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씨(拓拔氏)는 어떻게 북방의 최종승자가 되었는가?
글: 노위병(路衛兵)
오호난화 139여년동안 북방의 대지에는 여러 나라가 연이어 들어섰고, 서로 죽이고 합병하며, 주마등처럼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네 노래가 끝나면 내가 무대에 오른다"는 격이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대지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것은 야심가에게는 꿈의 땅이었다. 오호가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웠지만 그것은 새외에서 패권을 잡은 후에 중원에 다시 진입한 것이었고, 최소한 중원의 옥토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북방대지가 비바람에 흔들리면서 백여년의 겁난을 겪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멀리 새외에 거주허며,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있던 선비족의 탁발씨가 마침내 굴기하여, 바람과 번개처럼 순식간에 각국을 쓸어버리고, 결국 북방을 통일한다. 그리하여 축록중원의 최종승자로 등장하며, 오호난화의 최대수익자가 된다. 오호가 물러나고 탁발씨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것은 사실 역사발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탁발씨의 행운과 기회는 그들이 북방의 패주로 등장하는데 둘도없는 후보자였다. 우선 탁발씨의 기원부터 보자.
탁발씨는 선비의 한 갈래이다. 선비족중 가장 북방에 위치했던 부족이었다. <<북사>>에는 그들이 '황제헌원씨의 후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탁발씨가 중원에 들어와서 자리잡은 후 한화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한족과 한 다리 걸쳐놓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후예라고 자칭한 것이다. 원래의 생각은 한족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조상에 조금 더 광환을 덧붙이면 된다. 이는 야만족이 중원에 진입한 후의 공통적인 태도였다. 선진문명을 접촉하고 난 후의 자비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의 발전을 이룬 후에 조상에 금칠을 하는 것이므로 믿을만한 것은 못된다. <<북사>>에 "황제는 흙의 덕으로 왕이 되었다. 북방에서 속어로 흙을 '탁(拓)'이라 한다. 후손을 '발(拔)'이라 한다. 그리하여 탁발을 성씨로 삼았다" 이것은 탁발씨의 유래에 대한 공식적인 유래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족과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스스로 그럴듯하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진서>>에는 하서 선비의 한 갈래로, 십육국중 남량의 건립자인 독발씨(禿髮氏)의 성씨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선조는 '후위'와 같은 갈래이다. '후위'는 즉 탁발씨가 건립한 위나라이다. 즉, 이 선비부족은 탁발씨와 같은 갈래인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적고 있다: "모친인 호액씨가 침대에서 이불의 가운데에서 낳았다. 그리하여 이를 성씨로 삼았다" 즉 꿈속에서 이불속에서 낳았으므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선비어로 '이불'을 '독발'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이불로 덮여있다는 의미이다. 이후 이들은 '독발'을 성씨로 삼는다. '독발'과 '탁발'은 같은 발음이다. 양자가 같은 갈래라는 것은 믿을만하다. 단지 이 두 부족은 사는 곳이 달랐다. 독발부는 청해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나중에 북방이 어지러울 때 남량정권을 건립한다. 이것도 십육국중 하나이다. 탁발씨는 여전히 막북의 춥고 척박한 땅에 살았다. 개략 현재의 시베리아 일대이다. 이들은 목축을 하면서 이주했고, 샤냥을 주업으로 했다. 즉, 원시부족의 생활을 했다. 나중에 북흉노가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선비족은 기회를 틈타 대막남북의 흉노 옛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탁발씨는 이리하여 남으로 이주하여 물과 풀이 풍부한 땅으로 옮겨간다. 조위시대에는 탁발부가 다시 남으로 옮겨가서 지금의 내몽고 중남부에까지 내려왔다. 여기서 크게 발전을 이루고, 이전의 단순한 유목생활을 바꾸기 시작하고, 중원과의 관계를 건립한다.
탁발씨는 처음에 분쟁이 붙은 것은 흉노 철불(鐵弗)씨였다. 진회제때 병주자사를 지낸 유곤과 철불씨가 싸우는데, 탁발씨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한다. 탁발씨는 전쟁을 도와준 공이 있어, 유곤은 글을 올려, 탁발씨의 추장인 의로(猗盧)를 "대공(代公)"에 임명하도록 청한다. 314년 다시 그를 대왕(代王)에 봉한다. 그리하여 "대나라"는 한 지방을 차지한 소국이 된다. 탁발씨와 철불씨는 이로 인하여 대대로 원수지간이 된다. 376년, 탁발십익건이 대왕으로 있을 때, 철불씨는 다시 전진에 병력지원을 하여, 탁발부를 오히려 패배시킨다. 이리하여 대국은 일거에 섬멸된다. 십익견의 손자인 탁발규는 모친과 함께 흉노의 하란부(賀蘭部, 탁발규의 모친은 흉노 하란부의 공주였다)로 도망간다. 386년, 탁발규는 전진이 쇠퇴하여 다시 북방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옛 부하들을 끌어모아 자립하고 대왕이 된다. 이어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위(魏)로 바꾼다. 이것이 '북위'이다. 398년에 평성(대동의 동북)으로 천도한다. 탁발규는 북위의 개국황제인 도무제이다.
탁발부가 재건된 후, 먼저 철불 유위진(劉衛辰)부를 멸망시킨다. 다시 삼합피(지금의 산서 양고 경내)에서 후연을 대파한다. 그리하여 한때 강성했던 후연은 남북 양부로 나뉘게 된다. 태무제 탁발도가 즉위한 후, 다시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공격하고, 유연을 짓밟는다. 마지막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던 북량, 북연을 제거하여 일거에 북방의 통일을 완성한다. 남조의 유송과 대치하면서 점차 강성해진다. 탁발도의 철기가 남하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간다. 장강 북안의 과보산(지금의 강소성 육합현 경내)에 이르러, 강을 마주하고 건강(지금의 남경시)을 위협하니, 그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한다.
