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鮮卑族):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글: 노위병(路衛兵)
선비족은 중국고대 북방민족중에서 흉노보다 약간 늦게 흥성하였지만, 중원에 들어와서 자리잡은 기간은 흉노보다 길었고, 그 부족인구도 흉노보다 많았다. 오호난화때, 선비족은 중원에 들어와서 할거한 기간이 가장 길었고, 나라도 가장 많이 건국한 민족이다. 모용씨(慕容氏)가 건립한 전연, 후연과 남연, 걸복씨(乞伏氏)가 건립한 서진, 독발씨(禿髮氏)가 건립한 남량. 할거한 오호십육국 중에서 5개국가가 선비족이 건립한 국가였다. 이를 보면 선비족이 당시에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외에 16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서연과 서남지역에 웅거했던 토곡혼(吐谷渾)이 있으니, 그 부족이 얼마나 흥성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선비족은 중국고대의 대족 가운데 하나이다. 오호난화의 끝자락에 결국 선비족의 탁발씨(拓拔氏)가 일어나서, 일거에 북방을 통일해버린다. 이로써 100여년에 걸친 분열할거국면이 종결된다. 북위가 분열된 후, 선비족의 우문씨(宇文氏)는 다시 서위를 조종하다가 나중에 북주를 건립한다. 수문제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선비족은 중원에 근 300년동안 국가를 건립하여 유지해왔다. 이것은 오호중 그 어느 부족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툼없는 사실은 이처럼 강대했고, 연원이 길었던 선비주족이 하나의 독립민족으로서 중국에서는 결국 소멸해버렸다는 것이다. 선비족이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흥성했던 것은 우문씨(宇文氏)의 별종인 거란(契丹)이다. 그러나, 당시의 거란족은 이미 선비족의 특징이 거의 소멸해버렸고, 새로운 하나의 신흥민족이 되었다. 그렇다면 선비족은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역사에서 사라진 것일까?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선비족의 역사를 살펴보자.
선비족의 역사연원
선비는 흉노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존재한 고대민족이다. 최초로 역사에 나타나는 명칭은 동호(東胡)이다. <<후한서>>에서 그들은 흉노의 동쪽에 거주하므로 "동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에도 강대한 민족이었다. <<진서(晋書)>>에서는 그들을 "흉노와 나란히 흥성했다"고 적었다. <<사기>>에는 "모돈이 일어설 때, 당시 동호가 강성했다"고 적었다. 모돈선우는 흉노역사상 핵심적인 영웅인물이다. 그가 나타나면서 흉노부족은 동호보다 먼저 통일된다. 그리하여 동호보다 먼저 굴기하게 되는 것이다. 동호부족은 한족과 교섭과 분쟁이 계속되었다. 전국시대 연나라장수 진개가 동호를 대파한다. <<사기>>에서는 "동호를 습격하여 격파했다. 동호는 천여리밖으로 물러났다" 이를 보면 당시에 동호는 한족과 경계를 마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에는 이 부족이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역량이 제대로 결집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흉노만큼 골치아픈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진, 조, 연의 삼국은 북쪽에 장성을 쌓았는데, 주로는 흉노를 방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호를 방비하는 것도 사실 중요한 목적중 하나였다.
흉노가 굴기한 후에 동호를 연이어 격파한다. 그리하여, 동호는 동쪽으로 도망쳐서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의 두 부족으로 분리된다. 오환, 선비는 원래 산이름이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돈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은 무리들은 이 두 산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이때부터 오환, 선비의 두 산의 이름을 따서 부족명이 되었다. 오환은 남쪽에 있어 중원에 근접했다. 선비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추운 곳에 살았다. 기원전73년, 흉노가 천재를 입고 내란에 빠진다. 오환은 이 기회를 틈타서 흉노를 공격하여 격파한다. 그리하여 흉노가 북으로 도망치고, 천리가 빈땅으로 남게 된다. 흉노는 이때부터 쇠락하기 시작한다. 오환의 진공이 쇠락의 큰 원인이었다. 오환은 이때부터 흉노를 대체하여 중원의 골치거리로 등장한다. <<삼국지>>에서 오환은 "성읍을 공격하여 인민을 살륙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원의 골치거리가 된다. 나중에 위무제 조조는 유성(柳城, 하북성 승덕 경내)에서 오환을 대파한다. 그리고 항복한 20여만을 참살한다. 오환은 이로서 기세가 꺽인다. 남은 무리는 조조에 의하여 내지로 이주당하고, 점차 한족에 동화된다. 이주하지 않은 자들은 모조리 북방으로 도망쳐서 선비에 합류한다. 오환부족의 역사는 이로써 끝이 난다.
흉노가 한나라에 격파당한 후, 북흉노는 유럽으로 도망친다. 선비족은 기회를 틈타서 흉노의 옛땅을 차지한다. 북흉노중에서 도망치지 않은 자들도 선비에 융합된다. 선비족은 이때부터 강성하게 된다. 기원3세기경, 선비족중에 두 명의 뛰어난 인물이 등장한다. 단석괴(檀石槐)와 가비능(軻比能)이다. 이들이 선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짧은 강성기를 누리게 된다. 지역은 동으로 요동에서 서로는 서역에 이르며, 대막남북을 모조리 통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성기는 단석괴와 가비능의 사망으로 끝이 난다. 선비족은 다시 사분오열하게 된다.
