼: 서복은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는가?

 

서복이 출발한 장소에 관하여, 중국학자들은 논란이 뜨겁다. 일본학자들이 '광동연해설'을 주장하는 외에, 중국대만의 어떤 학자는 '절강연해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륙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강소연해설'과 '산동연해설'이다.

 

유화축은 서복이 출발한 항구를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현지의 물질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경제가 발달해야 하고, 둘째는 항구의 자연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량의 인원이 모여서, 대량의 물자를 모으고, 많은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만이 아주 넓어야 하며, 배후에 편리한 교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우수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낭야(琅邪)밖에 없다. 전국시대때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월나라는 낭야를 수도로 정한지 이미 100여년이 되었다. 낭야는 한때 강대한 월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전국시대 중기에 제(齊)나라에 귀속된 후,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를 제외한 또 다른 중요한 경제문화중심이었다. 진나라가 통일한 후, 낭야는 낭야군의 치소이고, 위치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낭야는 경제조건이 뛰어날 뿐아니라, 전국시대 및 이후의 진나라에서 저명한 항구중 하나이다. 낭야대는 석하(石河)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이고, 부근에는 화강암의 침식으로 인한 해안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 물이 깊고 항구가 넓다. 항구로서의 조건이 아주 좋다. 이외에 서산 부근에는 크고 작은 주산, 낭야산등의 산들이 있고, 산에는 우수한 목재도 많다. 선박을 건조할 충분한 자원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서.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서복은 제1차때 낭야에서 글을 올린 후 즉시 현지에서 바다로 나가서 신선에게 불사약을 구하게 하였고, 제2차때는 진시황이 친히 낭야에서 바다로 전송했다고 한다.

 

세번째 수수께끼, 서복의 항로는 어떠했을까?

 

서복의 선단은 낭야에서 일본까지 갔다. 도대체 어느 항로로 갔을까? 현재 학계에는 "북행항로설"과 "남행항로설"이 있다. "북행항로설"은 서복이 선단을 이끌고 낭야에서 출발한 후, 요동반도남쪽을 거쳐 한반도 서해안을 지나, 쓰시마해협을 넘어 일본의 키타큐슈와 와카야마(和歌山)등지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남행항로설"을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산동반도의 청도 혹은 성산두(成山頭) 혹은 지부(芝罘)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 큐슈등지로 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북연해의 여러 항구(출발항구에는 의견차이가 있음)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혹은 한반도의 제주해협을 거쳐 일본 큐슈로 갔다고 하거나, 아니면 직접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유화축에 따르면, 사기에는 서복의 항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당시의 조선기술, 항해지식, 해양조건을 고려하여 전후항로의 흔적을 찾고 고고학적 성과등을 결합하여 합리적으로 논증해야 한다.

 

월나라는 역대 이래로 조선과 항해의 전통이 있다. 회계에서 낭야로 천도한 후, 오나라의 조선기술과 항해지식을 흡수하여 낭야지역의 조선과 항운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월, 오, 제의 세 해상강국의 조선, 항해기술을 결합하여, 진나라의 조선업과 항해술은 공전의 발전을 이룬다. 진나라가 흉노를 공격할 때, 연해의 낭야등지에서 양식을 싣고 발해를 거쳐 황해로 들어가서 황하이북의 전선에 공급해주었다. 이는 진나라의 조선과 항해기술이 어느 정도 원거리항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찌기 전국시대에 중국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항해노선을 개척한 바 있다. 제위왕, 제선왕 및 연소왕때, 적지 않은 제나라와 연나라의 방사들이 바다로 삼신산을 찾아 신선에게 장생불사약을 구하러 떠났다. 방사들이 바다로 떠난 지역은 갈석(碣石) 혹은 산동반도였다. 바다로 들어간 후, 한반도 남부 혹은 왜인거주지까지 갔을 것이다. 한무제때, 일찌기 산동반도에서 선박으로 흉노를 치러간 적이 있다. 그때 거쳐간 곳은 북행항로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때의 항로는 110년전의 서복이 갔던 항로와 아마도 같은 항로일 것이다.

 

일본인 궁태언료(宮泰彦了)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해에는 좌선(左旋)의 회류(回流)가 있다. 이 회류를 이용하면, 한반도 남부의 진한에서 일본의 산음(山陰)으로 향할 수 있다. 중국, 조선, 일본의 고대 사신은 이 항로를 통하여 근 천여년을 왕래했다. 북행항로가 지나는 길에서는 전국시대 연나라, 제나라의 도폐(刀幣)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 그외에 청동검, 청동과, 동탁(銅鐸)등도 발견된다. 이는 전국시대에 이미 이 항로가 개척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