오호난화 130년을 종결짓고 북방통일을 완성한 것은 무명의 탁발씨였다. 탁발씨는 이전에 흥성했던 모든 부족을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북방의 패자가 되었는데,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이다:
첫째, 탁발씨의 굴기는 마침 오호의 말기였다. 오호의 여러 부족은 오랜 기간동안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미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안은 약해져서 한대만 치면 쓰러질 지경이었다. 오호의 여러 부족은 원래 풍속이 강인하고 흉맹했으며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그러나, 부족의 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전투에 나서는 것은 전부 자신들 일쪽들이었다. 피정복부족들이 전쟁터에서 죽을 힘을 다 해서 싸우지는 않았다. 그런데, 집권자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부족의 병력을 감원했다. 여기에 염민이 발포한 '살호령'으로 갈족이 대거 주살되어, 오호의 인구가 크게 감소한다. 탁발부는 오랫동안 새외에 머물고 있으면서 중원의 다툼에 가담하지 않았었다. 인원수가 오히려 더욱 늘어나 있었다. 한편이 약해지면 다른 편이 강해지는 것이다. 탁발씨는 점차 강대한 부족으로 성장한다. 탁발씨가 흥성한 것은 기회를 잘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탁발씨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용맹한 기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호가 처음에 중원에 들어왔을 때는, 모두 흉맹하고 잔혹했다. 이는 유목민족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러나 중원에 정착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도는 다르지만 한화조치를 취하게 되며, 야만족의 흉맹한 기풍은 점차 약화된다. 기풍은 전투력을 좌우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전투력은 크게 감퇴되었다. 일찌기 북방을 둘로 나누어 한쪽을 차지했던 후연이 이러했다. 모용씨는 후기의 군사력이 처음에 중원에 들어올 때와 비교하여 많이 약화되었다. 이는 모두 한족의 문화를 접한 때문이다. 그러나 탁발씨는 변방의 춥고 황량한 지역에 살았다. 중원과는 실질적인 접촉이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용맹한 기풍이 남아 있었고, 에너지가 집중되어 폭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움직이면 군사적으로 파죽지세가 되어 당해낼 자가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오호난세를 목격하면서, 탁발씨는 정치적으로 뛰어난 선택을 한다. 먼저 중원에 들어왔던 오호는 폭정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거나, 아니면 왕위를 놓고 내분에 빠지는 바람에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폭정을 실행한 결과, 민족갈등이 아주 첨예했고, 민족간의 관계는 더욱 긴장되었다. 염민이 살호령을 반포하여 갈족을 대거 죽인 것은 이러한 민족갈등이 축적되다가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자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호는 난세를 틈타서 황급히 중원에 들어왔다. 중원의 부유함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통치자내부의 권력투쟁이 잦았다. 이는 그들 통치계급의 역량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한다. 흉노, 갈족이 황제를 시해하고 황제위를 찬탈한 사례라든지, 모용씨, 전진, 후진의 여러 군왕들이 의심때문에 배척하고, 음으로 양으로 싸움을 벌였다. 그러는 와중에 황제가 바뀌었다. 이런 내부분쟁은 정치통치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탁발씨가 채택한 통치전략은 아주 온화했다. 예를 들어, 탁발규는 건국후에 "여러 부족을 분리시켜, 각자 땅을 나누어 정착거주하게 한다" 이리하여 관할지역의 각 부족들은 모두 북위의 백성으로 편재된다. 이렇게 통치지역내의 각 부족의 세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통치력은 강화된다. 효문제는 적극적으로 한족에 동화되는 소프트정책을 쓴다. 점점 선비족의 본성을 잃어가고, 한족과 평호공존하는 융합국면을 이루게 된다. 중원은 백성들의 민풍이 잘 참고 내성적이었다. 탁발씨가 적극적으로 한화하고자 하고, 한인을 중용하고 유민을 배치하자 한족들이 이에 호응한다. 그러다보니 통치기반이 상대적으로 견고해진다.
넷째, 군사적으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먼저 유송이 도와주었다. 유유는 동진의 병권을 장악한 후, 몇년간의 휴양을 거쳐 실력이 점차 강해졌다. 408년 병사를 이끌고 북벌하여, 먼저 남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장안을 점령한다. 북방에서 오랬동안 패자로 있었던 후진을 멸망시킨다. 이는 객관적으로 탁발씨를 도운 것이다. 탁발씨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장애물을 제거해준 격이 된다. 그후 유유는 진나라로부터 황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는 점령한 땅들을 경영할 생각이 없다. 그리하여 대하국의 혁련발발에게 빈틈을 뚫고 들어올 기회를 준다. 유유는 실제로 탁발씨를 위하여 문을 활짝 열어준 꼴이다. 유유가 황제가 된 후에 다시 여러 장수들을 죽여버리니, 장수가 고갈되어 다시는 북방을 노리기 힘들게 된다. 이는 다시 탁발씨가 중원을 차지하러 내려가는데 기반을 닦아준 꼴이 된다. 다음으로, 중원서부의 서량, 남량, 북량, 서진등 여러나라가 서로 싸우고 합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전투력이 약화된다. 최후의 북량에 이르러서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결국 탁발씨가 어부지리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