선비족은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선비족은 부족인구가 많고, 차지한 땅이 매우 넓었었는데, 결국은 중국역사에서 사라진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선비족 한화의 필연의 결과이다. 선비족의 혈맥은 아마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한 민족으로서는 확실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한족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본민족의 특성은 점차 소실되고, 특징이 점차 한족에 가까워진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때문이다.
첫째, 옛땅을 잃어 민족의 근본을 잃었다.
속담중에 일방수토양일방인(一方水土養一方人)이라는 말이 있다. 선비족은 새외에 멀리 거주하여, 중원과의 접촉이 아주 적었다.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독립된 상태를 유지했다. <<삼국지>>에서는 선비족이 "물풀을 따라 방복하고,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고, 궁려(穹廬)를 집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춥고 힘든 땅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들은 강인하고 용맹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는 점점 민족의 특성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은 불같고 걷잡을 수가 없어서 화가나면 부친이나 형도 죽인다" 이를 보면 그들 민족의 풍습이 얼마나 난폭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비족이 날로 강성하자, 중원을 노리는 마음이 생겨난다. 마침내 진(晋)나라말기에 중원에 들어와서 자리잡는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한족과 실질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한족에 동화되는 기반이 마련된다. 그들이 춥고 힘들었던 옛땅을 떠남에 따라, 한족의 문명의 따스한 바람에 물들어갔다. 그리하여 자신의 민족특성이 점차 한족에 동화된다. 이는 그들이 사는 지역이 달라진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선비족이 최초에 흥기하여 중원에 들어왔을 때는 일찌기 한족 소녀들을 군량으로 쓰기도 했던 야만민족인 모용씨가 통치후반에는 전투력이 아주 약해진다. 이는 옛땅을 멀리 떠나게 됨에 따라 한족의 풍습에 물들어간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탁발씨의 위나라가 막북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후, 일련의 한화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본민족의 특성은 점차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들은 모두 지역의 변화가 가져온 변화이다. 선비족 모용씨의 또 다른 한 갈래인 토곡혼부는 멀리 청장고원에 살고 있어, 지역이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니, 민족특성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이 부족은 나중에 티벳의 타격 받아 동화되기도 하고, 점차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나머지 무리들은 오대때 요(遼)에 편입된다.
둘째, 언어의 상실로 결국 민족이 사라진다.
하나의 독립민족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자신의 독립된 언어이다. 언어의 상실은 민족의 소멸을 의미한다.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온 후에, 한어를 폐지하지 않고, 반대로 한족말을 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당시의 선비족은 한족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1) 선비족은 한족들에게 더 잘 배우고 싶어했고, 그러려면 한족말을 알아야 했다. (2) 선비어는 한어보다 많이 낙후되었다. 그리하여 발전해가는 추세에 맞추어가기가 힘들었다. 한어를 배우는 것은 부득이한 조치였다. 탁발씨가 북방을 통일한 후, 효문제는 일련의 한화개혁을 벌인다. 그중 가장 중요한 개혁은 바로 "북어(北語)를 끊고, 성(姓)을 고치는 것"이었다. 효문제의 개혁은 역사조류의 흐름에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비민족특성으로 말하자면, 이는 스스로 동화된 것이고, 스스로 본민족의 특성을 포기한 것이다. 효문제는 명문으로 선비귀족이 선비어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일률적으로 한어로 바꾸어 말하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본민족의 언어가 점차 소멸한다. 언어의 상실은 결국 민족특성의 소멸로 이어졌다. 한족성을 쓰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표면적인 민족특정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언어는 기본이다. 언어에서 문자, 문화까지 한화되면서, 결국 선비족은 한족과 하나로 융합된다.
셋째, 민족간의 통혼은 최종적으로 혈통이 연결되게 만들었다.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온 후, 한족 및 다른 민족과 잡거하기 시작한다. 서로 통혼한 결과는 민족간의 혈통이 서로 연결되게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인종의 특색이 갈수록 불명확해진다. 북위 효문제는 선비와 한족의 통혼을 장려했다. 그리고 선비족의 옛습속을 고쳐서, 한족의 풍속과 생활방식을 배우도록 명령한다. 한 민족의 풍속습관과 생활방식은 민족성을 공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그 민족의 민족성이다. 선비족은 국가에서 금지하는 형태로 자신의 민족성을 포기했다.
이상은 선비족이 역사에서 사리진 주요한 몇 가지 원인이다. 그렇다면 왜 선비족은 중원에 진입한 후 그렇게 한화되려고 노력했을까? 일부러 한족에 융합하려고 노력했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는 문명이 야만을 대체하는 역사의 필연이다. 둘은 야만족의 잠재의식 속에는 일종의 자기비하가 있었고 그것때문이다. 사실상 선비족은 부족의 형식으로 중원에 들어와 자리잡았다. 이전의 건국은 일종의 표면적인 형식일 뿐이었다. 그 본질은 결국 부족연맹적인 성격이었다. 국가로서 그들은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역사적인 전승이 없었다. 선비족은 오랫동안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서 살다보니, 삶을 위하여 '물풀을 따라서 방목을 했다" 그리고 거주지도 일정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그들의 강인하고 용맹한 성격을 만들고 강한 전투력을 갖게 해주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원시상태였다. 특히 한족의 심후한 문화와 접촉하고나서, 자연히 민족적인 자기비하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자기비하는 그들로 하여금 고유의 민족전승을 손쉽게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선진적인 문명과 민족문화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모용씨, 탁발씨가 중원에 들어선 후에 적극적으로 한화개혁을 하게 된 이유이다.